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금강산에 갔었으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관광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북측 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에 갔었는데, 항해 시간이 꽤 길었다. 금강산호텔에서 행사를 끝내고 구룡폭포로 관광을 나섰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북측의 안내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 중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가슴에 차고 있는 내 이름표에 관심을 가졌다.
“선생께서는 통일맞이 문익환기념사업에서 나왔구만요?”
“통일맞이를 아세요?”
“그럼 알지요. 문익환 목사님은 수령님을 만나신 통일의 선구자 아니십네까?”
“아이쿠 정말 반갑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온정리에서 왔습네다. 내일 내가 낙지를 갖고 올 터이니 다시 만나겠습니까?”
“아, 좋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만물상 코스를 등반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젊은이가 정말 낙지를 갖고 오는지, 만날 수나 있는지 무척 궁금하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날 만물상 코스로 갔다. 등반 코스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젊은이가 “통일맞이 선생” 하면서 다가왔다.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와 나는 등반 코스에서 살짝 비켜난 곳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낙지와 소주를 갖고 왔습네다.”
그가 비닐봉지에서 꺼낸 것은 마른오징어와 도토리 소주였다. 낙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비닐 컵에다 소주를 부어 내밀더니 건배를 청했다. 비록 비닐 컵이지만 서로 잔을 부딪쳤다. 그가 마른오징어를 쭉 찢어 내밀면서 “낙지 드시라오.”라고 했다.

“낙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거이 낙지입네다. 낙지가 뭐이 따로 있습네까?”
“이건 오징어 아닌가요?”
“오징어가 아니라 이건 낙지입네다.”
첫 금강산행에서 나는 오징어가 북측에서는 낙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일반적으로 알았던 ‘남측의 오징어를 북측에서 낙지라고 부르고, 낙지를 오징어로 부른다’는 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징어 낙지
낙지 서해낙지
갑오징어 오징어
북에서는 갑오징어처럼 뼈의 유무에 따라 ‘뼈가 있는 것’은 오징어, ‘뼈가 없는 것’은 낙지라고 한다. 표에서 보듯이 남측의 낙지를 북측에서는 ‘서해낙지’라고 부른다.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전 편찬과정에서 ‘도발적’이라는 단어를 놓고 북측 편찬위원들과 남측 편찬위원들 사이에 긴 논쟁이 있었다. ‘도발적’의 두 번째 뜻에 ‘색정을 자극하는’이 있는데, 여기에 북측 편찬위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인민생활에 해가 되는 비도덕적인 뜻을 사전에 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 의견은 일면 타당하지만, 일면 타당하지 않다. 실제 생활에서 존재하며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 싣지 않는 것이 언어학적으로 타당한가 아닌가의 문제로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은 긴 시간 논쟁했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물론 짧은 시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이 만나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서로 몰랐던 우리말을 서로 보태고 보태, 우리말의 풍경이 풍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겨레말큰사전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기를 하는 사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 찾은 겨레말을 통해 우리말이 풍부해지는 것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새로 찾은 겨레말을 가볍게 몇 단어만 살펴보자.
눈장마 [눈:장마] [명] 여러 날 계속하여 오는 눈, 또는 그런 현상이나 날씨.
자박눈 [자방눈] [명]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적게 내린 눈.
병아리잠 [명] 병아리처럼 쭈그려 앉아 머리만 까닥거리면서 조는 잠.
단어 하나마다 눈에 풍경이 그려진다. 겨울날 강릉 어디쯤이나 대관령에 눈장마가 내리는 풍경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병아리잠을 상상해보니, 괜히 웃음이 피식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네 글자에 불과한 단어지만 그 안에는 삶의 풍경이 오롯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은 일차적으로 어휘를 수집하고 간추리고 뜻풀이를 하는 일이지만, 인문학적으로는 삶의 풍경을 모으는 일이라고 하고 싶다.
겨레말큰사전을 만들기 시작한 지 어언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불행히도 그 중에서 9년이란 긴 시간을 남북의 편찬위원들이 마주 앉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분단체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2020년에는 부디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이 한 책상에 앉아 머리를 맞대며 우리 겨레가 사용하고 있는 ‘말의 오늘’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고, 논쟁하고 끝내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도상
정도상
소설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부이사장. 작품집으로는『친구는 멀리 갔어도』, 『실상사』, 『찔레꽃』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누망』, 『낙타』, 『은행나무 소년』, 『마음오를꽃』 등이 있다. 2003년에 단재상, 2007년에 거창인권문학상, 2008년에 요산문학상과 아름다운작가상을 받았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2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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