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열거하는 작가/비평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블레이크, 디킨스, 매슈 아놀드, 리비스, 프란츠 파농, 리처드 라이트 그리고 이시무레 미치코……. 당신이 문학에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창작과 비평을 해온 작가들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영어권 작가를 비롯해 불어권(프란츠 파농)과 일어권(이시무레 미치코)을 아우르는 위 작가들을 어떤 하나의 공통의 특질로 묶어낸다는 것은 여의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위의 목록이란 자신의 삶과 문학을 통해 온몸으로 ‘삶-생명’을 옹호해 온 작가들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1991년 우리 사회에 이른바 녹색 담론을 처음 제창하며 28년째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하고 있는 격월간 생태잡지 [녹색평론] 창간과 발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었다고 말한다.
  • 김종철 문학론집 『大地의 상상력』(녹색평론사)
  • 격월간 [녹색평론](녹색평론사)
“모든 시인은 생태주의자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삶-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1991년 창간(11/12월호) 이후 생태잡지 [녹색평론]은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를 전하고자 했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녹색평론]은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라는 창간사에서 사회적·인간적·자연적 위기로서의 생태학적 재난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선언하며 지금까지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창간 이후 ‘모든 시인은 생태주의자다’라는 점을 역설하며, 시(詩)를 비롯해 이반 일리치, 리 호이나키, 더글러스 러미스처럼 깊은 생태학의 가치를 내장한 글들을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생태적 지속불가능성을 성찰하며 ‘에콜로지(ecology)’의 가치를 적극 옹호해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녹색평론]은 여느 환경운동 잡지가 아닌 셈이다. 이와 같은 [녹색평론]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판에 사유와 행동의 ‘젖줄’ 구실을 했으며, 성장중독의 우리 사회에 ‘탈성장’ 사회로의 전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김종철 발행인이 『大地의 상상력』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는 것은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으리라.
“[녹색평론]은 이른바 ‘발전’ 혹은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인간 생존의 사회적·자연적 토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체의 움직임, 논리, 사고, 제도, 관행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왜 우리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大地의 상상력』은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통해 삶-생명을 옹호해온 작가들에 관한 에세이 형식의 문학론집이다.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를 다룬 글을 제외하고는 김종철이 30∼40대 소장 영문학자로서 문학비평가로서 활동하며 쓴 글을 모았다. 주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창작과비평]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쓴 글들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프란츠 파농과 리처드 라이트를 다룬 글들에서 우리나라 담론 시장에서는 처음으로 ‘제3세계 문학론’을 제창하던 소장 영문학자 김종철의 글에 내장된 발표 당시의 힘 있는 문체(style)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이 지금 읽어도 강렬한 온도로 그대로 전해져온다는 점이다. 삶-생명을 옹호해온 작가들이라는 기준으로 위에 언급한 작가들을 하나로 묶으니까 오히려 더 명료해지는 효과가 있는 셈이랄까. 그리고 문학의 문학됨은 과연 무엇이고, 인간의 인간됨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자답하며 자신의 삶과 문학을 통해 활동해온 7명의 작가를 비롯해 문학적 사유와 성찰로 김종철이 문학적 사고 습관을 기르고 감수성을 형성했으며, 이런 바탕 위에서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발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大地의 상상력』에서 내 눈길을 끈 작가는 단연 영국 시인 블레이크였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블레이크는 인간 불평등을 합법화하고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영국 ‘국가종교’의 위선과 허위를 철저히 폭로한 시인이다. 1965년 영문과 신입생 시절 김종철을 ‘시적 충격’으로 이끈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같은 작품은 비판적 상상력의 생생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 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그런데 김종철은 블레이크 시의 진짜 묘미는 시인이 반특권·반사제주의를 공유하는 당시의 ‘비공식적’ 급진적 민중문화의 전통을 대변하고자 했으며, 자기 시대의 ‘예언자적’ 입장을 잃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 있음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특히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라는 시적 표현에서 보듯이, 블레이크는 이른바 산업화 시대란 “생명의 기술을 죽음의 기술로 바꾸어놓는”(『예루살렘』) 시대이며, ‘소외된 노동’을 전면화하게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 점이라고 꼽는다. 