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를 통해 입속의 노래를 내뱉던 뮤지션 권병준이 이제는 마이크의 지향을 밖으로 돌려 세상의 소리를 담아내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약 중이다. 권병준의 사운드는 우리 사회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속도에 매몰된 기계문명의 허를 찔러왔다. 인간을 사색과 휴식으로 이끌며 서로 공명하는 기술을 발굴해온 것이다. 온갖 새로운 악기들이 태어나 숨 쉬고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예술의 기술적 구현을 함께 궁리했다.
작업마다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개척해왔다. 예술적 영감을 기술로 구현하다 보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힐 때도 있겠지만, 기술 덕택에 예술적 영감이 애초 예측을 넘어 확장되었던 경우도 만날 듯하다.
웬만한 악기는 회로 디자인부터 직접 제작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엔지니어를 겸하고 있다. 기술과 예술에 쓰이는 뇌의 영역이 각각 다르긴 하다. 하지만 음악 하는 마음이 기계 안에 자연스레 스밀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음악과 기술이 따로 분리되지 되지 않는 ‘음악적 기술’을 추구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스타임(STEIM, Studio for Electro-Instrumental Music)에서 한동안 실험적인 전자음악에 몰두했었다. 이를테면 뉴욕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 작곡가 톰 존슨(Tom Johnson)과 함께 작업하며 ‘저글링 사운드 볼’(Juggling Sound Balls)을 제작했는데 내 역할은 작곡가가 원하는 바를 창의적인 기술로 구현해주는 데 있었다. 공을 던질 때 나는 소리를 전기적으로 혹은 무선으로 제어하면 특별한 입체음향이 공명한다. 저글러들이 이 사운드에 무아지경을 느끼더라. 악기 제작자로서 연주자의 몰입을 마주하는 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대학원 시절에는 촉각과 시각, 청각이 동시에 어우러진 디바이스를 연구하기 위해 ‘특별한 펜’을 제작하기도 했다. 글씨를 쓰다 보면 가로획이냐 세로획이냐에 따라 각기 소리가 다르지 않나. 동그라미를 그릴 때 나는 소리는 세모, 네모와 또 다르다. 만년필 촉의 특수한 장치로 글씨 쓰는 소리를 진동으로 전환하면 그 에너지가 다시 LED 빛으로 발하는 펜 퍼포먼스-소닉 칼리그라피(Sonic calligraphy)를 시도했었다.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에선 위치 인식 헤드폰을 이용해 관객에게 공간을 재해석할 수 있는 소리의 길을 틔워주었다. 여러 사운드를 공간에 배치한 기준은 무엇이었나.
아르코미술관에서 있었던 ‘SFX 서울’의 사운드 그룹전 《혁명은 TV로 방송되지 않는다》(2017)의 일환이었는데, 10여 명의 작가가 뻥 뚫린 공간에서 작업하다 보니 서로의 소리가 혼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장치가 ‘위치 인식 헤드폰’이다. 관객의 동선에 따라 그 위치에 맞는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도록 LPS(Local Positioning System)를 장착한 특별한 헤드폰을 개발했다. 헤드폰을 쓴 관객은 어느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지에 따라 20여 개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때 외부의 붙박인 사운드와 헤드폰 안에서 나는 소리는 때론 교감하거나 충돌하면서 입체적 음향층을 형성한다. 이처럼 공간과 음향의 조화를 나름의 기준으로 맵핑해 소리를 배치했다.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직된 태도를 각성시켜 준 예멘 난민과의 작업도 인상적이었다.
제주도에서 채록한 예멘 난민들의 소리를 작업한 <오묘한 진리의 숲> 두 번째 시리즈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관객은 시작점에서 천둥소리부터 듣는다. 난민들이 경험했던 처참한 전쟁을 떠올리기 위해서다. 미술관 앞에 위치한 묵직한 바위 의자는 난파된 배를 연상시켰는데 의자마다 하나씩 중요한 소리를 입혔다. 난민들과 인터뷰할 때 사람 머리 모형에 귓속에 마이크가 장착된 ‘바이노럴 레코딩’(Binaural recording)을 활용했다. 모양이 신기해서인지 아이들이 즐거워했는데, 정작 그 아버지는 인터뷰에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러니를 마주하기도 했다. 난민들의 절박한 노래로 한국 사회 특유의 경직성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매몰된 소수자 혐오의 문제를 소리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도 싶었다. 예멘은 아랍국가 중에서도 음악성이 뛰어난 민족으로 인정받는데, 나 역시 명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 <오묘한 진리의 숲 4(다문화가정의 자장가)>(2019)
  • 녹음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2019) 새홍성 교회 (사진 김선희)
《클럽 골든플라워-춤추는 로봇》처럼 속도와 효율,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기계문명에 허를 찔러 비틀기도 했다. 기술에 대한 예술의 삐딱한 저항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사람들은 흔히 로봇이라고 하면 인간을 도와 생산성을 높이는 산업용을 떠올리지만, 나는 효용성 없이 한량 같은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 어떤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그다음을 내다보는 연결고리를 얻게 되곤 한다. ‘춤추는 로봇’은 그 직전 작업했던 ‘예멘 난민의 노래’와 연결된다. 소수자들을 만나다 보니 아예 극대화된 이방인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지더라. 로봇과 예멘 난민은 이방인, 소수자라는 접점을 갖고 있다.
작은 로봇은 왼손잡이, 큰 로봇은 오른손잡이, 모두 외팔 로봇이었다. 전시 중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던 그들의 동작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나.
