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군민 주(株)’로 창간한 [옥천신문]은 지역에서 또 하나의 ‘작은 권력’이 아닌 ‘조그만 징검다리’ 노릇을 하는 주민들의 공론장 구실을 톡톡히 한다. 편집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구현하며, 지역 주민들이 ‘우리 신문’이라고 생각하는 지역 언론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창간 30주년을 맞은 [옥천신문] 제작실장인 황민호(필명 권 단) 선생을 만나 지역에서 공론장이 왜 중요하고, 로컬 지향의 ‘커뮤니티 저널리즘’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역이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지역은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여러 기반이나 제도가 미흡한 부분이 많은 실정이다. 자기소개를 겸하여 [옥천신문]에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말씀해달라.
원래 나고 자란 곳은 대전이다. 대전에서 쭉 대학교까지 다녔다. 옥천은 지명(地名) 자체를 잘 몰랐다. 언론정보학과를 나와 기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여러 신문사에 응모했는데 떨어졌다. 그 당시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를 인상 깊게 읽었고, 그런 가치가 나와 잘 맞는다고 느꼈다. 아나키즘 관련해서 푸르동, 바쿠닌 등 여러 책을 읽으면서 지역, 로컬로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장호순 선생의 『작은 언론이 희망이다』 이런 책도 보면서 지역신문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경로당 할머니 이야기도 듣고 손도 잡아드리고 밥도 먹는 로망을 품었다. [옥천신문] 채용공고가 났을 때 원서를 냈고, 시내버스 타고 면접을 왔는데, 옥천신문사가 어디냐고 했더니 사람들이 다 알더라. 2: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역신문 기자로 활동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다.
[옥천신문]은 여느 지역신문과 어떻게 달랐나?
대학 동아리 같은 느낌? 그전에는 기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정보 빼낸답시고 룸살롱 가고…. 그런데 여기는 너무 다르더라. 젊은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무엇보다 피드백이 바로바로 온다. 신입기자 누가 나왔습니다, 하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다 안다. 기사를 쓰면 그 기사 잘 봤다고 하고, 상가에 가보면 신문에 빨간 줄이 쳐져 있다. 일주일 동안 신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는 거다. ‘야, 여기서는 함부로 쓰면 큰일 나겠다’ 생각했다. 여기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지역신문이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 체감했다. 5만 명의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 지역신문에서 일하는 것에 만족하고 옥천 사람이 되었다.
영향 받은 사람들 명단을 들어보니 그런 지향이 있었던 것 같다. 창간 30주년을 맞는데 창간 초기와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한겨레신문]이 1988년에 태어났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우리가 얻은 것 중 하나가 지역자치이다. 그전에 지역에는 이미 자치와 자급의 물결이 있었다. 같은 해에 지역신문의 효시 격인 [홍성신문]이 제일 처음 창간했고 그 이듬해 들불처럼 지역신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매체의 주재 기자들이 대부분 광역시에 있어서 시골에는 안 온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줘야 하는데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처음 10년 정도는 어려웠다. 내가 [옥천신문]에 들어간 시점이 확장할 시기였다. 그 이후로는 월급은 밀리지 않았다. 지금은 취재기자만 10명이다. 지역신문의 경우 구독료보다는 광고, 이벤트 같은 그 외 사업에 치중하게 된다. [옥천신문]은 오로지 신문만 했다. 구독료와 광고료가 [옥천신문] 재원의 전부이고 4,000명의 유료 구독자가 있다. 올해 타블로이드 20면, 40면으로 매주 60면에 옥천의 모든 콘텐츠를 끌어낸다. 30주년을 맞은 올해는 [옥천신문]이 선택이 아닌 ‘필수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풀뿌리 신문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옥천신문]은 선거 기간에 모든 발언을 기록한다. 지방의회에 가면 우리 기자 한 명뿐 아무도 없다. 그러나 기자 한 명이 있음으로써 그들은 긴장한다. 지금은 빠듯하게 운영하지만 지역의 공공재로서 [옥천신문]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어서 주민들이 나누어 가졌으면 좋겠다.
[옥천신문]이 30년 동안 간판이 잘 붙어 있고, 주민들이 구독료를 내고 보는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옥천신문]만의 영업비밀은 무엇인가.
