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8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일본 요코하마 공연예술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공연예술 관계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아무도 지금의 상황이 도래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모두 앞으로 한 십 년쯤은 바쁘게 지낼 만큼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계획을 세우며, 10월에는 서울아트마켓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탈리아의 기획자와는 당장 한국의 섬과 이탈리아 북서부의 카프라이아(Capraia) 섬을 잇는 예술가 레지던시를 만들어 보자는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나는 남도의 섬 방문 하루 전 기차표를 취소해야 했고, 이탈리아 친구는 가족 모두의 안전을 위해 카프라이아 섬으로 들어가 자가 격리를 시작했다. 5월 캄보디아, 6월 홍콩, 9월 스페인, 11월 뉴질랜드와 이탈리아의 동료들과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모두 취소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연기와 취소 사이에 놓여있는 일들을 붙잡고 대안과 리스크를 정리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이동성의 위기 속에서 4월부터 2주에 한 번씩 아시아 프로듀서 플랫폼(APP)의 동료들과 코로나19 팬데믹 속 각국의 상황과 예술 현장 이야기를 온라인 회의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이 독립 프로듀서이다 보니, 개인의 생계와 예술 작업의 지속가능성, 코로나 관련 특별 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싱가포르 동료는 공정하지 못한 지원 방식의 문제를 언급하고, 말레이시아 프로듀서는 여전히 문화예술의 위기에 무관심한 정부와 지원 시스템이 부재한 공공 영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 발 빠르고 합리적인 지원책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던 호주에 대해서 그곳의 프로듀서는 국가 차원의 예술 정책 부재와 현장의 모든 예술가와 독립 프로듀서들에게까지 와 닿지 않는 부족한 지원금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낸다.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여러 기관에서 코로나19 지원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창작과 프로젝트 개발이기 때문에 예술가와 기획자들은 연기와 취소의 대책을 마련하며,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문제는 우리가 세우고 있는 이 계획들마저 이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는 또다시 연기와 취소라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 소통과 연대
몇 주 전 핀란드의 코네재단(Kone Foundation)에서 진행한 ‘예술가 홈 레지던시 지원’(Artist Home Residency) 내용을 동료들과 공유한 적이 있다. 예술의 대담한 도전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미션으로 하는 비영리기관인 코네재단은 학술 연구, 문화, 예술을 장려하기 위한 기금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술과 리서치의 결과물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마련한 예술가 홈 레지던시는 코로나 감염 확산으로 예술 활동 기회가 사라진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새로운 예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예술가는 3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작업 세계를 돌아보고,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 작품 또는 프로젝트를 완결해서 발표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특정 장소에서 일정 기간 동안 예술가들에게 실험과 탐구의 시간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과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반면 홈 레지던시 예술가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원격으로 독서 토론을 하고, 휴식 시간을 갖고,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나누는 기회를 갖는다.
코네재단 홈페이지에 다시 접속해보니, 두 개의 공지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홈 레지던시 선정 공지이고, 또 하나는 코로나19 관련 기금 수혜자 안내문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홈 레지던시 사업의 설계 과정을 알 수 있다. 재단은 기존 레지던시 사업을 변경하기 전에 600여 명의 현장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선행했다. 그 결과 예술 분야 중 특히 공연예술 분야의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예술 활동 기회를 잃고 있다는 내용을 도출하였고,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홈 레지던시 사업을 구상했다. 3,467명의 예술가가 지원했고, 185명이 선정되어 총 148만 유로(약 20억 원)의 지원을 받았다. 지원자 수가 선정자 수의 18배가 넘는다.
두 번째 공지는 코로나19 관련 사업 변경에 대한 안내이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 공공기관들도 유연성을 가지고 사업 일정과 예산 변경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코네재단이 내놓은 안내문 첫 문단을 마주하면 변경 사항에 대한 기능적 안내를 받는 것이 아닌,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재단은 이 위기 극복을 위해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하겠다는 약속을 시작으로, 가장 먼저 프로젝트의 모든 참가자의 개런티(guarantee)를 초기에 계획한 대로 지불할 것을 요청하며, 어떤 누구도 개런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또한 프로젝트는 변화된 현재 상황에 맞게 계획을 조정할 수 있으며, 조정이 어렵다면 재단과 논의해 함께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제안도 남겨 놓았다.
