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소외지역에 위치한 400명 이하 소규모 학교를 대상으로 4년간 장기지원을 통해 전교생이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예술꽃 씨앗학교’. 2008년 10개 학교를 시작으로 사업 10주년을 맞이한 2018년까지 전국 103개 학교가 예술꽃 씨앗학교로 선정되었다. 지난해 가을, 예술꽃 씨앗학교 4년을 마친 6기 18개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기획하고 지역과 학교가 하나되는 마을축제로 성과공유회를 열었다. 『2018 마을축제형 예술꽃 씨앗학교 성과공유회 사례집』에 수록된 사례중 포항 항구초등학교의 성과공유회 ‘갈매기 나래 펴다’를 소개한다.
간만에 온전한 하늘이 반가웠다. 치솟은 빌딩 사이에서 만날 보던 조각난 하늘대신 넓고 깊게 펼쳐지는 하늘을 오랜만에 올려다보니, 그 푸르름이 새삼스러웠다. 하늘이 하강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고인 물처럼 평화로웠고, 빛은 바다의 잔잔한 물결 위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수평선 위에 희미하게 떠 있는 제철소의 실루엣이 신비로웠다. 바다를 등지고 몇몇 걸음, 푸른 하늘을 가리지 않는 낮은 건물들 사이에 소담하게 자리 잡은 포항 항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선생님이 “항구”를 외치니, 아이들이 “갈매기” 하고 대답한다. 바다마을 학교다운 귀여운 구호다. 쪼르르 모이고 총총총 흩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과연 갈매기 같기도 하다. 지난 10월 25일, 이 바닷가 옆 작은 학교가 기분 좋은 설렘으로 들썩였다. 예술꽃 씨앗학교 4년간의 활동을 뽐낼 성과공유회의 대미를 장식할 축제 ‘갈매기 나래 펴다’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제 3회 항구축제와 함께 진행했기에 더욱 특별했다.
마음을 여는 문화예술교육
‘갈매기 나래 펴다’는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먼저 교내에는 지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선보이는 전시회 《항구 is 뭔들》이 준비됐다. 마을에서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퍼포먼스 ‘길놀이’가 곳곳의 흥을 돋웠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다양한 공연까지 즐길 수 있는 ‘갈매기 나래 펴다’는 포항 청소년 수련관에서 펼쳐졌다. 전시와 마을 퍼포먼스, 상영회와 공연으로 이어지는 구성에서부터 풍성한 볼거리, 즐길 거리를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교내 전시회 《항구 is 뭔들》에는 아이들의 회화작품은 물론이고 도자공예, 목공예 체험을 통해 만든 공예작품, 작은 소품 디자인, 공동 제작으로 보이는 조형 작품, 캘리그래피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촘촘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항구초등학교는 예술꽃 씨앗학교 중에서 주 교육 영역을 현대미술로 설정한 유일한 학교다. 대개는 미술이나 공예, 디자인, 사진, 영상 등, 장르나 매체로 주요활동을 구분하는데, 항구초등학교만 유독 콕 집어 ‘현대’미술을 선택했다. 굳이 현대미술을 고집한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미술교육을 하면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몇 십 년간 우리가 배우고 해왔던 미술교육과는 달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그려야 하고 완성해야 하고 선생님한테 평가받아야 하는 기능 중심의 미술교육에서는 벗어나야 되겠다고……. 경쟁이나 우열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표현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현대미술 교육을 시도했죠.”
