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고 예술계에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도, 예술도 계속된다. 여러 변화와 위기의 순간을 지내온 예술가들이 각자의 삶을 지키고 예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네 명의 예술가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본다.
 
① 박찬국 여기서 예술/작가
  
② 정진세 극단 문 대표, 극작가‧연출가
  
③ 박성선 미리오페라단 예술감독
  
④ 이성미 시인‧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
“비현실성의 슬픔이 배지 않은 미의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의 충족은 유토피아처럼 현실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가상에서만 실현되는데 그것이 삶 이상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플라톤, 쉴러, 니체, 아도르노, 이런 사람들이 발전시킨 논리라고 한다. 으-음, 그렇다. 친구들아, 예술 하려면 우선 지속적인 뇌피셜을 가능하게 하는 게 핵심이란다.
약간, 아주 약간 다른 텃밭
올해 정기적으로 나주에서 하는 일이 생겼다. 잠시 놀고 있는 시유지가 있어서 동료들과 텃밭을 하기로 하고 빌렸다. 문화적으로 써야 하니 ‘드로잉 텃밭’이니 ‘시가 터지는 밭’이니 그럴듯하게 명명했다. 안정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변수가 많은 것이 더 재밌으리라 생각했던 터라 서두르지 않았다.
그 사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심하게 왔다. 텃밭을 함께 해보자고 주변에 권했지만 심리적으로 움츠러들어서 반응이 별로였다. 꼭 필요한 것만 배우는 프로그램도 아니고 적당히 논다고 하니 잘 모이지 않았다. 덕분에 동료들 몇이 운영하게 되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매우 자유로워졌다. 국내외 여기저기서 받아온 씨앗들을 우선 발아시켜 놓고 밭에 가봤다. 새완두가 섞인 살갈퀴가 무성했다. 와-아! 연한 녹색 덩어리가 무척 아름답다. 감탄만 하고 며칠 보냈는데, 아니 이건? 놀랍게도 사이사이 꽃 양귀비가 피어났다. 뒤집힌 낙하산처럼 가볍고 투명한 붉음. 자세히 보니 이런저런 종류들이 마구 솟는다. 꽃도 잡초도 있는데 어린것들이라 신기하고 아름답다. 흥분한 나머지 사진만 찍고 놀았다. 며칠 사이 더 많은 것들이 올라왔는데 풀들이 엉켜 자라면서 가리는 게 아쉬웠다.
여기서 우리가 애초 세웠던 디자인은 모두 버렸다. 풀숲에 묻힌 갖가지 꽃과 어린잎들을 발굴하는 데 집중했다. 알고 보니 이 땅은 집터였고 일부는 꽃밭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굴 텃밭’, 아니 ‘발굴 꽃밭’이 되었다. 이름 모를 꽃 여럿과 둥굴레, 엉겅퀴, 민들레… 꽃대가 쑤욱 올라온 유채, 갓, 배추, 채소류도 있다. 이름은 몰라도 주인공이 될만한 것은 살리고 주변 풀은 정리했다. 뽑아낸 자리에는 발아시켜 놓았던 고수와 토마토, 래디시, 주키니호박 이것저것 더 심었다. 밭은 생각지도 못한 분방한 형태가 되었다. 유채와 배추와 갓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꽃이 피었다가 가지 끝에서 통통하게 씨앗이 들었다. 꽃이 졌지만 아름다웠다. 그사이에도 새로운 발굴은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메리골드가 화악 올라왔다. 피마자도 반가웠다.
사라진 잡초, 농사의 기쁨과 슬픔
노인들과 텃밭 하는 팀에서 가끔 같이하자는 그럴듯한 제안이 왔다. 수확물도 나눠야 하니 오케이 했다. 사건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조금씩 발굴하며 즐기는 텃밭의 반쯤이 깨끗해져 있다. 덜 자란 둥굴레나 아껴보고 있던 여린 꽃들이 잡초와 함께 사라졌다. ‘허걱’ 했는데 할머니들은 오히려 우리를 보고 의아해했다. “왜?” 잘못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세세히 설명했다. 할머니들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요구는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사실 잡초가 너무 무성했다.
빈자리도 메꿀 겸 나주 오일장에 나가서 각자 원하는 모종을 사 왔다. 작물들의 높이와 형태, 수확물을 고려하여 수수, 작두콩, 박, 방아, 콜라비, 비트, 가지, 고추, 파프리카와 강화순무, 청경채를 심었다. 민트, 바질, 라벤더, 옥수수, 호박, 커피, 올리브도 심었다. 그동안 노는 꼴을 보면서 가끔 한말씀하시던 동네 분들이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이랑도 안 만들고 간격도 지키지 않고 심어놓은 작물을 보면서 자신이 작물이라도 된 것처럼 답답해하셨다. 거름을 하지 않는 것도 불만이고 빈 땅을 많이 남겨두는 것도 불만이다. 고추, 가지, 옥수수처럼 익숙한 작물은 아예 뽑아서 옮겨 심었다. 우리 팀 친구들은 거부하지 않고 잘 듣고 배웠다. 그렇다고 가르쳐준 그대로 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쑤욱 자란 것이 기특하고 꽃이 피면 놀랍고 열매와 씨알이 굵어지면 감탄하지만, 많이 수확해야 한다는 목표도 일해야 하는 의무도 불분명했다.

