2020년의 ‘뉴노멀(New Normal)’은 동의와 예견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전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괴이쩍은 새 일상에 적응했다 싶은 순간, 일상의 안도와 방심을 등에 업고, 이 질병은 우리 사이의 가장 느슨하고 취약한 곳을 파고 찌른다. 그 술래잡기에서 지친 사람들은 일상의 결핍을 위로받고 싶어 하고, 멈춤과 격리의 시간에도 창의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예술가들 역시 현실을 마주하는 법을 자습(自習) 중이나, 무용이나 연극 같은 공연예술의 타격감은 더욱 깊다. 멈춤과 재개, 지연과 취소, 예정과 추후 통지, 통보와 권고사항이라는 롤러코스터를 매일 탄다. 무력감과 언러닝 사이, 연대와 불신 사이, 낯선 기대와 익숙한 실망 사이, 생물학적 생존과 예술적 죽음 사이의 호를 오가며.
<추후공지: 지연된 현실>(TBD: Delayed Reality)
지금 화해와 공존이 필요한 이유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The 5th International Teaching Artist Conference, ITAC5, 아이택5)가 9월 서울에서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온라인 컨퍼런스로 기획되었다. 3일간의 행사는 언러닝으로 이끄는 예술, 예술교육가의 언러닝(Unlearning), 고유성과 보편성(Local and Nomadic Practices), 포용, 화해 그리고 공존(Peace and Reconciliation)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나는 ‘포용, 화해, 공존’ 주제의 프로그래밍과 사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난감한 일이다. ‘멈춤, 재개, 취소, 지연, 추후공지’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킬 수 없는 권고와 지켜야 하는 권고가 개인의 책임으로 오롯이 귀결되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향하는 현실에서, 예술가와 티칭 아티스트(Teaching Artist, TA)가 말할 수 있는 ‘평화’는 무엇이고, 화해와 공존은 가능할까.
문화예술교육은-국가나 지역, 시대에 따라 예술, 예술교육, 문화예술교육, 창의 학습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나-대체로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며, 개인의 역량을 개발하고 창의적 격차를 감소시키는 사회통합의 유도체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대부분 사회에서 예술은-어떠한 방식이나 측면이건 간에-평화, (긍정적 방식의) 공존, 공존을 위한 화해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코로나19는 다양한 층위의 혐오, 차별, 개인의 권리 등 사회적 양극화 같은 예민한 이슈를 전면에 드러나게 한다. 마치 예술가가 개인의 서사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권력의 다이내믹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 질병은 개인의 두려움, 불안감, 거짓말을 타고 지역, 건강, 성적 지향, 세대, 종교, 정치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균열을 가시화시킨다.
개인의 정보와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제한할 것인가. 학교와 직장, 경제활동을 봉쇄할 것인가. 어떤 집단을 격리, 혹은 자유의 이름으로 허용할 것인가.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혹은 누구를 살릴 것인가. 이 질병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철학적 가치판단의 질문들은 현대 예술의 방식보다 훨씬 가혹하고 무자비하며 선택의 결과를 눈앞에서 치르게 한다. 2019년의 내게 타임머신을 타고 온 누군가가 “2020년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외출이 불법이고, 원격수업과 재택근무가 보편화 되고, 트로트 인기가 폭발하는 일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예술과 문화예술교육이 휴머니즘의 강조나 혐오와 차별의 완화를 위한 처방을 강조할지, 예술을 어떻게 언택트의 방법으로 전달하는가에 대한 고민일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질문과 돌아봄이 필요해 보였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와 화해’를 문화예술의 성과로 보기보다는 사회를 지탱하던 균형이 무너질 때 맞이하는 균열과 갈등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인간 사이의 신뢰를 위협하는 ‘위드 코로나’의 시간에도, 우리의 활동이 증오와 차별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존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연된 현실을 질문하기
우리는 30여 명의 예술가와 TA를 대상으로 인터뷰했다. 그들의 대답을 기반으로 다섯 명의 배우와 무용수들이 모여 <추후공지: 지연된 현실>이라는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 중이다. ‘추후 공지’라는 말은 올해 공연 일정표에서 ‘취소’ 만큼이나 익숙한 단어였다. 포기를 유보하고 얻은 ‘지연된’ 희망과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이 제목이 되었다. 그들에게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격리 혹은 마스크 등 당신의 예술적 일상에 신체적·감정적으로 일으킨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코로나19 이후 타인에 대하여 어떤 감정(거리감, 유대감)을 느꼈나. 이것을 움직임이나 표정,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격리와 멈춤을 통해 깨달은 가장 평화롭지 못한 변화는 무엇이며, 새롭게 발견한 평화는 무엇인가.
공연·교육·행사 등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는데, 이 기다림에 대한 당신의 기분, 느낌은 어떠한가.
