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산책로는 아파트 단지의 분리수거장과 분리수거장을 잇는 동선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6천8백 세대가 사는 대단지라 분리수거장이 여러 곳에 있다. 그 앞을 지나며 힐끗힐끗 쳐다보면 폐기물 틈에 내가 노리는 물건이 있다. 그 녀석을 마주치면 심장이 떨린다. 간단하게 정상 여부를 확인하고 애인처럼 손을 꼭 잡고 집에 데려온다.
분리수거장에 ‘고려장’ 된 물건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조금만 고쳐 쓰면 될 것을, 아니 고쳐 쓸 필요도 없고 그리 낡지도 않았는데 단지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물건 천지였다. 그리 절약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왠지 그것은 ‘물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결국 물건을 하나씩 집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지는 아니니까 나름의 원칙이 있다. 원래 용도와 다른 용도로 활용한다. 어떻게 새롭게 쓸지 구상이 서면 집어온다. 이를테면 과일바구니는 주워서 캠핑 갈 때 식재료를 넣어간다. 나름 운치가 있다. 쓰고 난 뒤에는 화로대에 넣어 불쏘시개로 쓴다. 개다리소반 역시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에는 화로대 행이다. 버려진 프라이팬은 모닥불 위에서 화려한 불쇼를 마치고 장렬하게 산화한다.
분리수거장에서 찾은 ‘다른’ 쓸모
나에게 분리수거장 ‘최애템’은 바로 여행용 캐리어다. 처음에는 빈티지 캐리어를 하나 주워다가 여행자 카페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가져다주었다. 단순한 전시용이었다. 하지만 일반 캐리어의 쓸모는 찾지 못해서 러 번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유레카를 외쳤다. 멋진 쓸모를 찾은 것이다. ‘안 쓰는 캐리어에 책을 넣어서 기증하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10여 년 전 나름 ‘트위터 스타’로 군림할 때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안 쓰는 책을 모아 꼭 필요한 곳에 보내주자는 소셜 프로젝트였다. 사람들은 집단지성의 에너지를 좋은 일에 쓰는 것을 즐겼다. 덕분에 1년 반 동안 11만 권 정도의 책을 모아 기증할 수 있었다.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의 시즌2 격으로 ‘캐리어도서관’을 시작했다.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게 바로 책을 나르는 일이었다. 기증자들도 책을 들고 오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후원자를 통해 착불 택배 시스템을 구축해서 기증받았다. 하지만 책을 기증받는 곳으로 옮길 때에도 작업량이 만만치 않았다. 몇천 권의 책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봉사활동을 하는지 이삿짐센터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여서 ‘바퀴 달린 책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버려진 캐리어를 본 순간 ‘바퀴 달린 캐리어를 책장으로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발상을 전환하니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다. 책을 기증하는 사람이 캐리어에 책을 넣어 끌고 오면 손에 들고 올 때보다 몇 배 더 많은 책을 가져올 수 있다. 기증받을 곳에 옮길 때도 캐리어 채로 옮기니 작업이 수월했다.
무엇보다 캐리어는 하나하나가 그대로 책장으로 쓰일 수 있어서 좋았다. 책 캐리어 하나가 그대로 기증자가 붙인 이름의 도서관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캐리어도서관이 되어 우리나라 오지와 외국을 여행하게 된다. 지금처럼 코로나19 상황으로 여행을 못 갈 때는 책 캐리어를 먼저 보내고 나중에 찾아가도 된다. 캐리어는 하나의 우주였다. 나의 지적 세계를 담는 것이 책 캐리어라면 CD를 담은 음악 캐리어나 DVD를 담은 영상 캐리어는 내 취향의 세계를 담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캐리어도서관은 우주를 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췄지만 상상력은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구상을 페이스북에 쏟아냈다.
지식과 취향을 담아 세상을 누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장서 수가 1,700만 권~1,800만 권 정도 되는데 이를 능가하는 2,000만 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넓고 큰 캐리어도서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역시 뻥은 크게 쳐야 맛이다. 다들 ‘속아주는 척’ 했다.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서울하우징랩에서 공간을 제공해 주어서 코로나19 와중에도 조용히 시작할 수 있었다.
뻥도 치니까 늘었다. 2,000만 권이라니!? 그래도 계획은 있다. 2,000만 권을 모으는 셈법은 이렇다. 10만 권까지는 우리가 모으고 1,990만 권은 전 세계 한류 팬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특히 BTS 팬들에게. 책 캐리어를 모으고 나르는 일이 ‘의미 있는 놀이’가 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책 캐리어를 받는 곳에서는 책보다 캐리어를 더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책 캐리어는 세상을 누빌 것이다.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벌써 전시도 하나 기획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담은 캐리어를 기증하게 해서 《꿈캐리어》 전을 열 생각이다. 벌써 문화예술인들이 나서기 시작했고 전시장을 내주겠다는 갤러리 관장도 나타났다. 캐리어의 확장된 해석을 볼 수 있는 전시라 나름 기대된다.
‘의미 있는 일을 재미있게, 재미있는 일은 의미를 찾아서’ 하면 오래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다. 세상에 영원한 파티가 없듯이 영원히 재밌는 것은 없다. 영원한 재미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다. 캐리어도서관은 그런 의미에서 ‘국내 1호 여행감독’을 자처한 나에게 영원한 재미를 보장하는 여행 아이템이다.
세상에 위대한 사상가는 없다. 오직 위대한 실천가가 있을 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사실 개점휴업 상태이기는 하지만 기증받은 책 캐리어를 보면 알이 꽉 찬 주꾸미를 보는 듯해 흐뭇하다. 언젠가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 이 책 캐리어와 함께 세상을 여행할 것이다. 책 캐리어에 우주를 담아서 말이다.
사진 _ 필자 제공
관련링크 _ 페이스북 캐리어도서관 그룹
고재열
고재열
20년 기자생활을 마치고 여행감독으로 변신 중인 전업 여행가. 트래블러스랩 대표이자 재미로재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여행자 플랫폼(304050을 위한 여행동아리)’ 구축 중. ‘캐리어 도서관’의 책캐리어를 들고 세계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살짝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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