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가진 정치적 지향성이 어떻든지, 어떤 취미와 사회적 위치를 가졌든지 상관없이 사회 모든 구성원의 공통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의 갈등과 혐오 그리고 차별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점점 더 훼손되고 조롱당하는 나와 당신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길은 없는 것일까?
2018년 전 세계를 대상으로 BBC의 글로벌 서베이(Global Survey)가 진행되었다. “당신은 당신과 배경, 문화,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관용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한국은 전 세계 조사 대상국 중 뒤에서 두 번째를 했다. 많은 사람이 조사 결과에 경악했으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단일민족주의’ ‘효율’, 그리고 ‘개발우선주의’ 등에서 우리의 다양성은 늘 가볍게 희생되어 왔다. 공동체의 생존과 경제발전 우선이라는 프로파간다 속에서 우리는 늘, 나와 공동체가 동일체인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속여야만 했다. 나는 당신과 같지 않으며, 다른 모습과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본질적인 다양성은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매우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이며 조직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왔다. 이렇게 켜켜이 쌓여왔던 우리 사회와 내면의 부조리들이 이제 더 이상 숨기고 갈무리할 길이 없어 왜곡되고 비틀린 형태로 이제야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착오적인 개발독재 시대의 단일주의와 사회 안정 우선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 혐오, 세대 간의 갈등, 특정 지역 폄하, 학교에서의 왕따와 따돌림 그리고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 문제에 있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등이 켜져 왔으나, 우리는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성별, 세대, 출신 국가, 성적지향, 장애, 외모 등 서로 다른 정체성을 향한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고 더욱 확산 강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함께 공존하자는 취지의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 활동마저도 공격받고 있다. 문화다양성 조례 제정이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한 차별 금지 조항조차도 무시하며, 문화다양성 조례 제정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며 조직적인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결국 지난 6월 「부천시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조례」는 상임위 통과 후, 본회 직전 자진 철회되고 말았다. 김해시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김해시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조례」가 9월 통과되었으나, 조직적인 항의로 몸살을 겪어야만 했다. 전국 각지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일들이 조례 제정뿐만 아니라 다양성과 관련된 활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와 차별은 조직화・세력화되고 있으며 그리고 일상화되고 있다.
혐오는 가정, 학교, 직장, 일상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그럼 혐오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차별이 넘쳐 나는 사회지만,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혐오가 넘쳐나지만, 혐오 표현을 한다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차별과 혐오를 확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러한 혐오를 생산하고 확산하는 일부 소수의 조직화된 집단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앞서 드러난 다양한 사례에서 보듯, 그리고 가장 최근에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평점 테러에서 보듯, 이들 모두는 우리가 오늘도 마주친 평범한 이웃 중 하나이다.
우리 모두 각자 양심과 선의에 의해 행동하지만, 사회는 혐오로 넘쳐난다. 내가 판단하는 선한 의지와 선량한 정신만으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오랜 세월 공고화된 획일적인 사회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왜곡하고 비틀어 놓아, 한국 사회 구성원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화되어있다. 적극적이고 빈번한 가해자 또는 확산자가 아니라고 해도, 혐오와 차별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일상에서의 문화다양성 활동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몇 년간 문화다양성 사업 컨설팅을 하면서, 마지막 만남에서 늘 “1년간의 문화다양성 사업을 통해서, 당신과 당신 조직의 문화다양성은 증진되셨나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문화다양성’은 사업이 아니라 가치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문화다양성을 새로운 사업의 형태로 여기고 나와 내 조직 밖에서 사업의 대상자를 찾아 헤매서는 곤란하다. 다양성은 나와 네가 속한 조직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또한, 문화다양성은 ‘문화예술 장르’의 다양성이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문화다양성이 예술의 완결성을 추구하거나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의 발전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정체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의 평등한 공존과 문화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성은 보편적인 권리 존중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인과 사회적 소수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성을 확산하자는 말은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해와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다양성의 증진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이 사회 모두가 역할과 위치에 따라 다수자이자 소수자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구성원 간 더 활발한 소통과 교류가 필요하다. 소문과 괴감 그리고 잘못된 정보로 형성된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직접 만나며 소통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길이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간에 더 많은 만남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선입견과 편견에 대항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제, 그동안 사회 안정과 효율이라는 암묵적 또는 명시적 압박 속에서 늘 희생되었던 나와 당신의 다양성을 되돌아보자. 새롭게 변신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양성은 순리이고 필연이지만 결코 공짜는 아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을 이루는 과정은 아름다운 꽃길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다양하지 않은 것이 있던가.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다르다. 아니 어느 무엇과도 다르며, 그 다르다는 점이 바로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며, 당신이 당신이라는 존재로 가치 있는 이유다.
메인사진 제공 _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완
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이주민인권과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 활동가로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leewan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