‘먹는 것인데 이래도 돼?’ 할머니들의 표정에서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았지만 언제 어떻게 먹어야 되는 것이 하나로만 정해져 있을까? 간격을 좁게 심어 너무 빨리 자라지 않아야 어린잎을 오래 즐길 수 있다. 배추나 무는 김장용으로만 길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싹으로도 먹고 샐러드나 겉절이로도 먹고 그냥 꽃이 좋아 키울 수도 있다. 어느 날 보니 배추씨가 우수수 떨어져 무수히 많은 새싹들이 올라왔다. 우리가 심지 않았지만 너무 아름다운 이 여린 잎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니! 언제 수확한다는 목표가 흐릿하면 어떻게 쓸까 궁리하게 된다. 생계에 도움이 되는 절실한 경험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궁리 같은 건 필요 없고 다르게 활용할 여지도 적다.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어느 날은 할머니들이 고수를 남김없이 뽑아버렸고 어느 때는 잎사귀 상태가 별로였던 순무를 모두 뽑아버렸다. 고수와 순무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작물이었다. 주변에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온 인부들은 잘 자라던 호박과 옥수수를 풀과 함께 무참히 베어냈다. 가려가며 베는 것은 효율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아끼던 여린 배추도 모두 사라졌다.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의 구분에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농사는 효율이다.
좀 노골적으로 밭 관리를 그만두시라고 얘기하는 일도 있었으나 어느 날 보면 시원하게 잡풀이 사라져 있다. 당연히 우리가 관심 두고 있던 몇몇 식물도 함께 희생된다. 이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마도 할머니들의 풀 메는 일은 수다 명상에 가까운 듯하다. 티끌의 연두색도 남기지 않는다. 알고 보면 할머니들에게도 많은 수확 정도의 목표를 넘는 어떤 것이 있다. 딱히 놀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막무가내지만 애매하게 노는 우리 팀과 어딘가 통하는 게 있다. 일상과 비일상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화를 내면 안 된다. 뽑혀 나간 빈자리는 새로운 궁리와 함께 채워진다. 예측하기 어려운 디자인이 늘 등장한다. 이 과정도 그럴듯한 대화다. 컨설턴트 할머니들도 이제는 간섭보다 호기심을 갖는 듯하다. “뭐가 되는겨?”
반응을 주고받기
우리가 여기저기 땅을 남긴 것은 드로잉과 연주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어설프지만 요리와 계절 다양성과 씨앗을 주고받기 위함과 계속계속 감동을 먹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얼마 전에 토론토에서 가져온 잘 자라지 않는 토마토를 위해서 <위로 연주회>를 열어주자고 했다. 이 핑계로 색소폰 동아리와 만나 알리오올리오 바질 떡볶이를 만들어 먹고 놀았다. 텃밭에 있는 바질이 얼마나 훌륭한지 먹어봐야 안다. 즉석 레시피이지만 익숙한 떡볶이와 익숙하지 않은 바질 조합은 그런대로 통했다. 대가 연주는 약속받았으니 장마 끝나면 그동안 풀 메고 컨설턴트 하느라 힘드셨던 할머니들과 색소폰 팀의 연주를 들으며 늦은 작물들의 성장을 같이 염원해야 한다. 바리스타 청년의 판소리, 아코디언 동아리, 전자기타 숨은 고수, 은퇴한 소방관의 노래도 듣기로 했다. 가을밤 밭 주변으로 각자의 의자를 끌어다 놓고 듣다가 흥이 오른 어떤 고수가 또 나설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행동면역체계가 작동한다고 한다. 불결한 것이나 낯선 냄새는 거부하고, 부패한 것은 뱉어내고, 익숙하지 않은 음식은 적당히 피한다.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행동면역체계가 잘못된 정보에 작동될 가능성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판단하기 어렵다 보니 사회적거리를 유지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순간적 판단과 결정의 압박은 새로운 번아웃을 야기한다고 한다. 그래서 판단을 중지하고 회피가 일상화된다. 일상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예술의 섬세한 가능성이 묻히고 있다. 사람들은 뜻밖의 사건, 퍼포먼스에서 반응하기도 하지만 누적된 관찰과 관계의 지속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것에 반응한다. 서로 반응을 주고받을 때 흥미롭다. 코로나19가 야기한 행동면역체계는 이 가능성을 잡아먹고 있다.
