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삼척 도경분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이후 지금까지 나고 자란 양양군 일대의 오색초등학교, 공수전분교, 상평초등학교 등을 거쳐 지난 3월 바다가 보이는 양양 조산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탁동철 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닭장을 짓고 운동장에 논을 일구고 텃밭을 일구는 등의 교육 경험을 살려 『달려라 탁샘』(2012)과 『하느님의 입김』(2017)을 출간하고, 아이들이 쓴 어린이 시를 모아 『까만 손』, 『얘들아, 모여라 동시가 왔다』를 출간하는 야생의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이 쓴 시는 자연이 키워준 자신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시가 특징적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코딩 교육을 강조하는 이때 아이들 고유의 야생성을 끌어내는 문화예술교육은 왜 필요한지 들어보았다.
지난해 강원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잇다]에 발표한 「야성이 꿈틀거리는 강원예술」을 인상 깊게 읽었다. 뭘 안 가르치고 안 배우니까 야생(성)이 살아났다는 이야기였다. 글을 보며 ‘가르치는 손을 감추는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러한가.
자기 일이면 열심히 하고, 남이 시키는 일은 뒤로 빼려 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하려는 일을 어른이 곁에서 도울 뿐이라는 태도는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학교는 교장이 훌륭하고 의욕 넘칠수록 죽은 학교가 되는 것처럼, 교장이 앞에서 끌면 어떤 교사도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는다. 누구도 스스로 나서지 않고 교장이 시키는 일에만 반응하는 학교가 될 뿐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친절하고 훌륭하고 잘 가르치려 들면 아이들은 멈춘다. 열정적으로 나서는 교사의 판단에 자기를 맡길 뿐이다. 씨앗이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내리누르는 흙을 뚫고 싹을 내밀고, 중력에 저항하며 줄기를 위로 올리고, 감싸고 있는 몽오리를 헤치고 꽃잎을 여는 모든 성장의 과정은 저항의 연속이다. 아이들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저 스스로 자기를 키워내는 힘이 있다. 나무마다 풀마다 자라는 속도가 다르듯, 아이들은 각각 다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자기를 키워내고 있다. 부딪히고 깨지고 저항하며 자란다.
2012년 내신 『달려라 탁샘』을 보면 초임 시절 교사와 지금 아이를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와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계기가 있나?
전에는 모든 걸 선생이 더 잘 알았다. 연예인에 관한 것까지도. 지금은 평등하다. 선생이 더 아는 분야가 있고, 아이들이 더 많이 아는 분야도 있다. 아이돌 그룹서부터 게임, 유튜브 보는 법, 개 키우는 법, 만화·핸드폰 조작 따위는 선생이 아이들한테 못 미친다. 선생이 게임이라든가 아이돌 그룹을 아는 게 있으면 오히려 아이들이 칭찬한다. 선생님 똑똑하다고. 이젠 시대가 바뀐 거다.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목표를 향해 함께 나가려면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수평으로 가자고 마음먹은 계기는 글쓰기, 문학 토론, 연극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면서 확신이 생겼다. 글쓰기를 하며 아이들이 자기 말을 하게 된다. 내 생각대로 함부로 아이들을 대하지 못한다. 문학 토론을 하면서는 아이가 하는 말을 통해 들을 말이 많다. 놀랍다. 내가 못 본 것을 본다. 함께 가는 동지다. 연극의 경우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야 한다. 지시하는 걸로는 연극이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만의 교육철학은 뭔가?
관점이 중요하다. 어디를 보게 할 것인가, 눈길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가가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 없는 사람, 생명, 자연, 이게 소중하다는 것, 이런 것 안 놓치고 살아가도록 부추긴다. 눈에 안 보이게. 그리고 관심을 갖게 한다. 아이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이지만, 자연에 그대로 둔다고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짝 다가갈 수 있도록, 그것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하며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사의 일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이미 들여놓은 것만 보이고 들린다. 마음 안에 나무와 새와 바람과 벌레를 들여놓아야 자연 속에 나무가 서 있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벌레가 기어가는 것이 보이고 들린다. 나무가 있고 새가 울어도 그것이 마음 안에 없으면 안 보이고 못 느낀다.