온라인 공연이 대세가 된 지금, 당신은 공연예술이 여전히 실시간(Live)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예술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대화로 시작한 인터뷰는 흔히 샛길로 새기 일쑤였으나, 우리가 발견한 것은 예술가들이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이런저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일정 지연과 취소를 경험했지만, 그 시간 동안 자신의 활동 방식을 돌이켜보고 인간과 일상에 대해 통찰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작업을 혁신하거나 이동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영상작업을 하는 예술가의 경우, 갑자기 쏟아지는 업무로 인한 고단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마스크는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연대와 집합, 소통이 필수조건인 예술 활동의 조건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스크는 불신의 실마리이기도 했고, 일정량의 자유를 선사하기도 했으며, 사회화되어가기도 했다. 취합된 인터뷰 내용 일부를 공유한다.
  • <추후공지: 지연된 현실>(TBD: Delayed Reality)
    프로젝트 기획: 김병주, 제환정 | 출연진: 김현정, 김봉수, 류성, 이지윤, 정건 | 영상감독: 이정민
    [영상출처] 교육진흥원 유튜브
마스크, 격리,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무래도 남을 의식하면서 사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데. 아… 이런 얘기 해도 되나. 솔직히 전 좀 편했어요. 마스크를 쓰니까 저 자신이 밖에서 활동할 때 뭔가 좀 더 당당해지고 그런 느낌?”
– 익명, 무용가
“마스크 안에 표정이 안보이니까,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나? 이런 의심이 생기는 거예요. (코로나 이후 마스크 착용이 보편화 되면서) 타인에 대한 의심이 들 때도 있고, 신뢰감이라 해야 하나, 훨씬 줄어든 것 같아요.”
– 익명, TA
“제가 원래 웃을 때 이렇게 입만 웃었거든요. 근데 마스크를 쓰니까 웃는 표정이 안 보이잖아요. 보세요. 웃고 있는데. 안 보이죠? 그래서 연습을 했어요. 이렇게. 눈으로 웃는 연습. 이렇게. 보여요?”
– 김서진, TA
“연습할 때도 마스크를 끼고 연습하거든요. 근데 연기라는 게 상호 감정이 계속 오고 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상대방 표정이 보여야 내가 공감도 하고 거기에 반응도 나오고 그런 건데. 와. 이게 안 되니까. 그냥 대사 외우는 거밖에 안 되는 거 같은 거예요. 이게 뭐 하는 건가. 근데 사람이 진짜 적응의 동물이더라고요. 상대방의 표정 대신에 말. 말에 집중하는 거예요. 말의 느낌. 디테일한 호흡. 악센트. 음정. 이런 것들에 집중하는 거죠. 그걸 통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예전과는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고 할까.”
– 류 성, 배우·연출가
불안과 희망의 예술에 대하여
“코로나19가 딱 전쟁 같아요.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아트 리터러시 이런 게 과연 우선순위가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간이기 때문에 예술이 더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 양정현, TA
“우리 또한 바이러스처럼 대하는구나. (연극) 공연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하는데도. 우리 먼저 막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예술가를 보는 관점에 대한 양가감정이 생겨요. 이제 코로나 시대에 (연극인도) 미디어를 공부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예술가를 단순하게 불쌍한 지원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에 대한 불편함 같은 게 있어요.”
– 김현정, 배우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코로나 이후에) 생계적인 부분에도 영향이 있어요. 영상자료들이 많이 풀리다 보니까 처음에는 좋아서 봤었는데, 지금은 보기도 싫고….”
– 익명, 공연자
“극장으로 관객이 오지 않아도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걸 관객들이 깨달아버렸고…. 슬프지만 이런 것에 예술가들도 각성하고 준비해야겠죠.”
– 박광현, 무용가
“아, 이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 해도, 저는 이거 밖에 안 떠올라요. 공연은 라이브여야 한다. 그게 저를 제일 행복하게 해주니까.”
– 박선희, 연출가
<추후공지: 지연된 현실>(TBD: Delayed Reality)
이 글을 쓰는 며칠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되었고, 3단계로 격상을 검토 중이다. 천 마스크를 끼고 환담을 나누던 리허설 시간은 지나갔다. 포위망에 쫓기는 사람처럼, 우리는 자신이 확진자 동선에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고백하며 연습을 시작한다. 35도씨의 더위에 춤추고 대사를 소리치면서 아무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추후공지: 지연된 현실>의 제목이 함축하듯, 라이브 퍼포먼스 계획은 미정에서 장소 폐쇄, 변경의 경로를 걸으며 버퍼링 중이다. 공연 제목인 ‘추후공지’(To Be Determined, TBD)는 행사 일정표에서 제목이 아닌 현실의 사태로 읽히기 일쑤여서, 오늘도 <추후 공지(TBD) 제목미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럼 제목은 언제 나오냐”는 질문을 받는다. 글쎄,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이 영원하다”(『위대한 개츠비』)고 했나. 지연된 현실을 마주하려면, 아주 약간의 희망은 언제나 필요하다.
제환정
제환정
‘모든 인간은 무용수’라는 믿음으로 춤과 춤추는 인간을 독려하고 탐구하며, 세상 구석구석 예술이 있기를 도모하고 있다. 예술교육자, 창작자, 해설자, 저자로 학교, 병원, 무용단 등 춤이 필요한 곳에서 활동 중이다.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 프로그래밍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템플대학교 무용학 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jaehj07@gmail.com
사진 _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