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아카이빙은 사라지거나 잊혀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우연한 기록이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되어 아카이브로 구축되고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되기도 한다. 지역은 지역민의 삶이 계속되고 수집해야 할 대상도 계속 생산되는 의미에서 ‘리빙 랩(Living Lab)’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또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통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협력하며 실행하는 ‘생활 속 실험실’로서의 지역과 공간의 기록을 살펴본다.
  • [아마추어 서울] vol.7 <조은영의 장사동>
    [사진제공] 아마추어 서울
  • ‘서울의 OO’을 주제로 한 전시
    [사진제공] 아마추어 서울
도시를 기록하다
‘아마추어 서울(AMATEUR SEOUL)’은 서울 지역 곳곳 일상의 공간이 가진 역사와 매력을 ‘지도’라는 매체를 통해 기록한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구성원들은 변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오래된 동네를 기록하기로 했다. 구성원들은 서울을 탐사하며 한 장소와 깊이 관계 맺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리서치 과정 등을 담은 비정기 간행물로 지도를 발간한다. 2009년 원서동-계동-재동에 이르는 북촌을 담은 1호 <옛서울>을 시작으로 <익선洞>, 서대문과 독립문 사이 지역을 담은 <西서울> 등으로 이어졌다.
2017년부터는 좀 더 깊게 사람과 공간탐사가 진행되었다. 건축가이자 생활자가 직접 기록한 성수동, 중구 초동에서 20년째 인쇄업에 종사한 이의 인생사와 인쇄업 역사, 세운상가 서점 ‘세운기술서적’의 50년 역사와 소소한 에피소드를 담기도 했다. 올해는 ‘아마추어 서울’의 지도가 제작되는 과정을 ‘종이’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는 <종이의 여행>을 발행해 10호를 채웠다. 이들은 장소가 지니는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아마추어 서울만의 지도를 만들었다. 5평 남짓한 오래된 서점을 사진으로 탁본하듯 콜라주한 공간지도를 만들거나 모바일 앱을 활용했다. 을지로 일대의 열쇠 수리 리어카, 과일 트럭, 쌍화탕 카트 등 ‘움직이는 가게’를 기록한 9호 <크리스 하마모토씨의 일일>은 움직이는 가게들의 위치가 좌표로 기록된 모바일 구글맵 화면과 한 인물이 이를 따라 이동한 여행기(짧은 소설)로 구성했다.
아마추어 서울은 지도 외에도 전시, 투어, 워크숍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초등학생들과 ‘이야기 지도’ 워크숍을, 성인들과는 모바일 앱 ‘워킷(Walkit)’을 이용한 지도 만들기 워크숍을 하고 있다. 그래픽, 사진, 가구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가 다섯 팀이 ‘서울의 OO’을 주제로 리서치-아카이빙-메이킹 작업을 지속해온 과정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고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공간과 시간, 사람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은 아마추어 서울의 지도들은 직접 도시를 여행하며 찬찬히 들여다보고 자신의 시선으로 기록해보라고 충동한다.
내 고향, 아파트 단지의 기억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는 이인규 작가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재건축으로 사라지기 전의 아파트 모습을 기록한 작업이다.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둔촌주공아파트는 1979~1980년에 준공해서 약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2018~2019년에 철거되었다. 143개 동 6,000여 세대 규모로, 한 개 행정동 주민이 거의 이 아파트에 거주한다고 볼 수 있다. 이인규 작가의 작업은 2013년 독립잡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첫 권을 시작으로 6년간 시리즈 4권과 사진집 1권으로 기록되었다. 잡지에는 계절에 따라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파트의 모습, 아파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록 등 공간의 기억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인규 편집장은 잡지 2호를 발행하면서 둔촌종합상가에 커뮤니티 공간 ‘마을에숨어’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일러스트, 캘리그라피 등 워크숍을 열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이들과 함께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했다. 2016년에는 영상작가 라야와 함께 집의 기억을 담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은 아파트 게시판에 ‘당신의 집을 기록해드립니다’라고 쓴 전단을 배포하고 집 내부를 찍은 사진과 사연을 받아 신청자를 모집했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하고, 이때 들은 이야기와 집의 풍경을 영상으로 담았다. 작업은 잡지 발행과 함께 라야 작가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로 만들어졌다. 작업을 통해 재건축 이슈나 무너지는 건물 모습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들었던 곳과 헤어져야 하는 이야기를 꺼내고자 했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자 사진집 『아파트 숲』은 프로젝트가 진행될 당시 고등학교 교지편집부 학생으로 처음 만났던 류준열 작가가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에 가득한 나무를 2년간 기록하여 엮은 것이다. 아파트가 가득 늘어선 풍경 속에 40년의 세월 동안 자란 진짜 ‘숲’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류준열 작가는 올해 5월에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재구성한 《부재의 아카이브》 전시로 둔촌주공아파트 마지막 모습과 남겨진 것들을 담았다. 아파트는 없어졌지만, 공동의 기억은 계속 마을로 연결된다.
