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이 닥쳤거나 조짐이 보일 때 떼는 말부리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가 있습니다. 이때 말하는 옛말은 대개 입으로 전해온 말, 속담이지요. 옛말이라고 다 맞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속담을 진리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 확고부동한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속담은 경험칙에 불과합니다. 여기서는 맞지만 저기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요’지만 그래도 상황에 꼭 맞게 쓰면 그 말에 큰 무게가 실립니다. 쟤가 먼저 시비를 걸어 참다 참다 난 싸움인데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야’ 똑같이 혼내면 얘만 억울하지요. 그 상황에는 쟤한테 ‘사나운 개 콧등 아물 새 없단다’부터 시작해야 옳겠지요. 속담을 허투루 쓰면 입 구멍을 똥구멍 삼아 뀐 ‘말이야 방귀야’로 신뢰가 떨어집니다. 이번에는 내용이 좀 무겁지만 잘못 쓴 속담이 끼치는 폭력성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힘과 권위를 위해 제멋대로 쓰는 속담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꼰대입니다. 그리고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속담을 아무 데나 제멋대로 쓴다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다른 의견을 내거나 무리와 다른 복장과 행동을 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못마땅한 시선으로 혀를 찹니다. 그 옛날 자기 꼰대에게 들었던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립니다. 울퉁불퉁 모난 돌과 삐딱하게 모난 성격을 연결한, 간단한 비유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모나다’를 ‘튀다’로만 여깁니다. 이 속담에는 폭력도 담겨 있습니다. 돌 쪼는 ‘정’은 “정 그렇다면”처럼 ‘정말’ ‘진짜로’라는 부사 ‘정’과 동음이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굴다 진짜 맞는다’는 것입니다. 힘과 권위로 누르기 위한 전단계로 속담을 인용한 셈입니다.
여성들이 두 번째로 싫어하는 속담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입니다. 수십 년 전까지는 아무리 싫다 해도 “오빠가 너 찍었다?” 끈기와 패기로 결국 ‘내 여자’로 만드는 것이 남자다움이고 무용담이었습니다. 방송에 나와 지금의 아내가 마음에 들어 여관방에 납치해 자기를 받아줄 때까지 감금했다는 말을 떠벌이기도 합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고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지금은 그런 무식한 불법의 시대가 아닙니다. 여성은 소유할 대상도 찍어 쓰러트릴 나무도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아직 많은 남자들이 친구를 응원하는 말로 이를 호기롭게 권합니다. 스토킹은 범죄고 공포입니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면 도끼질은 분노로 바뀝니다. 폭력에 살해까지 벌어집니다. 이 속담은 한 번 올라가 수백 번 찍기를 열 번 올라가 한다는, 아무리 힘겨운 일도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싫다는 이성을 따라다닐 때 쓰는 속담으로 남았습니다.
그럼 여성들이 첫 번째로 싫어하는 속담은 무엇일까요? 바로 ‘북어와 계집은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입니다. 이 속담에는 매우 이기적이고 주먹이 먼저 나가는 강약약강(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남자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술은 사흘 걸러 한 번씩 마신 뒤 북어 패 해장해야 ‘뱃속’이 편하고, 아내는 감히 대들지 못하도록 사흘에 한 번쯤 푸닥거리해줘야 제 ‘마음속’이 편하다는 말이니까요. 아내를 때려도 장인이 모른 척하던 남존여비 시대에 만들어진 악질 속담이지요. ‘부부는 무촌’이란 속담처럼 부부는 위아래 없이 동등한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남자’라는 알량하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며 윽박지르고 손부터 올리는 ‘못 배운’ 남자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차별과 모멸이 담긴 속담
장애인 역시 차별과 모멸의 대상입니다. 친한 친구끼리 애정표현으로 쓰는 ‘병신’ ‘지랄한다’라든가 ‘육갑 떠네’ 같은 말은 사실 ‘장애인 주제에’라는 멸시에서 시작된 말입니다. ‘병신’이란 말에 ‘지랄한다’와 ‘육깝 떤다’가 붙은 속담이자 관용구의 준말이니까요. ‘지랄’은 뇌전증, 즉 간질병을 일컫는 말로 뇌 한 부분에 이상이 있어 멀쩡하다 발작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무는 증세입니다. ‘육갑’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0간(干)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갑(甲)이 되기까지가 1갑으로, 이것이 여섯 번 지난 60년 주기 환갑(還甲)으로 인간의 일생과 운수를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옛날에는 장님들이 생계수단으로 점을 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앞을 못 보는 대신 앞이 보이는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으리란 믿음이 옛날에 있어서, 맹인들에게 미래를 점치는 관직을 내리기도 했지요. 심봉사의 ‘봉사’도 그런 관직명 중 하나였다가 훗날 맹인을 높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착됐습니다. 그럼에도 제 앞도 못 보면서 남 앞가림을 해준다고 ‘오지랖 떠냐’는 뜻으로 ‘병신 육갑한다’가 만들어집니다. 함부로 해도 해를 못 끼치는 존재가 장애인이기에 쉽게 소재로 쓴 것이지요.