함께 상상하고 모색하기
호주예술위원회는 예술분야의 전문가들과 라운드 테이블 회의, 토론, 피드백 등의 과정에서 나온 의견을 수렴해 4월 3일 ‘회복 기금’(Resilience Fund)을 발표했다. 1.생계 2.적응 3.창작 세 분야이며, 중복 지원이 가능하다. 생계 지원은 활동 취소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고, 단기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지원이며, 두 번째 적응 지원은 기존 작업을 위기 속에서 적용하고, 새로운 작업 방식을 모색하는 데 사용하는 기금으로, 기술, 경력 개발, 사업 개발, 예술 활동 개발, 디지털 역량 증대 및 협력 작업을 모두 포함한다. 세 번째 창작 지원은 지속적인 예술 창작과 창조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한 지원금이며, 기존 작품의 경우, 리서치, 창작개발, 발표의 모든 과정을 지원하다. 모든 지원금은 신청 기간이 별도 정해 있지 않아 언제라도 신청이 가능하며, 기금 수혜 후 2년 내 사업을 종료하면 된다.
기금 직접 지원 외에도 온라인 웨비나(Webinar, 웹+세미나)를 통한 공공과 민간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4월부터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열리는 웨비나 시리즈는 ‘리더십, 디지털 적응, 예술작업의 변화와 적응’ 세 개 주제 민간 전문가들의 제안을 받아 내용을 구성하고, 제안을 낸 민간의 전문가들이 각 세션의 호스트를 맡아 진행한다. 현재 예술가/기획자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해소하고, 예술 커뮤니티 안에서 지식과 정보, 경험과 서로의 상태를 공유하며 예술 생태계를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웨비나의 내용은 위기 상황 속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인가? 나 자신과 동료들의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 불확실한 시대의 코칭, 멘토링 및 동료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까? 디지털 작품 경험과 배포를 위한 플랫폼은? 관객이 온라인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을 위한 디지털 플레이 북 만들기, 저작권과 라이선스, 기후 변화 및 예술 리더십, 지금 독립 아티스트들이 알아야 할 팁들은 무엇인가? 등 다양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긴급한 상황 속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최근 각종 코로나19 지원 결과가 발표되면서, 사업의 목적과 선정 기준의 모호함에 대한 문제 제기와 선정되지 못한 예술가/단체들의 피로감이 높아지고 있다. ‘긴급’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한정된 재원이라는 제약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어디에도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완벽한 지원 제도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설계 과정과 소통의 방법이 아닐까? 처음에는 홈 레지던시 지원 사업을 만든 코네재단의 대범한 사고 전환과 유연성에 놀라움이 있었다면, 지금은 책상 위에서의 상상이 아닌 현장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설계했다는 점에 다시금 주목하게 된다.
이 불확실한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5월부터 조금씩 공연장이 열릴 예정이고 예술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창작과 예술 활동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코로나 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현장의 성난 외침과 공공기관의 관료주의적 두려움과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함께 타고 있는 파도를 인식해야 한다. 과정의 공유와 소통 그리고 연대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뉴노멀과 함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준비가 요구되고 있다. 2주에 한 번씩 온라인에서 만나는 해외의 동료들과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예술지원의 이슈들을 이야기한 후 서로에게 다시 질문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코로나 이후 도래할 세상에서의 예술은 어떤 상상을 해야 할까?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더 평등하고, 더 다양하고, 승자독식이 아닌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예술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격리와 봉쇄의 시대에 늘 외쳐왔던 협력과 연대는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찾아가는 일은 두렵지만, 설레는 일이다. 그 과정을 예술적으로 접근한다면, 재난 시대의 파도타기가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엄숙하고 학술적인 방법보다는 경쾌하고 유연한, 마치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공상과학소설을 쓰듯이 상상하고 고민하고 실행한다면, 그 과정은 즐겁고 결과는 생산적이지 않을까.
박지선
박지선
연극, 무용, 다원,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걸쳐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축제, 레지던시 기획, 공연예술작품 제작 및 국제 네트워크(아시아 프로듀서 플랫폼/APP)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 경계, 기술과 예술 등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예술가와 새로운 탐험을 하며 예술의 동시대성을 탐구하고 있다.
jisunarts@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