내 작업의 많은 부분이 이 반응과 반응에 기대왔다. 예술도 교육도 상황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한때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구들 상태가 좋았다. “거의 모든 것의 배후에 예술이 있게 하라” “생존을 넘어서는 생존기술” “ASM(Art Spirit Machine, 예술의 힘 발생기-예술의 힘이 발생 되게 하는 시간과 장소. 장치)” “비어 있는 유토피아” 등등등.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는 애쓴 자리에서 자주 밀려나고 있었다. 쓸데없는 노력이 문제였는지 설득 부족이 문제였는지 뭔가 과잉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과잉은 예술의 중요한 요소다) 익숙함에 대해 과잉반응하는 것이 제일 문제였을 게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이다. 대다수의 관리자가 어쩌면 본능적으로 밀어낸다. 논리로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재밌는 척해도 이 사람은 결국 지는구나. 눈치챈 친구들이 있다. 맞다.
그러나 이건 오해가 있다. 관행에 익숙한 농사꾼들처럼 명확한 목표가 중요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두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소유할 수 없어도 시간과 장소를 장악하는 것은 나다. 움직이는 것은 나다. 예술을 하겠다. 이것은 미리 경험되지 않은 실천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다. 그게 자유다. 강화된 행동면역체계에 지는 것처럼 보여도 지속적으로 정신승리 하면 된다. 그게 예술이다.
익숙한 간섭에 거리를 두고
여기서 어려운 시기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최근 몇 년간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데도 버려져 있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도 다녔다. 이런 곳에서 서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재밌게 노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했다. 늘 잘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적당히 둘러대고 있는 국가(꼭 한국만이 아니라 어느 국가라도)와의 관계를 최소화하면 절반은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소리가 들린다. 싼 땅을 매입해서 기후 위기도 기술변화도 스스로 책임질 만큼 책임지고 살면 되지 못할 게 뭐 있는가.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감염병이 지구를 휩쓸고 있다. 이제 이런 상황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열광하는 팬덤을 만들어야 정신승리도 성공할 수 있는데 행동면역체계는 강화되고 있다. 예술로 마취시키기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서, 국가나 정부와 헛된 간섭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만들기는 불가능할까?
여기가 지겨운 사람들아, 들어봐. 우리가 한 천명쯤 모이면 혹시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이런 땅, 이런 공간 있으면 이주할지도 몰라. 왔다 갔다는 최소한으로 할 거야. 자아, 한 번 제안서 갖고 와 봐. 노령화에 인구 부족에 빈집 때문에 고민 많잖아? 교육 같은 건 절로 되니 사랑도 피어날 거야. 아끼면 똥 된다, 이러면서.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붙어라. 어반잼(Urban Jam)!
박찬국
박찬국
1990년대 중반 M조형연구소를 만들어 커뮤니티형 도시벽화, 어반아트(urban-art)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 밀머리 미술학교를 열고 공간, 문화, 예술교육이 결합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논아트 밭아트(nonArt butArt)’ 예술감독, 서울시청년일자리허브 청년학교 교장을 지냈고, 2014년 동대문신발도매상가에 DRP(동대문옥상낙원)를 열었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로 현장상을 수상했다. 2017년부터 지역의 빈 공간을 다니며 상상을 공유하는 ‘어반잼’을 진행하고 있다. 이 내용 일부가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영토해킹” 프로젝트로 발표되었다. 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건물에 통합되거나 임시적인 놀이터 설치작업을 좋아한다. 최근 어반잼 활동을 늘리고 있으며 나주문화도시조성지원센터에서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pckook01@gmail.com
www.chankook.com
어반잼 페이스북
사진 _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