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디오스타> 속 한물간 가수 ‘최곤’은 강원도 영월 지역 라디오 디제이(DJ)가 된다. 그저 그런 방송이 될 뻔했지만, 우연히 출연한 동네 다방에서 일하는 ‘김양’의 감동적인 사연에 주민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한다. 이후 여러 주민의 이야기가 송출되면서 방송의 인기는 날로 높아진다. 영화에서 그린 것처럼 지역 라디오 방송에는 우리 이웃과 동네 이야기만이 가진 낭만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출연은 물론,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는 동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역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살펴본다.

세대도 언어도 장애도 넘어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관악, 마포, 분당, 공주, 성서, 영주, 광주 등 7개 지역에 ‘공동체 라디오’가 있다. 공동체 라디오는 FM 주파수 대역에서 10와트 이하의 소출력으로 소규모 지역(시‧군‧구 일부)에 음악, 문화, 지역 정보 등을 제공하는 비영리 라디오 방송이다. 2004년 시범 방송 뒤 현재까지 각 지역사회 소통과 발전에 기여해왔다. 대구에서 라디오 주파수를 FM 89.1MHz에 맞추면 ‘성서공동체FM’을 들을 수 있다. 올해로 개국 15주년을 맞은 성서공동체FM은 우리나라 공동체 라디오 역사상 첫 개국을 한 곳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특별한 점은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는 것이다.
소규모 공장이 밀집돼 있고 결혼 이주 여성이 많은 성서지구 특성에 맞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일별로 밤 9시부터 2시간 동안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의 이주 노동자들이 자국어로 이야기하는 <이주 노동자 방송>이 편성되어있다. 또 발달장애인 자립을 위한 사회적협동조합 ‘행복림’이 운영하는 <오늘은 해피데이>, 누구나 DJ가 될 수 있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우리는 마을에 산다>, 청년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어보는 <4.5춘기이야기> 등 그 누구의 소외도 없도록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외에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내 사회적 가치를 지켜가고 있다.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방송되는 <하나뿐인 지구에 대한 예의>는 대구 지역의 본격 친환경 방송이다. 환경문제를 깊이 있고 재밌게 전달하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친환경 꿀팁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솔라디오!>에서는 지역을 위해 힘쓰는 청년 활동가들을 소개하고 함께 고민을 나눈다. 청년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업·단체, 공간 등을 소개하며 자연스레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토의하는 장을 마련한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
공동체라디오 마포FM은 공동육아, 공동교육으로 널리 알려진 성미산마을에서 시작됐다. 2003년 배수지 공사로 지역개발 이슈가 떠오르자 지역민의 목소리를 직접 낼 필요성을 느낀 주민들이 2005년 마포FM을 설립했다.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시작한 마포FM는 ‘기존 방송이 담아내지 못하는 시민의 목소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그대로 살린 방송을 진행한다. 오전 8시에 방송되는 <행복한 하루>에서는 실버 세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겨있다. 마포구에 거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대본을 쓰고 출연해 취미, 음악, 건강 등 자신들의 관심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목요일 자정에는 국내 최초 퀴어(Queer) 맞춤 프로그램 이 방송된다. 이외에도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혼자 사는 법>과 홍대 뮤지션들이 직접 운영하는 <뮤직홍> 등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편성되어있다.
마포FM은 라디오 방송에 그치지 않고 각종 지역 축제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지역의 문화예술을 활성화하고자 노력한다. 마포 주민들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마포마을합창축제’를 주최하고, ‘서울불꽃축제’ ‘사회적경제축제’ 등 여러 지역 축제에 참여했다. 또 라디오 PD 지망생들을 위한 교육 강좌를 열기도 한다. 최근에는 미디어 취향공동체 ‘살롱 드 헤르츠’(Salon De Hertz)를 기획해 음악, 웹툰, 영화 등 대중문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문화살롱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뉴스부터 예능까지, 주민의 시선으로
꼭 주파수가 있어야만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직접 운영하면서 방송의 지평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방송국과 상근 직원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방송을 꾸릴 수 있게 된 요즘, 마을 방송에서는 자신들만의 문법으로 동네 이야기를 전한다. 뉴스부터 다큐멘터리, 예능을 아우르는 성북마을방송 ‘와보숑’은 ‘모든 주민이 앵커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모든 주민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방송을 추구한다. 2012년 서울시에서 진행한 ‘우리 마을미디어 문화교실’ 수료생들이 2013년 ‘와보숑TV’를 개국하고 2년 뒤에는 미디어협동조합과 ‘라디오 와보숑FM’까지 개국했다. 와보숑의 특장점이라면 역시 다양성과 꾸준함이다. 현재까지 수백 편의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4개의 팟캐스트를 통해 라디오 프로그램도 하고 있다. 각각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구성원들 역시 다채롭다. 70대 노령의 촬영감독부터 10살 꼬마 앵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북구의 주민이라면 이 방송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성북마을뉴스>는 마을과 관련한 소식을 주 1회 보도한다. 이외에도 마을의 가장 핫한 현안을 주민이 직접 취재하고 토론하는 시사 프로그램 <마을은 지금>부터 자취생의 예능 먹방 <고독한 혼식가>, 마을 곳곳 명소를 둘러보는 교양 프로그램 <우리 마을 감성산책>까지 공중파 방송국 못지않은 구성이다. 뉴스, 예능,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 담긴 콘텐츠에서는 주민의 시선에서 바라본 생생한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소소한 이야기도 이슈가 되어
‘군산 동네방네 팟캐스트’는 전라북도 군산시 내 나운2동, 그 안에서도 주공4차 아파트 주민의 자조 모임에서 출발했다. 주민 8명이 전주시민미디어센터 공동체미디어팀에서 팟캐스트 제작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진 모임이 방송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진 것이다. 모임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작은 단위에서 시작한 모임답게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 과도한 음주, 층간 소음까지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며 동네 주민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군산 동네방네 팟캐스트는 방송이란 매체를 통해 자연스레 동네 문제를 다루면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형성하고 더 나은 주거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일조한다.
방송이 4년 차를 넘어가며 다루는 주제의 폭도 넓어졌다. 군산사랑상품권, 동네문화카페에서부터 전주국제영화제에 이르기까지,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한 소소한 이야기부터 지역의 굵직한 이슈까지 다루며 공동체 의식을 쌓아간다. 2019년에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감상을 나누거나, 20대 청년들과 함께 세대공감 토크를 진행하는 등 지역 이슈뿐 아니라 동네 주민 간 생각과 의견을 교류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방송이 현실적으로 이웃 간 소통 공간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클릭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의 소식까지 들을 수 있는 요즘. 오히려 바로 내 옆집의 이웃과 우리 동네의 변화에는 무감할 때가 많다. 지금 내 주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놀랍게도 가장 특별한 이야기가 그곳에 숨겨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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