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죽고 싶어요? 정신 차리세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 소설가 스베틀라나 A. 알렉시예비치가 쓴 작품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에 나오는 장면이다. 체르노빌의 첫 희생자 중의 한 명인 순국 소방대원 바실리 이그나텐코의 아내의 회상이 강렬하다. 위의 장면은 1986년 4월 26일 1시 23분 58초, 벨라루스 국경에 인접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 원자로가 폭발한 후 최초로 출동한 소방대원을 응급 처치하는 의료진이 소방대원의 아내에게 한 말이다. 스물세 살의 새댁으로 임신 6개월이었던 소방대원의 아내는 ‘포옹도 키스도 하지 말라’는 의료진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을 속인 채 온몸으로 남편을 간호하다 결국 사별하게 된다. 400뢴트겐(방사능 수치)이면 죽는 방사선을 1천6백 뢴트겐이나 쏘인 방사능 후유증 때문이다. 소방대원의 아내는 이후 여자아이를 출산하지만, 간 경화증에 걸린 아이는 출생 후 4시간 만에 죽게 된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체르노빌 사건은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핵 공포는 나라 간 경계를 허물었다. 사고 이후 체르노빌이 세계적 문제가 되는 데에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체의 휘발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높이 올라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도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체르노빌 이후에도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개수의 원전은 계속 지어지고 있고, 2011년 3월 11일에는 일본에서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대지진은 천재(天災)였지만, 원전 사고는 인재(人災)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에 인재가 겹친 ‘문명재(文明災)’라고 보아야 옳다. 원전 사고를 비롯해 호주 산불과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 같은 최근의 생태계 위기가 갈수록 걱정되는 것은 그것이 ‘문명재’라는 점 때문이고, 더 이상 한 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사안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생태계의 파국이 예견되는 패닉(panic)의 상황에서 이제 인류는 ‘정해진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무엇인가를 행동해야 한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새잎, 2011)

  •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김종철, 녹색평론사, 2019)
생태적 감각과 지구시민적 태도
스베틀라나 A.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모두 체르노빌을 옆에 두고 사색하기 시작했다. 모두 철학자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진술이야말로 지금-여기에 당장 필요한 지구시민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근대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종철은 근대문명의 위기는 결국 ‘정치의 위기’에 있다고 전제하고, 민주주의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광우병(狂牛病)은 “‘미친 소’의 문제가 아니라 ‘미친 인간’의 문제”이고, 핵과 방사능 같은 문제는 현재를 살리기 위해 미래를 죽이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김종철은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길이라고 역설하며, 우리 모두 근대주의적 발전 사관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주를 축복으로, 번뇌(煩惱)를 보리(菩提)로 바꾸는 길은 결국 ‘자율, 자치, 자립’의 길에 있다고 말한다.
김종철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서 제시하는 대안 중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사례는 ‘자연의 권리’를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문화한 에콰도르이다. 자연을 대하는 근대인들의 근원적인 불경(不敬)의 태도 내지는 무례함을 넘어,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의 권리’를 채택한 에콰도르인들의 사회적 합의는 생태계 위기 문제를 전 지구적으로 풀어야 하는 이 시절에 깊이 음미해야 마땅하다. 특히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 인간적으로 너무나 왜소하다”라는 김종철의 지적에 대해 어떤 반박의 말조차 발견할 수 없다. 1991년 [녹색평론] 창간 이후 김종철이 ‘모든 시인은 생태주의자다’라는 모토 아래 ‘시인’(=예술가)의 역할을 유독 강조한 것도 왜소해진 현대인들의 생태적 감각의 회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예술가)은 근본적으로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고, 사물의 근본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이 서문에서 언급한 ‘Hope against Hope’(희망을 버리지 않다)는 지금-여기 시인과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교육자들이 갖추어야 할 ‘생태문명’의 가치와 철학이지 않을까 싶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태적 공공감정(public feeling)의 회복이다. 생태적 공공감정이란 무례한 세상과 무례한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우리 모두의 공통감각이 되어야 한다. 동학(東學)의 사상가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일종의 ‘지구도덕’으로 제시한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정신과도 통하는 생태적 공공감정은 우리 시대 공공철학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문명 혹은 지금의 문화적 반달리즘과 자멸적 속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시인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그리고 2018년 작고한 시인 허수경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아프게’ 읽어야 한다. 빌어먹을, 우리의 심장은 조금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 『폐허를 인양하다』
