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로서의 교육
삶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개인과 사회, 그리고 시대는 모두 자신의 문제를 안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자신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해결해나가는 것이 좋은 삶의 조건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보면 사실 교육도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이다. 교육은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교육은 주체를 변화시킨다. 교육 이전과 이후의 주체는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문제해결 능력의 향상에 의한 주체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교육)철학의 몫이다.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아니, 바우하우스야말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바우하우스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새로운 독일의 탄생을 알린 바이마르공화국이 세워진 도시에서 역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꿈을 안고 등장한 디자인학교였다. 바우하우스는 서구 근대의 합리성을 디자인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그 자체가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과 동의어이자 신화가 되어버린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해결로서의 교육이라는 관점으로 바우하우스에 접근하고자 할 때 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행위능력을 어떻게 획득하고자 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기계가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가?” 바우하우스가 문제로 삼았던 것은 19세기 이래 서구의 많은 예술가가 던진 이 물음이었다. 이는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한 당대의 예술가들이 직면했던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의 근대는 정치혁명과 기술혁명에 기반한 것이었다. 정치혁명이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던졌다면 기술혁명은 그에 걸맞은 문화적 상부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중에서도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되는 제품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가는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미학적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수공업으로부터 기계공업으로의 이행에 대응되는 문화적, 미학적 문제로서, 곧 공예로부터 디자인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인공지능(AI)이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도전적인 물음이지만, 백여 년 전 서구에서는 ‘기계가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당대의 화두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모던 디자인이 탄생했다.
바우하우스가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바우하우스는 공예로부터 디자인으로의 전환을 위한 방법을 정식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저서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972)에서 바우하우스를 가리켜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바우하우스가 산업혁명이라는 하부구조의 변화에 일정한 형태(디자인)라는 상부구조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했기 때문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미러>(10.14.~11.30.) 전시 장면
‘거울’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한국 디자인에 비친 바우하우스를 살펴보았다.
미술교육의 혁신
바우하우스는 어떻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교육의 혁신을 통해서였다. 바우하우스는 서구 미술교육의 역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미술교육의 중심은 아카데미 방식이었다. 서구 미술교육의 역사는 크게 도제교육, 아카데미 교육, 바우하우스 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도제교육은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서 선생의 작업을 따라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을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서 배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투시도법(perspective)과 같은 객관적인 방법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여전히 모방(mimesis)이라는 교육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도제교육이 선생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아카데미는 작품(고전예술)을 모방한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바우하우스는 아카데미 방식을 폐기하고 대신에 기초과정과 공방교육(기술+조형)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바우하우스가 목표로 삼았던 종합예술인 건축교육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바우하우스는 이러한 단계적이고 통합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 중세적인 공예의 가치를 보존하는 한편 그것을 현대디자인의 문법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우하우스 교육의 특징을 통합과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표,
    기초교육(Vorlehre)으로부터 공방교육을 거쳐 건축(Bau)으로 수렴된다.

  •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내세운 포스터(1923),
    헤르베르트 바이어 디자인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변증법
기존의 아카데미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미술교육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바우하우스 교육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통합이다. 먼저 요하네스 이텐(Johanness Itten)의 기초과정(Vorkurs)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텐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교육자로서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장 먼저 초빙한 선생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미적 원리를 발견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방법은 세계 최초로 유치원(Kindergarten)을 창설한 유아교육 사상가인 프뢰벨(Friedrich Fröbel)의 은물(恩物, Gabe) 교육을 응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텐 자신이 바로 프뢰벨 교사 출신이었다. 19세기의 유아교육과 바우하우스의 기초교육을 연결해주는 것은 말하자면 낭만주의 사상인데, 낭만주의는 진리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다분히 주관주의적이고 반(反)합리주의적인 경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접근은 외부 세계의 모방을 목표로 삼았던 기존 아카데미의 객관주의적인 방법의 안티테제로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려는 바우하우스의 목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바우하우스는 다시 객관주의로 선회하였다. 1923년 그로피우스에 의해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 새 강령으로 채택되고, 바우하우스 교육은 현실의 객관적인 질서에 기초한 조형 원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요하네스 이텐이 떠나고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가 새로 들어왔다.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였다. 구성주의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거부하고 현대의 물질과 기술에 기초한 객관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예술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바우하우스는 주관주의적 기초 위에서 객관주의라는 상부구조를 얹으려고 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 하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디자인의 표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바우하우스는 내부에서 주관주의 미학과 객관주의 미학을 나름대로 종합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변증법, 주관주의로부터 출발하여 객관주의로 나아가는 전압 변환에서 바우하우스 교육의 특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바우하우스가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심지어 대립되는 방법까지도 활용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바우하우스로 상징되는 모던 디자인 역시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었다.
최 범
최 범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디자인]과 [디자인 평론]의 편집자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디자인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문화예술교육사 운영위원이며, 저서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외 다수가 있다.
diss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