길거리와 차내, 온라인상에서는 욕 같지 않게 쓰는 수많은 감탄사와 부사가 ‘졸라’ 들립니다. 욕이란 원래 정신적인 피해를 주기 위해 하는 것으로, 실제로 싸우면 자기도 상처를 입으니 ‘욕배틀’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한 치 밀림 없이 패륜적인 욕을 할 수 있느냐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선망하는 싸움 기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욕에는 소재로 함부로 써도 될 존재들이 쓰입니다. 바로 장애인과 여성입니다. 그래서 상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빙신’과 ‘시발련’이라 부릅니다. 상대를 장애인이나 여성으로 취급해야 더욱 모욕이 되니까요. 속담에서도 정액 빛깔 ‘쌀뜨물에 밑 씻어 태어난 놈’이라고 하여 아비가 누군지 모른다 하거나, ‘개 후레(흘레) 자식’이라 하여 수간(獸姦)을 들먹여 어미의 몸가짐을 날조합니다.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한 웹툰 작가는 친근한 타박으로 ‘빙시나’를 말풍선에 넣습니다. 태어나보니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지위’인 사람은 어쩔 도리 없이 체념으로 살아온 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과부 설움은 서방 잡아먹은 년이 안다’는 속담이 차가운 시선 속 동병상련이라면, 동병이 아니더라도 상련 할 수 있는 것이 가슴 따뜻한 인권 감수성입니다.
가장 먼저 말에 배어드는 혐오
고양이를 모르던 시절, ‘고양이는 요물’ ‘키워봐야 집 나간다’ 심지어 ‘고양이가 아기 해코지한다’며 재수 없다고 죽이거나, 키우던 고양이를 버리라 강요합니다. 이런 무지의 혐오는 사회적 약자에게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수많은 범죄에 ‘새 발의 피’인 외국인 범죄를, 언론은 자극적인 대서특필로 공포 장사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질감을 뉴스로 안심하고 합리화하며 혐오로 드러냅니다. 공정한 세상을 외치는 이조차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만 불안한 이빨을 보입니다. 고려는 살생을 기피했기에 조선에 이르러 도축할 이가 적어집니다. 그래서 귀화 유목민 후예들이 그 일을 맡게 됩니다. 징그럽고 피비린내 나는 일을 대신해주어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음에도 천민의 신분으로 묶어두고 철저히 박대했습니다. ‘백정이 양반 행세를 해도 개가 짖는다’고, 노력해서 부자가 돼도 여전히 백정으로 취급했습니다. 3D 업종을 대신해주는 이 시대의 고마운 백정들은 누구일까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한나라 출신 관료가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자 훗날의 진시황은 축객령을 내려 타국 출신 관료와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라 합니다. 그러자 신하 이사(李斯)가 간언을 올립니다. “태산은 흙먼지와 흙덩이를 마다하지 않고, 하해는 시냇물과 강물을 가리지 않아 이루어졌다”며 미래의 인재를 내치지 말라 하지요. 이에 축객령을 철회하고 진나라는 결국 중국을 통일합니다. 로마 제국은 정복한 적국의 사람도 최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동등한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 이루어졌습니다. 다민족 다인종 미국처럼,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탉처럼 태어나 홰를 치는 암탉도 있다는 걸 모르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합니다. 동성애자로 태어난 걸 정신질환으로 여깁니다. 무지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가장 먼저 말에 배어듭니다. 속담에 혐오가 들어가면 욕과 다름없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제 밑(항문, 인성 밑바닥) 들어 남 보인다’는 속담으로 귀결됩니다.
김승용
김승용
우리말 탐험가. 익숙한 말이 늘 낯설어 재미로 골머리를 앓는다. 관용구도 시쳇말에서 건지려 밤낮 곰파고 있다. 10년에 걸쳐 『우리말 절대지식: 천만년을 버텨갈 우리 속담의 품격』을 썼으며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트위터 (속담) @madein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