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바람은 문화예술교육에도 예외 없이 불어 닥쳤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는 ‘융합’과 ‘확장’을 키워드로 예술 장르 간 통합, 인문학과의 통합뿐만 아니라, 최신 과학기술과의 융합까지 고려의 범위를 확장하게 되었다. ‘제주창의예술교육발전소’는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창의예술교육랩 지원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조직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주제에 따라 과학기술랩, 생태랩, 인문랩, R&D랩을 구성하고 약 8개월에 걸쳐 과학기술과 융복합된 창의적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실행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제주창의예술교육발전소’는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제까지 그려왔던 문화예술교육의 궤적을 벗어나서 문화예술교육의 고도화를 꾀하는 전환점을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에 과학기술과의 융복합이 자리를 잡았다. 두 번째로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1990년대 후반에 주도한 데세코(DeSeCo, Definition and Selection of Competencies, 생애핵심역량) 프로젝트에서 출발하여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s)’와 연동되어 작동하고 있는 ‘OECD 교육 2030’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교육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매김한 ‘역량’을 문화예술교육에도 적용하기 위한 담론을 만들고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 내고자 시도하였다. 세 번째로는 제주지역에 특화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젊고 새로운 문화예술 전문인력인 ‘청년연구원’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시험하였다.
바람을 변주하는 데이터 감수성
과학기술랩 ‘바람이 {데이터}로 분다’
과학기술랩은 데이터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는 세상에 관심을 두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람과 사람 간에 이루어지던 소통의 지평이 사람과 기계가 소통하고 사람과 사물이 소통하는 것에까지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소통의 언어는 ‘데이터’라고 규정하였다. 과학기술랩이 개발한 ‘바람이 {데이터}로 분다’는 삼다도(三多島)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적 표상임과 동시에 자연생태인 ‘바람’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감각기관을 통해 인간 내면으로 인입된 바람의 감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일련의 과정을 바람이 데이터화되는 과정으로 간주한 것이다.
‘데이터 리터러시’를 표방하는 ‘바람이 {데이터}로 분다’는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와 지각을 재인식하고, 과학기술환경의 핵심요소이자 인간과 과학기술을 매개하는 소통의 언어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자극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은 촉감으로 알 수 있으며, 비눗방울의 날갯짓과 펄럭이는 천의 율동을 통해 비로소 시각화된다. 바람은 감각을 일깨우고 감각은 바람을 인식과 지각의 세계로 안내한다. 주관의 세계로 들어온 바람은 인식의 주체인 개인에 따라 상이한 세기와 온도, 색깔과 냄새로 해석된다. 개인이 가진 데이터 감수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이제 과학기술랩에서 의도한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이 융복합되는 시점이다.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진 바람은 각자의 예술적 감성을 매개로 다시 형상화되고, 그림으로 표현된 바람은 마이크로비트의 회로를 거쳐 색과 속도 파장의 데이터로 변환되는 절차를 거친다. 애초 촉감과 시각으로 만났던 바람이 데이터로 변환되었다. 데이터로 모습을 바꾼 바람은 마이크로비트에 연결된 LED를 빛나게 하는데 사람마다 감각되고 해석된 바람이 다르기에 LED 불빛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을 보인다. 사람에 따라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각자 자신이 느낀 바람을 표현하고 데이터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객관으로 존재했던 바람이 각기 다르게 변주되고 개성 있는 데이터 감수성이 표현된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는 더이상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닌 자연과 내가 소통하고 나와 디지털을 연결하는 새로운 언어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과학기술랩 ‘바람이 {데이터}로 분다’
(왼쪽) 각자 인식한 바람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 바람이 데이터로 변환되는 순간
빛과 광합성, 생명의 공존에 동참하기
생태랩 ‘생태로운 예술생활’
생태랩은 제주를 대표하는 자연생태를 주제로 삼고, 그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연생태와 유기적으로 공존함을 인식하는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인 ‘생태로운 예술생활’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자연생태와의 공존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과 자신을 연결하고 나와 우리를 연결하여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는 ‘경이로운 감수성’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경이로운 감수성’을 통해 자연생태와의 교감이 싹트며, 사람과 사람 간에 공감의 열매가 열린다.
생태랩은 ‘빛과 광합성’을 단초로 삼았다. 빛은 모든 생명 존재의 원천이며 광합성은 식물과 동물을 아우르는 모든 생태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에너지 생산과정이다. 빛과 광합성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 기술을 익히고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이해하고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공존에 동참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생태로운 예술생활’은 4단계로 구성되는데, ‘자연탐구-감각열기–기질발견–감성탐구’가 그것이다. 일련의 과정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정서와 태도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연탐구’는 프로그램의 핵심 키워드인 자연생태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제주의 자연생태와 마주하며 그들의 생존법칙을 살피고 그들과의 공존의 의미를 인식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감각열기’는 보다 적극적인 자연탐구의 시간이다. 자연생태의 품 안에서 빛과 소리 등을 활용한 예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는 시간이다. ‘기질발견’에서는 각자 타고 난 자신만의 특징을 알아보고 상호 이해하는 시간이다. 함께 어울리고 몸짓과 질문을 나누면서 자연생태와 교감을 이루며 경이로운 감수성을 깨우는 과정이다. 생태랩에서 과학기술과의 융합점은 마지막 단계인 ‘감성탐구’에서 발현된다. 앞서 과학기술랩과 마찬가지로 ‘데이터 감수성’을 키워드로 삼아 마이크로비트를 이용하여 생명 존재의 원천인 빛을 수용하고 데이터로 변환한다. 데이터로 변환된 자연의 빛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될 준비를 마쳤다. 참가자들은 소리로 혹은 미디어아트로 발현되는 빛을 통해 새롭고 경이로운 감수성을 체감한다.