무엇보다 당대의 산업화 논리에 맞서고자 한 블레이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지성적으로’ 노동하는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블레이크 문학에 대한 김종철의 이러한 분석은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1854)을 비롯해 비평가 매슈 아놀드와 R. 리비스의 비평을 분석할 때에도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이 점에서 ‘우애’의 가치를 역설하고, 민주적 노동이 실현되는 인간적 공동체를 향한 일종의 사유의 원형질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리라. 김종철은 『어려운 시절』의 경우 디킨스가 평민(平民)적 성향을 드러내며 당대의 공리주의 철학에 맞서 특유의 민중성을 잘 구현했지만,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 노동자 계급의 출현을 ‘예견’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흥미 있는 인물은 또 있다. 20세기에 활동하며 ‘비정치적 문화주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맞서고자 한 비평가 리비스이다. 김종철은 리비스는 공리주의 전통을 비판하며 농업 중심의 공동체라는 하나의 척도를 제시하고자 했으며, 삶의 옹호자들이라는 관점에서 ‘블레이크-디킨스-로렌스’로 이어지는 영문학사의 전통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업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R. 리비스 또한 영문학사에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다시 말해 인문적 상상력의 효용을 주장한 매슈 아놀드의 비평 정신을 잇는 동시에, 현대 문화이론에서 여전히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R. 윌리엄스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좋은 문학’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
『大地의 상상력』에는 이 밖에도 소장 영문학자 시절 김종철의 예리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글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식민지 출신 정신과 의사로서 알제리 혁명에 참여한 이후 식민지 사회 내부의 ‘수평 폭력’의 문제를 성찰하고,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재발견을 통해 지식인과 민중이 상호작용하며 민중 스스로 ‘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프란츠 파농 사상에 대한 해설은 지금 읽어도 명쾌하다. 훗날의 파농이 지방분권화를 주장하고 참여민주주의를 역설하는 사상적 맥락의 의미를 나는 이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의 삶과 문학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해정토’ 3부작인 『슬픈 미나마타』 『신들의 마을』 같은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이시무레 미치코는 세계 최초의 공해병인 1950년대 미나마타병(수은중독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학적 증후군-편집자주)에 걸린 환자들을 집요하게 취재하며 작품화한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병석에 누워 있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이 자신의 어부 시절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란 작가가 환자들 내면의 심층으로 육박해 들어가 순전히 그들 편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어쩌면 ‘불행한 의식’이 없었더라면 그런 작품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김종철의 언급을 수긍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래서 ‘미치코 방언’을 구사하는 이시무레 미치코야말로 근대의 주술사(=무당)일 것이라는 설명은 논박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大地의 상상력』은 ‘좋은 문학’은 무엇이고, ‘좋은 사회’는 무엇이며, 그 둘 사이의 관련 양상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디킨스, 리비스, 리처드 라이트, 프란츠 파농 같은 삶-생명 옹호자들의 텍스트에 내장된 공리주의에 대한 어떤 태도가 나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첫 부분에 나오는 유명한 초등학교 교실 장면에서 ‘사실과 계산의 인간’인 공리주의자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아이들에게 “말[馬]에 대해 정의해보라”고 한 질문하며 ‘절대 여러분은 상상하지 말라’고 강변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의 산업체제와 교육체제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소설 속 코크타운의 풍경은 지금, 여기 신자유주의 시대 대한민국 현실과 얼마나 먼 것일까.
블레이크는 어느 시에서 “장사꾼이 농부의 고생을 어떻게 알겠는가? / 그들의 눈과 귀는 얼마나 다른가”라고 썼다. ‘장사꾼’으로 대변되는 속물 자본가 내지는 공리주의자들이 득세하는 당대 영국의 현실에서 ‘농부’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건강한 삶-생명을 옹호하고자 한 것이리라. 이 점에서 “좋은 문학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345쪽)고 말하는 김종철의 주장은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쉽게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좋은 문학을 이루는 문학(예술)적 사유와 감수성의 토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였을까. 『大地의 상상력』을 읽는 내내 시인 김수영이 1960년대에 쓴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1967.7)라는 글의 한 대목이 계속 뇌리에 떠올랐다. “인간이 없는 정치, 사랑이 없는 정치, 시가 없는 사회는 중심이 없는 원이다. 이런 식의 <근대화>는 그 완성이 즉 자멸이다.” 우리는 자멸의 근대화가 아니라 ‘다른 근대’의 길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문학(예술)의 유구한 테마인 ‘삶-생명’을 적극 옹호해야 한다. 내가 [녹색평론]을 읽는 이유이다.
이미지제공 _ 녹색평론사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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