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개별자로서 한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한 사람에는 여성과 남성, 건강하고 젊은 사람부터 노약자까지,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여기는 사람부터 사회적 약자까지 그리고 어른과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약점과 모자람이 ‘차이’로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화의 기반이 되어 줄 예술 행위와 그 결과에서도 이런 ‘차이’가 공존하고 드러나야 한다는 어떤 당위를 우리는 어떻게든 의식하여야 한다. 이런 태도는 결코 지공무사(至公無私)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 우리는 새로이 변화된 ‘차이’ 존중의 문화에서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차이’를 문화 근간으로 이해하고자 함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을 지탱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새로움이란 옛것에 대한 재해석이면서 동시에 옛것에서 결코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여기’에서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일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봄’
성취하고자 하는 일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시각예술에서 다루는 ‘봄-보다’의 문제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시각예술에서 다루는 모든 ‘보여줌’은 예술 행위의 주체가 취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전제한다. 작품이라고 보여주면, 관람자는 그것을 본다. 하지만 하나의 질서처럼 여겨지는 그런 행위의 순서가 ‘예술가가 보여주었다’고 해서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강박적 생각이나 편견은 전통적인 예술의 이해 안에서만 설명된다. 예술가의 행위와 그 결과가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만들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는 모든 개별자 중 한 명이며, 모든 한 명으로서 ‘그 사람’은 이미 여럿이 함께 있는 가운데 ‘그러하게’ 있었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마치 고유한 창조 행위처럼 하는 ‘일’이란, 그리고 그렇게 작품으로 ‘보여줌’이란 이미 우리가 여럿으로 함께 말하고 이해하고 느껴왔던 것 중 하나이다. 다만, 예술가의 상상력과 그의 고유한 말투로써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보임-보여줌’의 상호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은 단 한 사람의 제언과 그에 상응하거나 대응하는 여럿의 무리 관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삶은 늘 더 이상적인 내용을 들어 그에 걸맞은 실천적 방법을 꾸리면서 실패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여럿의 의견이 소통하거나 전달되며 ‘함께’ 해결하려는 궁리(窮理) 안에 있다. 이 궁리의 다양함 속에 예술이 한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예술은 사람의 솜씨로 이치를 밝혀내면서 결국 여럿 사이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갖는 일이다. 삶이 마련한 예술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여럿이 마련한 ‘보여야 할 것’에 대해 솜씨를 보여주고, 그것을 우리 모두가 함께 봄으로 시각예술의 행위가 ‘우리’ 안에서 정당하게 된다. 보여주고, 보는 일 모두에 여럿이 이미 관여하기에 보는 것은 항상 여럿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독특한 상황을 가진다. 이 상황은 예술가와 예술작품 중심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왜곡된다.
인간다움을 헤아려 ‘봄’
왜곡은 늘 삶을 괄호 안으로 집어넣고, 삶이란 없는 양 말할 때 일어난다. 마치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조차, ‘당신’과 ‘세상’과 ‘아름다움’을 이어주는 삶을 놓치고 이 문장을 구사하면, 온통 허구에 이 귀한 용어들을 쏟아붓고 날려 버리는 것과 같은 꼴이다. 예술은 이미 왜곡을 전제로 ‘말을 나누고 전하며’, 보게 될 것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삶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예술가에게 그리고 예술가와 함께 살아야 할 ‘우리’에게 동시에 요청된다. 어떤 태도가 삶에 진정성을 간과하지도 않고, 속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쉬지 않고 반성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래서 예술교육의 가장 밑-근거로서 초기 단계는 인간다움에 대해 말하고, 인간다움에 눈을 떠 가는 과정을 깊이 헤아릴 기회를 마련하는 일로 가득해야 한다.
보는 행위는 인간에게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과제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목(着目)할 수 있는 ‘보다’의 문제는 ‘보이다’와 ‘보이는 것을 보다’로 한 쌍을 이룬다. 이렇게 한 쌍을 이룬 ‘보다’를 이 글에서 “봄”이라 불러 본다면, “봄”은 인간의 삶을 문화적 생태계와 연관해 숙고할 때 새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문화 생태계란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근간으로 관계 형성 전반을 아우르며 지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문화 생태계에는 자연의 훼손과 회복의 문제가 담기며, 인간의 이웃 문제가 온전하게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터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봄”을 문화 생태계로 접근하며 해석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일방적 보여줌’에 대한 무반응의 수용 태도이다.
어떤 계기와 어떤 상상력이 “봄”에 대한 새로운 길을 다루려고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우선 예술가의 제작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가를 주체로 설정해야만 하는지 물어보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과연 예술 행위에서 주체라는 개념이 예술가의 인간다움을 충분히 해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술가는 예술 행위를 하는 개별자로서 이미 훌륭하게 구별되어 있는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구별된 한 사람이 제작의 주체일까? 제작의 앞 단계에서 예술가는 사유하는 주체일까? 제작 행위와 사유 행위 모두가 주체로서 한 개인인 예술가를 얼마나 정당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판명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 속에서 우리는 “봄”의 새로운 이해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간다움은 결코 개별자로서 한 사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며, 주체로서 세계의 중심처럼 한 개인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너, 우리-그 사이의 ‘봄’
다시 삶으로 돌아가자. 삶은 마치 ‘고유한 한 사람의 삶’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이미지를 가진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집요하게 파고들면, 삶은 나와 너의 관계를, 우리의 공통성을, 그리고 역사성 안에서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의 집대성이라는 ‘모호한 이미지’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만난다. 이제 “봄”을 이 모호한 이미지 안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해보자. 무엇이 모호한가? 내가 확연하게 모른다는 그 사실로부터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를 우리는 ‘모호하다’고 말한다. 누가 어떻게 삶을 모호하지 않게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봄”이란 이 모호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소통’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이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소통’을 하기 위해, ‘사이’에 놓인 상태로서 “봄”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각예술이 보이고 싶은 것과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늘 사이-소통의 방식으로서 모호함이 남겨진 어떤 상태이다. 세월호의 그 안타까움과 분노, 불안을 현대 시각예술이 어떻게 ‘보여줌’으로 도발하였는지 반성해 보면, 이 “봄”에 대한 새로움-모호함에 대한 드러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까?
이섭
이섭
사람다운 사람끼리 공유할 수 있는 관점을 찾아내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술을 이해하려고 공부하고, 기획하고, 실험하며 살고 있다. 전시도 기획하고, 새로운 문화환경에 알맞은 문화체계를 고민하고, 예술이라고 알고 있는 경계 그 밖에서 더 예술다운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다.
soplee6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