생태랩 ‘생태로운 예술생활’
(왼쪽) 마이크로비트를 이용하여 빛을 ‘채집’한다. (오른쪽) 빛 데이터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나를 성찰하고 또래로 확장되는 관계 맺기
인문랩 ‘트멍아이 노는아이’
인문랩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문적 이슈, 즉 일상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했다. 인문랩 프로그램 ‘트멍아이 노는아이’는 제주지역의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아이들, 막바지 어린이 시절과 청소년기 시작에 걸친 애매한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문랩은 이 아이들을 ‘트멍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트멍’은 ‘틈’ ‘사이’를 의미하는 제주말이다.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나인 ‘너’를 인식함으로써 ‘점’으로 존재하던 ‘나’와 ‘너’는 ‘선’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면’으로써 ‘우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선과 면의 관계를 형성한 우리가 함께 어울릴 ‘공간’을 만들게 되며, 이 공간은 아이들이 자신의 ‘놀 권리’를 펼칠 수 있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된다. 내 삶의 모습을 성찰하여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고 또래들과 협력적인 관계맺기를 통해 공감과 소통 그리고 협력의 즐거움을 일깨워 자신의 존재가치를 되새기는 것에 프로그램의 목적이 자리 잡고 있다.
‘트멍아이 노는아이’에서는 수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교육 도구로 많이 활용되는 ‘칼레이도 사이클(Kaleido cycle)’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트멍아이 사이클’을 만들어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다른 친구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24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된 트멍아이 사이클은 아이들이 보내는 24시간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각각의 면에 이름과 별명, 하루 24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지 또 어디를 즐겨 가는지 등을 적어나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트멍아이 사이클에는 점・선・면을 토대로 진행되는 ‘트멍아이 노는아이’의 기본 철학이 스며들어 있으며, 기본 도형인 삼각형은 이후 아이들이 스스로 설계하고 만들어 보는 아지트 ‘노는아이 공간팡’을 구성하는 기본 도형으로 활용되었다.
‘트멍아이 노는아이’에서 과학기술과의 융복합은 가상현실(VR) 콘텐츠로 구현되었다. 세상의 2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주제로 제작한 VR 영상과 VR 헤드셋, 컨트롤러를 사용하여 지도 위를 탐색하고 공간을 살피는 콘텐츠가 새롭게 개발되었다. 인문랩 프로그램의 대미는 골판지를 삼각형 형태로 만든 재료 ‘팡지’를 이용하여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아지트를 설계하고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지시나 감독 없이 온전히 친구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공간을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바람직한 또래 관계를 맺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인문랩 ‘트멍아이 노는아이’
(왼쪽) 세상의 24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오른쪽) 함께 만드는 우리의 아지트 ‘노는아이 공간팡’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교육 : 화학적 결합 위한 첫걸음
제주창의예술교육발전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른바 ‘제주 문화예술교육의 고도화’를 이루는 도약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제주지역 문화자원과 연계하고 과학기술과 융복합된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한다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이제는 너무 흔한 말이 되어 버린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변화에 발맞추어 문화예술교육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만, 이것이 문화예술교육이 개발되고 실행되는 현장에서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고민과 노력, 때에 따라서는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이제 문화예술교육은 사람들의 창의성을 길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 있고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다주고,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을 꿋꿋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거기에 과학기술과 융복합도 해야 한다.
2019년, 봄부터 겨울까지 꼬박 8개월을 제주지역 문화예술 전문가와 다양한 배경의 청년연구원들이 모여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의 구체적인 상을 만들기 위해 이마를 맞대었다. 이렇게 탄생한 3개 프로그램이 고도화된 문화예술교육에 담겨 있기를 바라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만족스럽게 담아내는 데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우리가 규정해왔던 문화예술교육의 범위가 좀 더 확장되었고, 고도화된 문화예술 ‘교육’을 만들고 실행하기 위해서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 다시 한번 고려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과학기술과의 물리적 동거가 아닌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내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과학적으로 문화예술을 바라보고, 문화예술적으로 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현장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음에 기대를 걸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2020년에도 제주창의예술교육발전소의 발전기는 힘차게 돌아갈 예정이다.
사진 _ 필자 제공
박동필
박동필
교육학 박사. HRD(인적자원개발)와 기획 분야 전문 컨설턴트가 공식적인 직업이다. 10여 년 전 제주 이주 후 문화예술과 교육학적 관심을 접목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dongpillpar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