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전환기 혹은 인생의 후반기에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이 괜히 복잡하기도 하고, 배울 만큼 배우면서 살아온 입장에서 또 교육을 받는 것도 지겨울 테니 간단히 ‘예술 활동’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터이다. 예술 활동으로 줄여 놓고 보니 예술 + 활동의 합성구조가 드러나면서 ‘활동’의 의미가 새삼 궁금해진다. 사전을 찾아보니 ①일정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떤 일을 활발히 함 ②사람이나 동물이 몸이나 내부 기관 따위를 힘차게 움직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살 활(活) 움직일 동(動)으로 글자마다의 뜻에 충실하게 풀어보면 살아있는 움직임, 살기 위한 움직임이 된다. 결국 예술 활동이란 예술을 통해 행하는 살아있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숨을 쉬고 있는 동안 계속 움직인다. 살아있는 움직임이라는 말은 그래서 동어반복적이다. 살아있는 움직임으로서의 예술 활동이라는 뜻풀이에 동의하려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전제에 대한 합의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살아있음에 대해서는 생물학, 철학, 신학, 심리학 등 각 연구 분야별로 전문가 수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술의 속성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만 집중해 보기로 하자. 예술의 눈과 정신으로 살아있음의 참뜻을 생각해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갱신’이다. 갱신은 끊임없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예술의 가치를 거론하다 보면 ‘새로움’은 늘 등장하는 단골 개념이긴 하지만, 살아있음과 새로움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볼 여지가 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 새로워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새로워지기 위해선 이제까지의 것들에 대한 탐구와 발견과 반성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워지기 위한 노력이 지니는 가치는 새로움 자체에 있다기보다 지나온 삶에 대한 돌아봄의 의미에 더 있다고 봐야 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는 것은 그간 무엇에 공을 들이며 살아왔는지, 무엇에 얽매여 살아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갱신을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측면은 남다름에 대한 추구이다. 이때의 남다름은 같은 척도로써 남들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상대적 우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내부의 가치 기준을 확고히 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고유함과 같은 것이다. 확고부동한 자기만의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자면 예술가만 한 이들이 없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예술가를 일컬어 “중요한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몰락의 에티카』)이라고 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세상이 제시하는 보편적인 기준과 무관하게 스스로 믿고 의지하는 자기 신념을 절실한 태도로 지켜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봄으로써 그 무엇에도 예속된 삶을 거부하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술적 관점에서의 살아있음이다. 거듭 새로워지지 않으면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간 우리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움직임이었나. 안타깝게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이미 획득한 것들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삶 아니었던가. 부족한 것을 채우려 애써 왔지만 그 결핍이 나의 절실한 필요에 따른 것이었던가. 살기 위해 열심히 움직여 온 그 움직임은 스스로를 살게 하기보다 가족, 직장, 나라를 살리는 데 더 치중되지 않았던가.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가”와 같은 소싯적 심각한 질문들이 들 때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부질없는 생각들이라고 털어버리려 애써 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질문들이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 갱신의 시작이고 비로소 삶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불현듯이 떠오르던 삶의 질문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움직임은 살아나기 시작하고, 바로 그 지점에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이 있다. 다행히도 예술 활동은 이런 심오한 질문을 머리로만 고민하고 이성적으로 풀어내게끔 재촉하지 않는다. 예술의 힘은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움직임을 그대로 반복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에서도 문득 새로움에 눈뜨게 한다. 그 힘은 바로 예술의 ‘형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시집도 내고 영화로도 소개되어 유명해진 ‘칠곡 할머니들’의 경우를 보면 예술의 형식이 품고 있는 힘이 잘 드러난다. 한글을 깨우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시라는 형식, 시집이라는 형식, 영화라는 형식 안에 그들의 삶을 옮겨 놓음으로써 새로운 삶, 다른 가치로 볼 수 있게끔 되었다. 예술은 그야말로 ‘보이게 하는 것의 기술’임을 잘 증명하는 사례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예술의 형식을 통해 우리가 관객으로서 그분들의 삶을 의미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앞서서 그분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모든 형식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서 완성되는 순간 누구나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완성된 형식을 통해 관객과 소통, 교류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자기 갱신을 기대하는 예술 활동이 예술의 형식 속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스스로를 마주하지 못하고, 관객에게 보여줄 것을 우선 의식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맥빠진 상황에 처하게 된다. 넘쳐날 정도로 많아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삶의 감각 전환, 가치의 전환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고전주의 극작가 쉴러는 “위대한 예술가는 우리에게 대상을 보여주고, 평범한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며, 졸렬한 예술가는 소재를 보여준다”고 했다. 살아있는 움직임을 꿈꾸며 기꺼이 행하는 우리의 예술 활동이 한낱 소재를 다루는데 머무는 졸렬한 예술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전환기의 예술 활동은 애초부터 전문 예술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어서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예술 형식이 지니는 힘은 자기표현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자극할 때 극대화되는 것이어서 표현 욕구와 인정 욕구는 떼어 놓을 수 없다. 예술가를 목표로 하지 않음에도 예술가의 정체성으로 행동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기에 예술 활동을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예술가의 태도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을 무조건 배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쉴러는 ‘보여주는 것’의 차이로서 예술가의 수준을 3단계로 분류했지만, 그 분류 안에는 행위자 스스로 ‘보는 것’의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여주는 것이건 스스로 보는 것이건 졸렬하게 –구태여 내가 보여주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한낱 소재를 다루지는 말아야 한다. 전환을 꿈꾸며 시도하는 예술 활동이라면 적어도 자기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계속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자기 갱신의 예술 활동은 그래야 가능해진다.
* 「2019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결과공유회」(2019.12.2.) 기조발제문을 일부 수정하였다.
정원철 편집위원
정원철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학사, 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카셀종합대학교에서 조형예술(석사)을 전공했다. 《명사와 동사 사이의 아포리즘》 《展示展 혹은 轉市展》 《지독한 노동》 등 작품 활동과 함께 《북아현동에서 잃어버린 마르티스를 찾습니다》(2008) 총감독 등 다수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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