마을의 내러티브를 담다
해방 후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정착하고 한국전쟁 후 피난민이 가세하면서 형성된 남산 아래 첫 동네 ‘해방촌’은 용산구 용산동2가를 일컫는다. 다양한 문화가 조화롭게 섞여 있는 해방촌의 사라져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 기록하려는 주민들의 모임은 2년여 시간이 쌓여 ‘해방촌 마을기록단’ 탄생으로 이어졌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건축가, 디자이너, 다큐멘터리 감독, 회사원 등 직업도 다양한 이들이 모여 해방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해방촌 마을기록단이 제작한 마을기록키트 <우리마을 탐구생활>은 상점 간판 수집, 마을 소리 수집, 장소 탁본 등을 담은 지역 예술 교재이기도 하다. 특히 ‘간판 수집’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해방촌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간 마을의 기록을 담은 ‘n개로 읽는 마을’(108계단 편, 선천군민회 편, 신흥시장 편 등), 토박이 주민들의 이야기로 엮은 「해방촌 사람책」 등의 자료집도 만들었다.
마을기록단은 해방촌 신흥시장 내에 있는 공간을 마을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이곳에서 아카이브 전시를 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마을기록학교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우리 마을 지도 그리기, 마을 연표 만들기 등 기록하는 놀이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영상기록학교를 열어 교육도 진행한다. 이러한 활동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사는 공간을 둘러보고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해방촌 마을기록단은 동네잡지 [남산골해방촌], 마을공동체라디오 <용산FM> 등과 함께 중요한 마을기록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민이 참여하는 기록
사회적기업 더페이퍼가 운영하는 [골목잡지 사이다](이하 [사이다])는 시민기록자를 양성하고 지역민과 함께 지역문화 콘텐츠를 발굴하며 지속 가능성의 기반을 만들어가고자 ‘시민기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18년에는 ‘마을기록학교’ 강의를 묶어 아카이브 가이드북 『누구나 마을 아카이브』를 발간하기도 했다. 활발한 마을기록학교 활동의 근간에는 [사이다]의 꾸준한 마을기록의 힘이 있다. [사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을과 마을 사이 등 주변의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더페이퍼의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발행비를 마련하고 지역 시민, 예술가, 역사학자 등 주변의 자발적 참여와 후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경기도 수원을 기반으로 하는 [사이다]의 가장 큰 특징은 동 하나를 정해서 그 동 이야기를 샅샅이 담아내는 데 있다. 동 마다의 역사와 문화유산 그리고 주민들의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는 작업은 지금까지 열여덟 동에 이르렀다. 마을기록에서는 주민과 관계를 형성하고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줄 적임자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사이다]의 마을기록은 골목여행을 제안하는 잡지 [Time Travels](시간여행자), 지역 아카이브 서점 ‘곧바로 책,방’, 출판학교 ‘북스튜디오 사이다’로 확장되면서 마을 아카이빙의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기록한 공간이 없어지는 일도 다반사이다. 공동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대신, 현재를 건강하게 구축하는 힘을 준다. 어느 곳에서 누구와 어떻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기록’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와 이웃을 넘어 지역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을기록, 시민기록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발견하고 주체적인 기록문화를 통해 급변하는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삶을 통찰하는 틈새를 만들어낸다. 기록이 최종적으로 책이나 전시 형태로 만들어져 시민과 지역에 공유되거나 교육이나 홍보 콘텐츠로 활용되기에, 지역기록 작업자들은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기억으로 확장하고 가치를 발굴하는 기획력과 활용의 예술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최순화
최순화
서울프린지네트워크에서 축제와 공연기획, 문화기획 활동을 시작했다. 아시아 국제교류, 지역 커뮤니티, 공공 공간 관련 문화기획을 하고 있다.
suna.cho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