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류가 사라진 미래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지구의 유일한 생존자가 보낸 구조 신호! 이상기후, 환경오염, 질병 등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없게 된 미래의 지구를 구해달라는 절박한 구조요청이 모스 신호로 끊어질 듯 이어지고, 메시지를 받은 아이들이 ‘벙커 465-16’에 모여 지구의 미래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과연 아이들은 미래 지구를 아름답게 지켜낼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와 인간이 그 미래를 구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담은 무수한 영화들처럼, ‘만약에 우리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지난해 토탈미술관이 개발·운영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드림아트랩4.0 프로그램 ‘벙커 465-16’의 가상 시나리오이다. ‘465-16’은 토탈미술관의 주소로, 미술관을 위험에 빠진 지구의 유일한 생존 지역인 벙커로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격리된 벙커에서의 삶이라니! 공교롭게도 온 세계가 코로나19로 격리와 고립을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술이 아닌, 질문으로 시작하기
“미래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지능, 증강현실, 스마트농법, 사운드기술 등을 활용하여 예술적 아이디어를 탐색해보는 프로그램” ‘벙커 465-16’은 몇 가지 복합적인 지향점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기반 사회에서 기술과 예술의 관계와 융복합에 대한 질문을 프로그램에 녹여내는 것이다. ‘벙커 465-16’이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기술과 매체 탐구를 통해 융복합 예술 창작 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드림아트랩4.0 사업 중의 하나였던 만큼 기술과 예술을 어떻게 해석하고 프로그램에 녹여낼 것인가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토탈미술관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기술을 가르치는 워크숍은 많으니, 그런 것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에서 시작했다는 기획자 신보슬 큐레이터는, 융복합 문화예술교육에서 기술 자체를 가르치는 것보다 질문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 기술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 기술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어디까지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 개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숙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벙커에 도착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한 툴박스를 전달받으며 벙커의 삶을 시작한다. 인공지능 친구를 만나고, 미래 친구인 챗봇을 만들고, 생존을 위한 식물을 기르며, 여러 도구로 악기를 만든다. 처음 겪는 환경과 조건에서 아이들은 다른 삶의 방법을 탐색하고, 실험하고, 논다. 벙커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일련의 프로그램 과정에서 기술은 기술 자체로 권위를 부여받지 않는다. 악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일상에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 듯,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 역시 이해와 실천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그렇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기술사회와 변화하는 우리의 감각과 신체, 삶을 예측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예술의 역사가 늘 그랬듯, 그 상상과 성찰의 지점에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이 위치하고 있다.
  • 《벙커 465-16》전시
  • 전시장에 나타난 아르르
예술과 기술로 경계 없이 교류하기
‘벙커 465-16’ 프로그램의 또 다른 지향점은 다양한 경로에서의 소통과 협업이다. 나와 연결되는 모든 친구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기획 의도가 담겨있다. 벙커 안에서의 교류는 인간 친구끼리의 교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기계와 친구가 되고, 때로는 기계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은 식물과도, 빛과도, 사물과도, 가상의 존재와도 소통한다. 예를 들면 인공 빛 공급장치에 모스부호 신호기를 달아, 태양이 사라진 벙커에서 인공 빛으로 자라는 식물의 기분을 읽는다. 여기서 센서가 되는 신호 기계는 식물과 빛의 언어를 인간의 기호로 환원하는 매개체가 된다. 영상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우주인 친구 아르르와 부르르는 위기에 빠진 미래와 내가 사는 공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상상을 일깨운다. 아이들은 가상의 친구와 협력하여 지구 구조의 프로젝트를 실현해 간다.

이렇게 경계 없이 이루어지는 교류에서 우리는 새삼 소통 도구로서의 테크놀로지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다양한 기술과 미디어는 어떤 존재와의 소통도 가능하게 하고, 존재에 대한 차별 없이 교류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삶을 실험할 수 있게 한다. 교류의 확장을 통해 답답했던 벙커는 실감의 공간을 넘고, 위험사회에서 서로를 돌보는 보살핌의 공간이 된다. 미래 지구에 아름다운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벙커 465-16’은 모든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이해, 협력의 중요성을 묻는다.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기술교육
무엇보다 ‘벙커 465-16’ 프로그램이 다른 기술 융복합 예술교육 프로그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 과정에서 기술자가 등장하지 않는, 예술가들의 협업이라는 점이다. 미디어 작가가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기반 프로그램을 만들고, 동화 작가가 이야기 구조를 짜고, 시각디자이너가 캐릭터를 만들고, 영상전문가가 영상을, 사진작가가 촬영을 맡아 협업한다. 이때 각 분야의 예술가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전문분야의 기술을 충분히 숙고하고 체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앞서 사용하며 실험하고, 우리 삶과 감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파고드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는 숱한 시행착오를 통과한 기술 매체와 그에 대한 고민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기획자가 선택한,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 개발 방법은 기술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하는 ‘통역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이해로부터 온다. 많은 시도들이 과학기술자와 문화예술가의 언어가 너무 달라서 그 다름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도 결국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거나, 기술과 예술을 따로따로 적용하고야 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예술의 대화는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신보슬 큐레이터는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은 기술을 완벽하게 이해한 커뮤니케이션 역량 위에 올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가들의 협업이라고 해서 단숨에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많은 시간을 공들이며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프로그램으로 수렴하고자 논의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 참여하여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은 예술가에게도 단순히 개발만이 아닌 새로움을 만드는 창조의 즐거운 과정이다. 예술가가 가진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개발 과정은 이들과 오랜 협업을 통해 소통의 노하우를 축적해 온 미술관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다.
