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이호동 작가를 처음 만 난 이래, 그의 작업을 오래 지켜봐 왔다. 이호동 작가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특별히 학교 작업장 경험과 그의 예술교육철학, 학교 문화예술교육에서 예술의 역할 등 학교 안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작가와 만난 3월 말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한창이었다. 학교와 문화예술교육기관뿐 아니라 모든 일상이 멈춘 때에 광주 광산구 청소년문화의집 야호문화센터 예술작업장에서 이호동 작가를 만났다.
예술가로서, 예술 작업의 여정에 어린이에 대한 마음이 담긴 것을 보곤 한다. 이러한 관심 혹은 발견의 계기는 무엇인가?
내 작업이 직접적으로 어린이에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정신 수준이 아이들과 맞는다. (웃음) 어릴 적 추억을 돌아볼 때, TV에서 보았던 <맥가이버>와 <미래소년 코난>이 나에겐 무척 특별하다. 맥가이버는 어떤 시련과 문제에 부딪힐 때, 부족한 상황에서 주변에 있는 사물들과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융합하여 예상을 벗어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코난은 발가락으로 물고기를 잡고. 상상력과 도구와 환경, 조건을 융합해서 몸을 움직이며 행동력으로 결합하는 삶, 그런 예술을 꿈꿨다. 본디 내 작업의 기본이 오브제와 오브제를 결합해보고 틀을 깨보는 행위이다. 초창기에 언어유희를 통해 언어와 언어를 결합해보고 틀을 깨보는 행위를 해봤다면, 지금은 버려진 사물들 즉 만날 수 없는 테니스와 클러치, 자본의 논리에서는 실용성 없는 것들, 만날 수 없는 사물, 삶, 기관, 공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낯선 만남과 연결을 통해 재미난 상상력, 엉뚱한 행위들, 다양성이 나오니까.
아이들과 만나고 놀게 된 계기는 2009년 퇴락한 전통시장인 대인시장에 빈 점포를 작업실 삼아 들어갔을 때부터일 것이다. 시장 아이들이 조부모를 따라 가게에 나오는데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놀 곳도 없었다. 어떤 공백이 보였다. 노인은 노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다른 삶의 궤도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아이와 어른을 만나게 하는 중간자로서, 이 시장 안에서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까 고민하다가 작업실을 아이들의 놀이 공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간 이름은 <춤추는 고래> 한자로는 옛 고(古), 올 래(來)를 써서 ‘고래(古來)’로 지었다. 일종의 언어유희다.
작가의 작업실을 어린이들에게 열어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들은 시장 안 작가 작업실에서 주로 무엇을 했나?
<춤추는 고래>는 365일 문을 열어두었다. 물론 최소한의 규칙은 있었다. 나는 청소만 했다. 어떤 때는 작품 파손도 되고 스트레스 많았지만, 벽이 파손되었다면 그곳을 보수하는 지점부터 또 시작했다. 작가로서 작업실에서 나만의 내면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이렇게 부딪히는 것이 틀 안에 갇히지 않는 길이고, 이러한 과정이 작업에 양분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머릿속에서만 혹은 조형성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삶 속에 침투해서 우리 삶 속에 문제 되는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고민해갔다.
그러던 중에 ‘선인장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대인시장의 역사 같은 분으로, 아주 오랫동안 폐지를 주우셨다. 놀랍게도 할머니는 최악의 경제생활자이면서도, 폐지와 함께 죽어가는 선인장, 화초 등을 주워서 집에서 정성 들여 살려낸 후 시장에서 자신을 챙겨주신 분들께 다시 선물하시곤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시장과 생명과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할머니 집을 방문했는데, 곧 스러질 것 같은 집 안과 밖에는 주워온 쓰레기들 천지였다. 그 한 켠에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선인장과 화초, 채소들이 자라며 정글처럼 넝쿨진 초록의 풍경이 아이들과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삶 속에서도 할머니는 시장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린 선인장을 나누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 집을 보수해드리거나, 버려진 물건들을 오브제 삼아 시계 등을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선인장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특별해서 그림책을 만들기도 했다.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아이들의 기억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가 사는 동안 언젠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길 바란다.
2015년엔 일반적인 작가 레지던시가 아닌 공교육 현장인 선운중학교에 입주 작가로 활동하셨다. 작가로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혁신학교로 지정되었던 선운중학교는 당시 교육 내용뿐 아니라 공간 혁신을 통해 교육에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했다. 나의 역할은 주로 공간을 예술적으로 변화시키고 업사이클 활동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 먼저 학교 안에 탁구 치던 공간을 ‘예술작업장 꼬물’로 만들었다. 학교 복도에 빈 공간을 발견하여 그곳을 아이들의 쉼터이자, 전시장이자, 공연장이 되도록 다용도 공간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작가로서 삶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도 싶었던 시절이었다. ‘예술작업장 꼬물’은 말 그대로 고물이 예술 작품으로 변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작업장을 온갖 목공 도구들과 고물들로 채웠다. 용도 폐기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물들은 나에게 늘 영감을 주는 오브제이다. 고가 재료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물들의 연결과 결합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고물상 가서 가져온 물건들을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과 연결했다.
