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동물들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앓고 지낸다. 우리가 수많은 병에 걸리지만 일정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 ‘덕분’이다.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수명 때문이다. 문명이 고도화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체의 괴로움을 견디어야 하는 시기가 길어진다. 그만큼 병원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의료진은 환자의 치료에 최선을 다한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법 그리고 첨단 장비도 동원된다. 그런데 그 시스템은 우리의 건강을 제대로 보살펴주고 있는가.
  •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봄날의책, 2017)
  •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기획, 봄날의책, 2020)
치료와 돌봄 사이
의료사회학자이면서 심장병과 고환암을 앓았던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아픈 몸을 살다』에서 자신의 혹독한 경험을 돌아보며 투병의 본질을 탐구한다.
“의학이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학은 고장 난 부분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때로 아픈 사람 안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절망이 너무나 커서 고장 난 부분을 고쳐도 가라앉지 않기도 한다. 이런 때 질병 경험은 의학의 한계 밖에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도 의사들은 과중한 진료 스케줄 속에서 환자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경청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친절의 문제가 아니다.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의료사회학에서는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을 구별한다. 전자는 신체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측정되는 증상이고, 후자는 환자와 가족 또는 지인들이 증상을 인식하고 경험하며 그것과 더불어 살며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병원은 전자에만 주의를 기울일 뿐, 후자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한다. 치료(cure)에만 집중하면서 돌봄(care)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을 회복하는 데 무엇이 중요한가. 환자는 의사보다 간호사를 더 자주 보게 되고, 간호사보다 보호자 내지 간병인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소통한다. 어느 국면에서는 의료적 처치가 결정적이지만, 증세가 호전되기 위해서는 돌봄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의료진도 스스로 돌봄의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렇다면 돌봄의 핵심은 무엇일까. 아서 프랭크는 환자로서 고통과 절망의 터널을 통과할 때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처지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 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아픔은 삶의 일부
이러한 소망에는 질병에 대한 각별한 인식론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아픈 것을 부정적이고 예외적인 상태로 여긴다.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병에 걸리면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으면, 빠른 쾌유를 빈다고 인사를 건넨다. 건강은 삶의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건강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서 ‘건강 중심주의’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펴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픈 이들에게 왜 그렇게 음식을 조심하고 잠을 챙기는지 묻는다면, 어쩌면 답은 건강관리 담론과 똑같아 보일 수도 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혹은 “아프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아픈 사람들은 건강관리의 ‘성공 보장’을 결코 믿지 않는다.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은 아프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건강 회복’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는 것’ 자체다. 삶의 목적은 삶이다. 몸을 ‘막 쓰는’ 것만큼이나 몸을 잘 관리하는 것도, 몸을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결국 관점은 같다.”
이 책에서는 본인이 오랫동안 아팠거나 누군가를 돌보아온 4명의 필자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질병과 돌봄과 노년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논의에 흐르는 일관된 기조 가운데 하나는 아픔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즉 건강의 상실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질병을 본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사회의 책임을 은폐하는 지배 담론과 분위기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어차피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병과 씨름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아픈 것은 당연하고 건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존재 방식일 뿐이라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발견과 동행, 섬세한 소통
그렇다면 돌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간병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환자 곁에서 수발을 들면서 필요를 채워주고 회복을 돕는 기능적인 행위 말이다. 그러나 돌봄의 핵심은 그것 이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돌봄은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나와 그 사람이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아서 프랭크도 비슷한 말을 한다. 돌봄 제공자는 아픈 사람이 자기 필요를 표현할 방법을 찾도록 지원해야 하고,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려면 돌봄이 몇몇 가족(주로 여성)에게 과중한 짐으로 부과되지 않아야 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적절하게 분담되고 국가가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관점이 열려야 한다. 고통이 곧 불행은 아니다. 질병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취약함을 깨닫고 내면을 깊고 드넓게 바라볼 수 있다. 최근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와 함께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는 개념이 제시되듯, 인간은 난관을 겪으면서 영적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돌봄은 삶의 전체성으로 나아가는 그 여정에 함께 하면서 상대방의 중심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그 발견과 동행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의 섬세함이다. 심신이 남루한 지경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사랑과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언어의 탁월함이다. 예술은 환자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겪어내는 아픔이 표현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 경험을 나누면서 서로를 돌보아주고 살아있음의 위대함을 축하하는 만남이 될 수 있다.
김찬호
김찬호
사회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교육학 등을 강의하고 있고, 대학 바깥에서 부모 교육, 노년의 삶, 교사의 정체성, 마을 만들기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글을 쓰고 대중 강연을 하고 있다. 저서로 『사회를 보는 논리』 『문화의 발견』 『교육의 상상력』 『생애의 발견』 『돈의 인문학』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2014년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눌변』 『유머니즘 : 웃음과 공감의 마음사회학』 등이 있다.
chan-ho7@daum.net
이미지 제공 _ 봄날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