관객에게 로봇은 낯선 존재다. 이 외팔 기계들이 손을 내밀 때 누군가는 무서워서 피하고, 누군가는 구걸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흔쾌히 손을 맞잡는다. 관객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이방인에 대한 이미지가 로봇 동작에 대한 각자의 반응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로봇은 크기를 달리해서 2개의 그룹을 이루는데, 머리에 붙어있는 조명으로 서로를 비추면서 그림자놀이를 하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렇게 로봇의 인형극으로 그간 소리 작업으로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를 좀 더 강력하게 던져보고 싶었다.
《자명리 공명마을》은 제목부터 독특하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자명(自鳴), 공명(共鳴), 공감(共感).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종종 워크숍과 강연을 진행한다. 그만큼 나의 주요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자기 안에 내재된 울림을 찾는 ‘자명’은 음악가로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자명하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너무나 많다. 스스로의 울림을 등한시한 서양식 예술교육이 기계적인 연주를 양산하는 탓이다. 자신의 울림을 타인과 ‘공명’하는 것은 음악이 가진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배음이나 진동수 등 소리와 관련된 과학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적으로 확장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지점과 연결되기도 한다. 한편, 점점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공감’이야말로 절실한 미덕이다. 코로나19로 고립된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온라인 접속이 소통의 대부분을 압도하는데 온라인의 익명성은 자칫 잘못하면 N번방이나 악플 같은 부작용으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자명리 공명마을》에서도 특수한 헤드폰을 제작했는데, 이번에는 교감의 장치로 활용했다.
《자명리 공명마을》을 위해 제작한 헤드폰은 상대방과 소리를 주고받는 기능이 있다. 헤드폰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상대방이 듣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내가 듣는 소리와 섞이게 된다. 상대방과 인사를 나누면 내가 듣던 소리가 다른 사람이 듣던 소리로 서로 교환이 된다. 이처럼 헤드폰을 통해 스스로의 울림을 자명하게 듣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찾아 공명하고, 소리를 맞바꾸며 서로 공감하는 과정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 <클럽 골든플라워>(2018)
  • 《자명리 공명마을》(2019)
테크놀로지가 자연과 인간을 압도할까 두렵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테크놀로지’를 구현하려면 어떤 성찰을 잊지 않아야 할까.
아무리 기계가 인간을 위협한다 해도 예술이 기계로부터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서로 다른 감각이 어우러지는 공감각, 즉 여러 감각의 총체적 인지 같은, 기계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이 있지 않나. 어떤 음악을 듣는다고 할 때, 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눈으로 보았던 것, 맡았던 냄새, 느꼈던 감정 등 모든 감각이 그 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각각의 감각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가의 의도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 인지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마치 생명체처럼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는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는 기술의 폐해는 거대 자본에 종속되었을 때 더욱 심각해진다.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기술은 무한대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에 종속된 기술이 있는가 하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기술도 있다. 정보를 거대 자본이 독점하지 않도록, 인간을 소외시키기보다는 공생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런 ‘저항적 기술’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기술의 민주화가 아닐까. 그래서 교육이나 워크숍에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미 과학계에서는 카피레프트(copyleft)나 오픈소스(Open Source) 운동을 통해 기술의 노하우를 적극 공개해왔다. 그에 비하면 예술계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보수적이고 인색한 편이다. 예술가들도 자신의 역량을 열린 마음으로 공유해야 한다.
다음 작업에 반영될 예술의 기술적 구현, 혹은 기술의 예술적 구현이 궁금하다.
부산시립미술관 내에 어린이를 위한 사운드 전시에 설치될 새로운 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알루미늄 파이프로 만든 일종의 ‘풍경’이다. 파이프를 두드리거나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특정 위치에 서면 그 위치에 해당하는 풍경이 울리는 방식이다. 여러 명의 아이가 위치를 바꿔가며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접촉을 회피하는 코로나의 시기와 궤를 같이하는 기술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대상은 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올해 10월에 열릴 국립현대무용단 10주년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춤추는 로봇’이 다시 출동해 세 명의 안무가들과 협업을 도모할 예정이다. 원일 감독이 이끄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는 미디어 작업을 통해 전염병 시대의 미래 극장을 예견하려 한다. 팬데믹의 위기에서 무대를 잃은 예술가들이 너무나 많다. 이 막막한 상황이 던지는 질문들이 절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 중이다. 개념을 갖춘 예술적인 기술로 기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권병준
권병준

1990년대 초반 싱어송라이터로 6개의 앨범을 발표했고, 영화 사운드트랙, 패션쇼, 무용, 연극, 국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음악 작업을 해왔다. 2005년부터 네덜란드에서 소리학(Sonology)과 예술&과학(Art&Science)을 공부한 후 공연과 사운드 등에 관한 실험적 장치를 연구·개발하는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2011년 귀국 후 새로운 악기와 무대장치를 개발·활용하여 음악, 연극, 미술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연출했고, 소리와 관련한 하드웨어 연구자이자 사운드를 근간으로 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터랙션 사운드랩의 펠로우를 거쳐,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예술공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사진 _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작품 사진 제공 _ 권병준 작가
조은아
조은아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피아니스트. “음악적 깊이와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보기 드문 연주자”란 평을 들으며 연주뿐만 아니라 음악 관련 다양한 대중활동을 펼쳐왔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음악 분야 첫 강연을 진행했고, 주요 일간지(한국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에 꾸준히 칼럼을 기고했다. KBS 클래식FM 방학특집, 서울시향 토크 콘서트, KBS 교향악단 실내악 시리즈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진행하며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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