선운중학교 ‘예술작업장 꼬물’
예술가가 학교 안 작업장에 입주하여 청소년과 만나면서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은 무엇이었나?
작업장을 늘 열어두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놀러 왔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들렀다. 그러면 나는 모른 척 그냥 재료를 던져주고 만들어봐라 한다. 아이들 하는 거 무심한 듯 보다가 톱질, 못질 가르쳐주고, 필요한 거 있으면 갖다 주고.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창안하고 만들어가며 집중해 갔다. 나는 지켜만 본다. 교육이 아니니 특별히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부르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의 일상엔 여백이 없다. 비워주어야 창조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상상할 수 없게 꽉 채워진 아이들의 일상에 누구나 올 수 있게 공간을 열어놓았다. 아이들에겐 그런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물론 아이들의 마음이 보이는 소소한 조율들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더 확장해서 보자면, 학교 내 배움의 틀과 또 다른 다양한 예술가들, 다른 삶의 지혜와 전문성 가진 이들이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말은 투박할지라도 삶을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될 때가 있다. 그 만남 어딘가에서 감정들이 넘나들고 각자의 삶과 오버랩되고 그렇게 여백을 만들어내지 않겠는가. 쉼을 만들어내지 않겠는가. 내가 조각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강진의 중학교 등하굣길에 무심코 보았던 철물공업사의 강한 용접 불꽃에 대한 시각적 기억 때문이었다. ‘보는 것’과 ‘감각적 기억’ 만으로 여기로 올 수 있게 하는 만남의 순간이 되었다. ‘예술작업장 꼬물’은 큰 구상과 방향은 있어도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저 변이를 위한 과정의 공간이었다고 본다. 이게 옳다가 아니라 헤매며 실험해보며 내 생각대로 무언가 만드는 과정을 밟아 갈 수 있는 곳, 그냥 들려 놀 수 있는 곳, 그냥 만들어 보는 곳, 그곳이 학교 공간에서 여백의 공간이었다는 점이 가장 의미 있었다고 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민한 시기인 중학생 아이들과 소통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관계가 늘 그렇지만, 만남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실은 작업장에 찾아오는 아이들의 이발을 해주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20살까지 직접 자녀들의 이발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배운 것 없는 시골 농부로 평생 비싼 옷 못 사주고, 멋진 곳 데려가지는 못했지만 주말이 되면 마당에 있는 감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을 차례로 보자기 씌우고 이발을 해주셨다. 내 첫 면도도 그랬다. 그 거칠고 투박한 손. 가위질 소리에 많이 졸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되었음에도 그때 느꼈던 아버지 손의 온기가 기억난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군대에 있는 동안 이발 기술을 배웠다. 그 기술을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는데, 선운중학교에서 쓸 줄은 몰랐다.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기억하며, 아이들 이발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된 일이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시간의 여백을 주시고, 스스로 할 수 있게 있도록 마음의 여백을 주신 것처럼, 그 손의 온기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신 것처럼, 바로 그것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기도 했다.
  • 12씨 프로젝트 놈팽이 워크숍
  • 학교로 굴러간 굴링
학교에 계신 동안 여러 교과목 교사들과 협업 프로젝트도 하셨다고 들었다.