선생님께 영향을 미친 시인이나 선생님이 있다면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떤 각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애쓴 사랑』을 쓰신 황시백 선생님이다. 진정을 찾아가는 사람, 진정이 아니면 못 견디는 사람, 그 마음이 진짜냐, 그게 사랑이냐, 거기에 목숨 거는 사람이다. 다른 한 분은 『탄광마을 아이들』을 쓴 임길택 시인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땅, 아이들의 생활에 꼭 붙어 있었던 사람이셨다. 임길택 같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시 교육을 비롯해 문화예술교육을 아이들과 함께할 때 어떤 자세와 접근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할까?
너무나 하고 싶게 부추기는 것이 필요하다. ‘써라.’ 이건 시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쓰지 마라’가 시 교육일 수도 있다.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이 좋아지면 그것에 온통 자기를 내놓게 된다. 사랑하는 이한테 마음을 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듯이. 시 쓰기 시간이라고 시를 쓰게 하고, 바이올린 시간이라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하는 것은 제대로 된 문화예술교육이 아니다. 시 쓰기 시간이니까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고, 바이올린 시간이니까 시를 데려올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어떤 정해진 ‘방법’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이란 것을 깨부수는 것 또한 방법이다. 음악, 시, 춤, 미술, 그 무엇이라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것을 향해 자기 마음을 열게 되고, 자기를 보여주고 싶고, 그러면 자기표현이란 것이 나온다. 방긋 웃음을 짓거나, 꽃을 꺾어 바치거나, 심정을 고백하거나 자기만의 표현을 갖게 되고, 그 표현이 곧 자기 자신이 된다. ‘표현’ 속에 자기가 있고, 표현이 자기를 서 있게 하고, 표현이 자기를 딛고 나아가게 하고, 표현으로 세상과 만나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학교 들어오는 예술강사는 ‘좋아하고 사랑하게 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학교에 들어오면 가르치기부터, 알려주기부터 한다.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사랑’이란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학교’를 주로 골라 다니셨는데 작은 학교의 불편한 점은 없나?
큰 학교만 찾아다녔다. 양양에는 큰 학교가 없을 뿐. 양양 읍내에 큰 학교가 하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 시골 학교 아이들 모두 끌어가는 것이 꼴 보기 싫어 안 가려했다. 아이들의 가장 큰 스승은 ‘친구’다. 친구 말속에 지혜가 있고, 길이 있고, 하늘의 음성이 있다. 교사는 ‘친구 말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너무 적으면 길이 되어주는 친구가 적다.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적다. 교사의 입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가?
자유, 나는 나, 나는 세상 물결에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사랑을 진실을 자유를 참스러움을 따를 뿐이다, 하는 것이다. 음악을 잘하면 음악가, 공부 잘하면 좋은 직업, 이건 아니다. 음악 잘하면 자유인, 공부 잘하면 자유인, 자유로운 영혼, 행복한 삶, 이렇게 가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 경험을 예술로 바꾸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놀이 경험 소중하다. 흙 만지고, 소리 듣고, 풀냄새 맡아보고, 어울려보고 하며 경험이 예술로 가고, 그 예술이 다시 경험을 소중하게 만들어준다. 새소리로 노래하는 게 아니라 새소리를 더 듣게 해야 한다. 친구를 주제로 연극을 하면서 친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게 하는 것과 같다. 예술은 경험을 추억을 각인시키는 힘이 있다. 예술은 지금의 경험을,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흙의 느낌, 감각, 물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사각사각 따위 자연에 눈 돌리고, 사람에 눈 돌리고, 나아가 세상에 눈 돌리고……. 물론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핍이 있다면 채워야지. 어린 나이라면 어릴 때 만나고, 지금 나이라면 지금 만나고 느낄 때다.
외할머니 이옥남 할머니의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부엌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외할머니 같은 삶의 태도는 지금의 도시 할머니에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도시를 배우겠나. 도시를 보는 법이란 게 있겠지만.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현장’에서 말한다. 감자밭 김을 매며 흙을 뒤집어줘야 감자가 물 받아먹는 거다. 뜨거운 나물 삶은 물을 버리면 벌레 죽는다. 지붕에서 처마에 지시락물(낙숫물) 양동이에 받으며 걸레 빨고 물 아껴야 용왕님이 보살펴준다, 이런 말들. 무엇을 알려줄 때는 이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알려주신다. 내가 죽으면 누가 이걸 알려주겠나 하는 말들. 그러니까 간절하다. 추상적이지 않다. 지금 교실의 가르침이라는 게 현장과 거리가 있다. 교실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교과서로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고, 교과서로 이웃의 정을 가르치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닿아야 한다. 배움이 생활이 되도록, 앎이 삶이 되도록. 아이들 간의 갈등이 있다고 치자. 이런 경험은 소중하다. 삶의 현장이니까. 현장에서 붙잡은 교육의 기회니까. 교사가 해결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훈계하고 사과하게 만들고, 이렇게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교과서에서 벌어지는 일만 소중한 것 아니다. 학교생활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소중한 교육의 기회다. 현장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정의라든가 도리라든가 법이라든가, 이런 가치를 붙잡아야 한다.