식물 친구와 교감하기
신나고 예측불가능한, 아찔한 자유
‘벙커 465-16’은 가상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프로젝트형 협업 프로그램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따라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미래 기술-사람-환경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을 자극하면서 스스로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또한 전시 공간 안에 바위가 들어와 있고, 들고 나는 입구며 계단이 다변화되어 있는 미술관 공간 역시 아이들이 달라진 환경을 실제처럼 인식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게 갖춰진 구도 속에서 나머지 부분은 아이들이 예술가, 매개자들과 협력하여 스스로 구상하고 찾아간다. 아이들에게 많은 선택과 주도권을 주는 과정 중심의 프로젝트형 교육 방법에 대한 고민은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징이자 기술 융복합 문화예술교육의 방향과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9년의 프로그램 또한 아이들 스스로 만들고 공유회까지 직접 운영하였지만, 여전히 충분히 경험하고 창작할 시간적 제약이 아쉬웠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이야기에는 좀 더 탐험이 강조되고, 비구조화된 교육방법에 대한 실험이 확대된다. 2020년 시즌2 프로그램명은 ‘벙커 465-16: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다. SF 영화나 만화, 중세 연금술사의 이야기에 숱하게 등장하는 현자의 돌을 접목함으로써 이야기에 판타지가 강화되었다. 벙커 속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생존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누군가 살아 있다는 구조의 메시지가 도달하고, 응급키트와 배를 만들어 그들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다.
올해 기획의 특징은 모두가 똑같은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마다 고민과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구출 방법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공구와 도구가 쌓여있는 팬트리에서 직접 자신들이 필요한 도구를 찾아 키트를 구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특히 올해는 토론과 설득, 의사결정의 과정을 많이 배치했다. 그러기 위해 이야기나 기술 사용과 관련된 콘텐츠는 영상으로 사전 제작하여 태블릿에 담아 제공하고, GPS 기술을 기반으로 아이들의 탐색과 선택에 따라 경로가 달라질 수 있도록 확장하였다. 이러한 교육 구조는 교육 전달자인 매개자가 없어도, 같은 장소에 모이지 않아도 워크숍 진행을 가능하게 하므로 시공간 제약을 넘어 확산의 가능성을 높인다. 프로그램에 도입되는 기술 역시 3D 프린터로 집약했다. 팀별로 정한 모듈에 따라 제작된 부분을 맞춰 하나의 배가 제작되는 방식이다. 3D 프린터에는 대량 생산이라는 규모의 경제가 힘을 잃은 경제 구조의 변화도 담았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교수자 입장에선 양가적 의미에서 아찔한 것일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주체가 되고 아이들의 감각과 해석이 담기는 아이들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아찔하게 신난다. 동시에, 어떤 선택과 필요가 요구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아찔하게 위태롭다. 하지만 분명, 그 아찔함이 아이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아갈 자유와 기술 실험에서 실패할 자유를 부여할 장치이기도 하다. 결국 스스로 발견한 길에 설 수 있는 자유 말이다.
  • 미래 친구와 대화하기
  • 소리 친구와 연주하기
미술관과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기
토탈미술관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고 싶은 중요한 가능성 한 가지는 어린이 관객과의 관계 맺음이다. 어려운 미디어 예술을 주로 전시해 온 미술관과 어린이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은 미술관에 대해 배웠고, 미술관은 아이들에 대해 배웠다. 단순히 관객의 발견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작품과 미술관을 대하는 방법을 통해 작품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미술관이 관객과 작품을 통해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실험하고 배워가야 한다는 발견이다.
비평가와 해설자의 설명으로 예술작품을 읽는 것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작품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의 소통 방법은 우리의 예술역량을 키운다. 신보슬 큐레이터는 예측불가능한 미래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겐 예술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을 숙고하기 위해 예술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은 미래를 상상하고, 창의성과 균형감각, 예술적 실천을 더해줄 실험의 공간이다. 더불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다시 미술관을 성장하게 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 만남의 작은 씨앗들이 여러 색의 꽃으로, 열매로 피어 우리 삶에서의 행복을 끝내 지켜내는 힘이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프로그램 사진 제공 _ 토탈미술관, 벙커 465-16

영상 & 인터뷰 사진_박영균 영상작가 infebruary14@naver.com
현혜연
현혜연
문화예술교육 기획자. 사람에 관심이 많아 사회복지, 사진예술, 인류학을 공부하였다. 1997년 어린이 사진캠프로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모험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중부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사진영상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예술교육원장을 맡아 문화예술교육 및 인력양성에 힘쓰고 있다.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는 꿈다락토요문화학교, 예술치유프로그램, 신중년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개발을 비롯한 문화예술교육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실천과 공부를 하고 있다.
hyhy1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