매주 혁신부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작가가 느끼고 있는 고충, 학교 상황 등을 공유하며, 더 나은 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 많은 것들을 함께 의논했다. 특히 국어 선생님(김태은), 역사 선생님(김영주)과 함께 2층 복도 쉼터 공간을 ‘따뜻한 바다’ 콘셉트로 수업과 연계하여 공간을 변화시켰다. 음악 선생님과는 오브제 악기 만들기 수업을 함께 했다. 미술 선생님은 직접 연계 수업을 제안해서 함께 전 학년 석고 캐스팅 수업을 진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방학 전 학교 일정이 약간 느슨한 시기에 1학년 담임 선생님들과 조율해서 자율학습하느니 밖에서 놀자 콘셉트로 놀이대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에 나무토막이 많이 쌓여 있는 것에서 착안하여, 아이들에게 자루를 주고 나무토막을 끌고 와 쌓아서 최고로 높이 쌓은 팀에게 수박을 주는 대회였다. 정리도 아이들 몫이었다. 규칙은 나무를 결합하되 묶지 않고, 쌓되 되돌려야 하며, 함께 해야 했다. 모두 엄청나게 땀 흘리며 재미나게 놀았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문화의집 야호센터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주하면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야호센터 건물의 층과 공간의 성격마다 콘셉트를 함께 의논하고 시각적으로 함께 풀어나갔다. 현재는 이곳 야호센터를 기반으로 놀이에 집중하고 있다. 놀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의 지혜와 기술이 함축된 것인데, 지금 이 시대를 담아내는 놀이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능을 잃고 버려진 오브제에 어떻게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오브제와 오브제의 결합을 통해 놀이로 이어졌다. 정적인 오브제가 놀잇감이 되어 아이들이 놀기 시작하면 움직이고 생명력이 생겨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2씨 프로젝트’이다. 예술가와 12명의 마을 전문가를 연결하여 일상의 12개의 사물로 12개의 놀이감을 만들어 놀이를 통해 12명의 청소년을 발굴하는 중이다. 11번째로 ‘옷걸이’를 활용한 놀이를 연구 중이다. 때론 아이들과 놀이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아이디어를 함께 발전시키고, 시간 될 때마다 고물상에 가서 놀잇감이 될 만한 오브제를 구해온다. 놀이 도구와 놀이규칙을 만들고, 놀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사용설명서도 만들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놀이가 동계스포츠 ‘컬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업사이클 놀이교구 굴링’이다. 총 9개 초중등학교를 찾아가서 굴링을 제작하고 굴링 경기에서 선발한 대표선수들을 모아 ‘2019 놀이대회 굴링픽(굴링+올림픽)’이 개최됐다. 광산구청과 광주시교육청, 금호타이어의 협약과 지원을 통해 놀이대회를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 시너지가 되었다. 놀이는 광산구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아동센터와 학교, 지역 축제 등에서 단골 놀이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 논리로 만들어지고 그 용도가 폐기된 사물도 놀이적 시각으로 보면 놀잇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물 연구, 즉 형태와 특징, 활용법 등을 연구한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잘 놀 수 있어야 한다.
2020년 바로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 실존이 얼마나 연약한지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다음 세대와는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놀이’는 실존적 행위이다. (인간은) 놀아야 산다. 다양한 오브제들을 연구하고 놀이를 창안하고 그것으로 함께 노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삶과 작가의 삶이 넘나들고, 몸의 감각과 기억을 되살리며 서로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혹은 생존을 위해 본래 자신이 가진 본질을 잃어버리고 획일화된 삶에 빠져들기 전에 그것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해서 ‘쉼’ ‘여백’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게 작가에게, 아이들에게 ‘놀이’인 것이고, 놀이는 삶의 구조 속에서 여러 균형을 찾기 위한 행위이다. 코로나와 같은 인간의 생명이 오가는 상황에서 예술의 힘을 논하자고 하면, 어쩌면 너무나 이상화된 논의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작가는 잘 놀 줄 알아야 하고, 놀아야 생존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인, 새로운 옛것이자 노라이버(놀이+맥가이버)가 될 때, 부족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적절한 자기 전문성을 융합하여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노라이버는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 혼자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삶을 추구한다. 맥가이버가 부족하고 비워진 것들에서 다른 차원의 상상과 사물의 재구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말이다. 학교에 예술가의 작업장과 예술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론 예술가가 학교뿐 아니라 양로원, 도서관, 병원, 등 삶의 빈 공간을 작업장 삼아 들어가 함께 살아가며 작업하며, 삶의 여백과 수미(首尾)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호동
이호동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순수미술교육을 전공하였다. 전시로는 광주대인시장 전시 ⟪춤추는 고래(古來)⟫(2009), 갤러리 초대전 ⟪선을 찾아서⟫(2018), 제8회 광주비엔날레기념 특별기획전 ⟪Dessert⟫ 등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다. 광주 대인예술시장 1기 장기 입주작가로 참여했으며, 화순 마을미술 공공프로젝트 참여작가, 광주 전남 북아트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2015년 선운중학교 ‘꼬물’ 레지던시 작가로 상주했으며 2016년부터 현재까지 광산구 청소년문화의집 야호센터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어른들의 삶과 아이들의 삶이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2개의 업사이클 놀이를 연구하고 있다.
사진 _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프로그램 사진_필자 제공
천윤희
천윤희
광주비엔날레가 좋아서 광주로 내려온 이래, 생각보다 오래 일하고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사람’과 ‘삶’이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는 매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문화매개’ ‘매개자’ ‘예술경영’ ‘문화예술교육’ ‘지역’ ‘작가’를 연구하고, 글 쓰고, 일한다.
uni9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