    (백무산, 창비, 2015)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문학동네, 2011)
자연의 역습, 정지의 힘에 눈뜨자
백무산은 『폐허를 인양하다』에서 “내가 폐허라는 사실”을 수락하며, “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패닉」)을 보여주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백무산은 ‘4.16’ 세월호 참사에서 근본적 인식과 태도를 갖게 되었지만, 시인의 눈과 귀가 향하고 탄핵하는 것은 근대문명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괴멸된 생태계에는 시간의 단일종만 서식한다”(「시간 광장」) 같은 표현에서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에서는 ‘정지의 감각’을 넘어 ‘정지의 힘’을 적극적으로 예찬한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일하지 않을 자유, 그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해 일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백무산 「정지의 힘」 전문
시인은 생태-생명-생활을 저마다 분리되고 분절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의미로 포괄하려고 한다. 인상적인 대목은 ‘자동사’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사용이다. 그리고 비인적(非人的) 존재들을 적극 껴안으려는 시적 태도를 보여준다. “내가 고라니나 다람쥐처럼 풍경을 풍경으로 이해”(「감각의 기억」)하려는 생태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허수경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시집에 대해 “우리들 일그러진 마음의 생태학에 관한 시적 격문(檄文)”이라고 쓴 적이 있다. “구멍을 뚫어야 지속되던 문명”(「오후」)의 파괴성과 불모성을 사유하려는 허수경의 시집에는 우리 안의 견고한 마음의 관료주의를 탄핵하며, 이름 없는 것들의 슬픔과 말 못하는 것들의 눈물이 행간에 낭자하다. 특히 13쪽 분량의 장시 「카라쿨양의 에세이」는 최근의 구제역 파동, 아프리카돼지열병 파동을 거치며 수백만 마리의 소·돼지가 생매장을 당하고, 그런 목숨을 가진 생명의 죽음을 ‘살처분’이라는 불손한 말로 합리화하는 문명의 행태를 신랄히 꼬집는다. 시인은 동물에 대한 무례한 태도는 결국 우리 자신마저 하나의 ‘사물’로 취급하려는 시선의 폭력을 내면화하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시집에 등장하는 사막과 황무지의 황량한 이미지는 허수경 시가 일종의 지구 시대 “난민의 일기장”(「슬픔의 난민」)이라는 점을 은유한다.
1950년대 중반 세계 최초로 발생한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을 고발한 3부작인 『고해정토』를 비롯해 『신들의 마을』, 『하늘물고기』를 특유의 ‘미치코 방언’으로 쓴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의 작품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이 3부작은 패전 직후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은 전후 부흥과 경제발전이라는 ‘근대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내면을 세밀히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시무레 미치코라는 작가를 왜 ‘근대의 주술사’라고 부르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근대인들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유토피아에 대한 냉소를 의미하는 디스유토피아(disutopia)의 힘은 아직도-여전히 막강하다. ‘모든 것은 이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는 선언은 근대인들의 정언명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가 “당신들이 헛된 말로 제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라고 호소하는 항변이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시인, 예술가, 예술교육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대의 주술에서 풀려나와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같은 비상상황은 결국 ‘자연의 역습’이기 때문이다. 스베틀라나 A.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운명은 한 사람의 인생이고, 역사는 우리 모두의 삶이다. 나는 운명을 보존하면서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 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이라고 토로한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생각하고, 지금의 문명 ‘바깥’을 성찰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우리는 난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위한 페이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황동규 「전봉준」 중)
이미지 제공 _ 녹색평론사, 문학동네, 새잎,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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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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