아이들과 만나는 교육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고, 변화되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뭔가?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아이가 자기를,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다. 보아주는 것,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보아주고 인정하면서 한 아이한테 자기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말이 둘레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성취를 보여주면 자기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자기 자리가 있으면, 그때부터 남의 자리를 인정해 줄 수 있다.
학교는 잘 안 변한다. 학교의 변화를 가로막는 적들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안 변했는가? 변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한다. 수업하라고 한다. 교사에게 교육과정 재편성하라 한다. 전에는 어림없다. 전에는 수업보다는 업무가 먼저였고, 교육과정 재편성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변했는가? 안 변했다. 여전히 누군가 알 수 없는 것의 지시가 있을 거라고,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만 잘 받들면 된다는 것이 학교를 지배한다. 안전교육 몇 시간, 언제, 교통교육, 수영교육, 흡연예방교육, 과학교육, 정보통신교육, 진로……. 이런 정책으로 교사 협의 시간을 다 보낸다. 한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 교실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것, 그것을 추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침이 먼저다. 끓고 있는 어떤 것은 잘 허락되지 않는다.
젊을 때는 친구들이 자기가 교장 되면 학교를 바꾸겠다고 했다. 지금은 그들이 기득권이다. 안 바뀌었다. ‘내가 학교를 바꾼다’는 생각을 봐야 한다. 그냥 현장 교사들이 와글와글 의논하는 자리가 변화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그게 조선 시대 서당교육을 하자는 말이 나오든 21세기 4차 산업혁명 교육을 하자는 말이 나오든, 이렇게 말이 나오든 말든, 의논하고 있는 그 자리가 변화다. ‘이렇게 변화해야 해. 바로 이렇게.’ 하는 결정이 과거다. ‘이렇게’는 없다. 지금 떠들고 엉뚱한 소리 하고 지적하고 조마조마하고 심각한 그 자리, 그것만이 변화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 끓고 있는 것, 최악의 결론이 날 수도 있는 자리, 그 위험을 허용하는 자리라면 변할 것이다.
외롭지 않은가.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전에는 아무도 어디에도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의 말을 듣겠나.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내가 말하는 것이 ‘꼰대’일까 봐 두렵다. 그래서 입을 다문다. 조금씩 동료 교사들이 호응한다. 함께 하려 한다. 전에는 욕을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응원한다.
아이들의 변화, 학교 현장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때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변화를 말하고 있는 자리가 현장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결과가 중요했다.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길은 하나였다. 지금은 과정이 중요하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끝도 없는 여러 길이 있다. 과정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일이다. 어른이 아이한테 주는 ‘위에서부터 밑으로의 예술’이 아닌, 한 아이에서부터 출발하는 ‘함께 손잡고 가는 예술’이 예술교육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탁동철
탁동철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천리에서 나고 자랐다. 춘천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척 도경분교, 오색초등학교, 공수전분교, 상평초등학교 등을 거쳐 현재 조산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한글글쓰기교육연구회, 글과그림 동아리, 팟캐스트 <학교종이 땡땡땡> 공동진행자 등 학교, 시, 글쓰기 관련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2, 2013년도에 백창우 선생과 함께 아이들의 시를 모아 이오덕 동요제를 개최했으며, 2014년부터는 강원도지역 아이들의 시를 모아 ‘설악어린이노래잔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오색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쓴 시를 역은 『까만손』(2002), 『얘들아 모여라 동시가 왔다』(2011), 『달려라 탁샘』(2012), 『하느님의 입김』(2017), 『아이는 혼자 울러 갔다』(2018) 등이 있다.
사진 _ 박영균(영상작가)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