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교육’은 예술가를 양성할 수 없다.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는 필요 없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책걸상이 아닌 땀내 풍기는 삶의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참 많은 문장을 쓰고, 지웠다. ‘대학’ ‘예술’ ‘교육’ 각각의 단어만으로도 할 말이 참 많은데, 이들이 뒤엉켜 있으니 참 난감하다. 예술대학이 커리큘럼을 개선하면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대학 교육으로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틀렸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와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대학은 우리 사회의 차세대를 양성한다. 예술대학은 ‘예술계’ 차세대를 양성하는 보고다. 이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술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예술가’에 대한 시시비비가 벌어진다. 이런 담화는 대부분 무대 뒤에서 발생한다. 최근 들었던 말 중에 앙금처럼 마음에 가라앉은 문장이 있는데, ‘은 예술가 마인드가 있어서 돈을 적게 줘도 된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응? 그런 맥락이라면 예술 노동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예술가답지 못하다는 걸까? ‘진정한 예술가’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시시비비에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내포되어 있어 흥미롭다.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의에 따라 ‘예술가’의 범위는 달라진다. 하지만 어떤 방향이든 그 담화의 끝은 언제나 떫다. 예술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네가 예술가냐?’라는 질문은 결국 각자에게,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다양한 현장과 사람을 경험하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예술가들의 활동 범위, 사회, 생태계. 수요와 공급 법칙이 작동하는 시장. 예술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그대 환상 속에 존재하는 천재 ‘예술가’는 잠시 덮어두자. ‘예술인 증명’이 되는 사회적 존재, 제도 안에 있는 예술계 종사자, 바로 나 그리고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예술계’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다소 씁쓸하다. 권위 있는 어워드의 작품이 그다지 감명 깊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관객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학, 영화, 공연예술과는 달리 유난히 창작 과정이나 유통 과정이 불투명한 시각예술 분야이기에 궁금했다. 현대미술은 화법이 있다. 그 화법에 흥미를 느끼는 대중은 아직까지는 많지 않다. 하지만 예술계에서는 그 화법을 파악하고 잘 구사하면 인정받는다. 시대정신, 작품 제작 레퍼토리, 감각적 표현 능력, 전시 경력, 레지던시 입주 경력, 창작지원금 집행 경력, 출판물, 담론 형성, 소통 능력 기타 등등. 어워드는 문화예술 제도를 잘 활용하며 누적되는 사회성, 예술계 기여도에 따른 보상인 것이다. 시각예술 생태계를 유지하는 힘이자 동력이다.
예술대학에서
미술대학은 대부분 작가 양성 수업을 한다. 현대미술 화법은 대학에서 배웠다. 실기 수업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교수님과 주로 의논하고, 주어진 기간에 작품을 완성해서, 동기들 앞에서 발표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크리틱(critique, 비평)’으로 마무리된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기억나는 것은 이것뿐이다. 사실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학점 제도부터 이상했다. 권력 구조는 불편했다. 예술대학에 예술이 없었고, 학교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었다. 현실 감각이 없었던 스무 살이 느끼기에 대학은 온통 부조리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기성 제도일 뿐이었다. 알고 보니 더 넓은 부조리한 세상의 집약이었지만. 아무튼 아이러니다. 미술학원, 예술고등학교와 조형예술대학의 수많은 동창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여 년째 종사 중인 예술계 현장에서 동기를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여전히 아웃사이더인 까닭일까. 이것은 나만의 현실인가 혹은 예술계의 현실인가.
분명한 것은 예술대학이 예술계 차세대를 양성하는 보고로서 그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을 생각해보건대 단조로운 커리큘럼이 한몫을 한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활동 범위마저 무한대다. 현대의 작가들은 프로듀서에 가깝다. 현장에서는 작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curator, 전시기획자), 평론가, 컨서베이터(conservation, 손상된 미술품 치료와 보존복원), 아키비스트(archivist, 기록물 관리 전문가), 에듀케이터(educator, 교육기획자), 디자이너, 출판, 홍보 등 수많은 역할이 필요하고 너무나 중요한데,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다. 대학에서 좀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커리큘럼으로 각 분야를 간접 체험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또 문화기획자, 정책수립자, 기자 등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 가능성을 제시해준다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업할 기회가 좀 더 주어진다면?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왜,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역사적 존재로서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문학적 사고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대학 평가 항목에 ‘취업률’이라는 잣대가 등장한 것으로 모든 것은 요약된다. 대학 당국이 등록금을 벌기 위해 우후죽순 만들었던 예술대학은 ‘취업률’이 낮아 잇달아 구조조정 당했다. 대학 교육은 사회 전반에 대한 장기적 발전 계획, 국가 정책과 맞물려 있다. 더불어 예술과 교육에 대한 철학과 그것을 실천하는 현장의 주체가 바뀌어야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텐데, 참, 만만치 않다.
예술이 밥 먹여주는 시대를 만들자
내 마음은 여전히 스무살 청춘이지만 어느덧 15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왔기에, 예술대학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지금 그 현장에 발 딛고 있는 이들의 몫이라 생각된다. (내 멋대로) 후배들은 어떤 갈증과 고민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나의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을 말하고 싶다.
제도를 바꾸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있는 모든 법과 제도에는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대체로는 상반되는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이 동반된다. 예술대학은 하나의 생태계로서 예술계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예술대학의 변화는 예술계의 변화이고, 예술계의 변화는 예술대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대는 급변하고 사람들의 문화적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 예술가는 당연히 배고픈 시대는 끝났다. 이제, 예술이 밥 먹여주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후배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작업 중인가? 그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자. 그것은 예술계 종사자로서, 생계를 위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문화 행사를 개최하는데 콘텐츠가 필요한가? 그럼 합의된 대가를 지불하자. 재능기부? 100%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지 말자.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요구하는 사람도, 눈치 보며 그에 응하는 사람도 나쁘다. 무임금, 저임금 노동은 그 가치를 저평가하는 풍토를 형성하며 모두에게 독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우리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기초생활이 보장되어야 생명력 가득한 작업을 할 수 있다. 예술계 종사자들 스스로 각자의 능동적, 창조적 성격의 노동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지불해야 한다. 더 나은 예술계를 위한 순간의 용기와 실천이 나 자신을 그리고 모두를 지켜낼 수 있다.
박민희
박민희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철학하는 예술가’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2015년 ‘22회 제주4.3미술제’를 계기로 한국현대미술사 연구에 관심 갖게 되었으며, 2017년 제주로 이주했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시각예술과 관련된 글쓰기 실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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