일반 언론을 ‘세상을 보는 창(窓)’이라고 많이 한다. 지역신문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창은 밖의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이지만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 언제부터인가 옥천신문사에 입사하면 옥천에 살아야 한다. 여기 같이 살면서 우리의 삶을 우리가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눈 팔지 않는다. 언론은 철저하게 민(民)의 영역이다. 민의 영역에서 잘 건사되는 언론이 있다면 주민들의 목소리가 잘 전달된다. 어려워도 지역신문이 지향해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광고 팔고 이벤트 하는 유혹이 왜 없었겠나. 그렇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했다. 어떤 분이 고추 농사 잘되었다고 취재 오라고 하시면 우리는 간다. 그러면 취재 갔다가 또 고추를 사 온다. (웃음) 호랑이 발자국 취재, 황금 미꾸라지 취재, 대왕 고구마 취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높아진다. 의식이 있어서 신문을 보는 것이 아닌 필부필부가 ‘내가 보고 싶어서’ ‘필요해서’ 보는 것이다.
농촌이 박제화되는 것이 문제다. 언론에서 농촌을 다루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 번째는 정겹고 아름답다 하는 <전원일기> 풍이고, 또 하나는 시혜와 동정의 키워드, 다른 하나는 공포와 불안이다. 영화 <이끼> 같은 마을인 양 다룬다. 한편 도시민들의 소비와 기호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청호만 봐도 사람들이 호수만 보러 온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물을 더럽히지 않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본다. 철저히 대상화하는 시각이다. 바뀌어야 한다. 영화 <이장과 군수>에는 농촌을 희화화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신문 방송에 노출되는 사람 중에 군(郡) 단위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옥천은 자급과 자치에 관한 문제의식이 여느 지역과는 남다른 것 같다. 공동저자로 참여해 출간한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삶창)를 보면 그런 활동이 매우 활발한 것 같다. 옥천의 자립경제를 위한 토대는 무엇이고, 그런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하나.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에서 ‘일상의 코뮌(commune)’을 말한 적이 있는데, 주민들과 ‘옥천 코뮌’을 만들고 싶다. 우리의 정치는 ‘체계’의 정치에 매몰되어 있다. 운동을 하려면 누구 하나를 당선시켜야 한다고, 그래야 바뀐다고 길들여져 있다. 관계가 체계에 억눌려 있다. 주민이 주인이라면 우리가 군수, 시장을 부려먹어야 한다. 옥천도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하고,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평생 살 것이니 바뀔 때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옥천신문]과 함께 30년 동안 그런 생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말이 정치고, 먹는 게 경제이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옥천신문]을 만들었고, 농민운동을 하던 옥천 농민들이 마음을 모아 옥천살림을 만들었다. 옥천군 농민회는 지역 농정을 설계하는데 농민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6년간 투쟁해서 ‘옥천군 농업발전위원회’란 거버넌스 조직을 얻어냈다. 옥천군농업발전위원회란 공론장에 참여한 농민들은 회의비를 모아서 스스로 학습했고 견학을 가며 스스로의 의제를 만들었다. 학교급식과 공공급식이 이런 토대위에서 나왔다. 예전엔 옥천에서 지역 농산물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다. 도시가 빨아들이는 것이다. 옥천은 공급처, 서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옥천에서 농민 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런 물길을 바꾼 것이다. 농민회원을 했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옥천살림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옥천살림이 위탁 운영하는 옥천 로컬푸드 직매장에 이제 옥천의 농산물이 채워지고 있고, 지역 농산물이 학교 급식 재료로 들어가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 [옥천신문]은 읍지역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이 처음 도모했던 것 같고, 옥천군 농민회는 면지역 사회주의 지향을 갖고 있는 분들로 시작했던 것 같다. 글과 말의 정치, 그리고 먹을거리의 경제가 서로 교차하며 광의의 옥천 그물망을 만들고 있다. 빠르게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옥천의 운동방식이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특별할 것 없는 운동으로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고 번지는 방식이다.
대체로 행정이 주도하고 재정이 투입되는 거버넌스 방식은 겉으로 보면 잘 되는 것 같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이 점에서 안남면 배바우작은도서관 설립과 운영은 전혀 다른 방식의 협력·협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안남면의 경우, 2002년 어머니학교를 열었다. 글을 몰라서 버스 타기, 은행일 보기 등이 어려운 어르신들이 많았다. 안남 어머니학교를 만들어 홍보를 했더니 80명이 모였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배움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방학과 졸업 없는 학교를 원하셨다. 학교 가는 날이 쉬는 날인 것이다. 어머니학교 학생 스스로 학생회비를 2∼3천 원 씩 모아서 김치냉장고를 사고, 김장을 하시고, 밥을 해 드신다. 본인들끼리 소풍도 가고 학예회도 하신다. 농촌에서 가장 약자였던 분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관공서 옆에 가기 싫어하셨는데, 이제는 당당히 가신다. 가방을 둘러매고 학교에 가면서 목소리가 커지고 당당해지셨다.
배바우작은도서관 사업이 확정되고 2억 원의 사업비, 건축비가 생겼다. 농협에 이야기해서 건물 부지를 영구 무상 임대하도록 주민들이 설득했다. [옥천신문]에 작은도서관 사례를 연재했다. 농협-군-도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운영은 직접 주민들이 한다. 주민들의 공론장인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이제 각 지역에 민회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안남면은 2007년부터 일찍이 민회 구실을 한 지역발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금강유역환경청에서 하류지역 주민들이 내는 물이용부담금의 재원으로 만들어진 주민지원사업비가 마을마다, 집집마다 배분되었는데 주민들은 2007년 이 중 일부를 면 지역 발전을 위해 쓰기로 하고 논의기구인 지역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12개 마을 이장과 추천 주민 1명씩 총 24명과 16~17개 단체의 대표들, 가령 체육회, 적십자회, 새마을회 등 단체들이 비례대표로 들어와 구성되었고, 여기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논의를 진행하면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지 않나?
한 번은 모 방송국에서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를 취재하러 왔었지만 방송되지 못했다. 그때 내부적으로 갈등도 있긴 했지만 방송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우리가 상상하는 민주주의가 달랐던 것 같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큰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을 싫어하고 빨리 추진하자면 그런 사람을 제외시키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을 제외하면 그런 다른 사람이 또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아우라가 있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를 제외하기 시작하면 모두의 합의가 아닌 자기들끼리 결정한 것이 된다. 끌어안고 모두가 모인 그곳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멸균하지 않은 생막걸리 같은 것이다. 몸에 좋은 균도, 그렇지 않은 균도 있어야 맛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엘리트 방식의 수직적 위계주의 같다. 간부를 뽑고, 간부가 이야기하고, 투표해서 결정한다. 그런데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의견을 모아내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 결정되어 있는 안이 아닌 여기서 나온 안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체계’와 ‘관계’라는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보충성의 원리는 효율성을 숭배하는 체계의 힘에 의해 실종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참 무섭다. 예를 들어 자동응답시스템(ARS)은 효율을 빙자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소수자를 배제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잘 보여주지 않았나. 효율을 빙자한 이런 것들이 많다. 다수결이 그런 면에서 참 위험하다. 다수결보다는 합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다수결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것이다. 아직 멀었다.
자치와 자급을 추구하면서 자족(自足)에 갇히지 않겠다고 언젠가 발언하셨다. 로컬의 미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자치와 자급은 굉장히 중요하다. 공생, 상생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서로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수자가 없는지 주변을 살펴봐야 한다. 10년 정도 기자 생활을 했으니 옥천의 웬만한 곳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 기자를 쉬고 로컬푸드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가지 못했던 곳을 가게 되고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령처럼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우리는 살면서 매번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하느냐가 개인의 정치이다. 우리가 쓰는 돈이 우리의 경제다. 각자의 정치와 경제는 어떠한가.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 도와야 하는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른바 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은 되어야 한다. 옥천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유지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역피라미드형 인구구조가 아닌 청년들도 있고 미래가 있는 종형 구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네덜란드에는 10분, 20분만 걸으면 도서관이 나온다. 면 단위에도 그에 맞는 영화관, 수영장, 공연장이 필요하다. 지금 예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농촌의 사막화가 무섭다. 지금 이 시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면 단위 지역공동체를 살려야 한다. 체계에 생활세계가 복속되지 않고, 스스로 생활세계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천지개벽은 한순간에 누군가에 의해 한 번에 건설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함께 바꾸는 것이다.
황민호
황민호

[옥천신문] 제작실장. 옥천 사람. 18년 동안 옥천에서 살았고, 옥천에 사는 것이 재밌고 즐겁다. [옥천신문]에서 줄곧 일했으며 ‘옥천살림’ 트럭 운전사로 공공 급식 배달 기사 일도 한 바 있다. 차별과 위계 없이 사람들과 어울렁더울렁 재미나게 사는 대동 세상을 꿈꾼다. 지역 곳곳을 쏘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옥천 사람들의 짧은 인터뷰를 페이스북에 올리는 ‘#옥길만사’를 하고 있다.
사진 _ 박영균 미디어작가 infebruary14@naver.com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