– 이남엽 항구초등학교 예술꽃 씨앗학교 담당교사
항구초등학교가 자유로운 예술 표현 교육을 중시하게 된 데에는 학교가 안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전교생 108명 중 27명, 상당한 비율의 학생들이 인근의 선린애육원에서 지낸다.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거나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해 애육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마음속에 저마다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장벽을 치고 속내를 숨겼다. 감정 표현에 서툴렀고 쉽게 공격적으로 변했다. 선생님들은 이 아이들이 자기 감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문화예술교육이 그들의 삶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마음은 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알록달록 귀엽기만 했던 《항구 is 뭔들》의 작품들이 다시 보였다. 3학년 학생들의 드로잉 작품 <달을 바라보며 꾸는 꿈> 에서는 아이들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고래와 함께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툰 그림 속에 녹아 있었다. ‘나를 사랑하자’, ‘아름다운 바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 ‘어깨 쭉 펴.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는 매일 성장 중’ 아이들의 캘리그래피에 담긴 문구에도 거듭 눈길이 갔다. 발을 주제로 한 펜 드로잉들도 흥미로웠다. 축구선수와 모델이 되고 싶은 꿈, 숲과 바다를 건너고 싶은 소망, 하늘을 날고 책 속을 걷고 싶은 마음을 읽어내는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서 뭔가 만드는 거 재밌어요.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교과서 안에는 그런 게 없어서……. 인형 만들기 같은 것도 하고 싶고요. 교과서에는 없는 만들기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 박소윤, 항구초 4학년
“그림 그리는 활동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집에서 그리기는 하는데 제대로 배워보고 싶거든요. 반 친구들이랑 같이 그림 배우면서 제 작품도 그려보고 싶어요.”
– 김민휘, 항구초 4학년
전시 《항구 is 뭔들》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놀라운 완성도나 대단히 기발한 발상을 뽐내는 작품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외려 서툴고 투박한 표현력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작품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술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표현을 마음껏 즐겼을 아이들이 절로 그려졌다.
함께 즐기고 나누는 즐거움
오전 10시,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이 ‘길놀이’ 준비로 분주해졌다. 제멋대로 한껏 꾸민 모자를 착용하고 시끄럽게 부부젤라를 불어대며 출발을 재촉했다. 학교와 축제 명을 알리는 깃발과 현수막은 아이들이 직접 쓰고 꾸몄다. 사진사로 변신한 교감선생님은 신이 난 아이들과 연신 하이파이브를 해댔다. 드디어 시작된 길놀이. 학교에서 마을길을 따라 인근의 환호 공원과 포항시립미술관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여정 동안 아이들은 부부젤라를 불고 깡통 북을 두드리고 노래를 했다. 힘이 센 아이들은 중간중간에서 깃대를 치켜들어 대열을 인도했다. 푸른 하늘과 가을빛으로 물든 가로수 사이에서 색색의 깃발이 나부꼈다. 아이들은 길놀이 내내 시끌벅적 난장판이었다. 여기서는 너무 빨리 간다고 난리였고 저기서는 빨리 안 간다고 아우성이었다. 지나가던 지역 주민들이 대열을 내다보고 돌아봤다. 주민들은 그 소란에도 아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봐 주었고, 힘을 얻은 아이들은 주민들에게 밝게 인사했다.
‘길놀이’는 아이들이 만들고 준비한 그들의 축제를 온 마을에 알리기 위한 거리 퍼포먼스이다. 그렇다고 전략적인 홍보 활동이나 훈련된 거리 공연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고 소리치고 노래할 뿐이었다. 길놀이를 재미있어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힘들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길놀이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안에서 나의 이웃과 축제를 함께하는 경험을 아이들에게 안겨주었다.
“문화예술교육은 마음을 표현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동시에 공동체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함께 만들어나가고, 함께 즐길 수 있으니까요.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달라져서 이제는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가 어렵게 돼버렸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에게 공동체와 함께하는 따뜻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문화예술교육을 통해서 꼭 남겨주고 싶어요. 이 아이들의 삶에도 분명 괴롭고 힘들고 외로운 날들이 있겠죠. 그때마다 공동체 안에서의 경험과 기억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이남엽 교사
항구초등학교에는 곳곳에 벽화가 많다. 교내 복도나 계단, 화장실 앞의 내벽은 물론이고 구석진 외벽에도 나무, 풀꽃, 나비가 있는 풍경이 그려져 있다. 정면 화단에 으레 세우는 책 읽는 아이들 조각상에도 원색의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덧칠되어 있다. 건물 뒤편 구석의 자투리 공간은 타일 모자이크 작업으로 깨알같이 꾸몄다. 모두 예술강사와 아이들이 함께 그리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문득, 학교 전체가 아이들의 거대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초등학교 아이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놀며 오랜 시간 몸담는 학교를 한마음으로 그려냈다. 다 같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 덕분에 무채색의 벽에는 형상이 움텄고 색이 덧입혀졌다. 함께 즐기고 나누었던 문화예술 활동의 기억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긴 시간 따뜻하게 남기를 바란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지난 4년간 항구초등학교에서 진행했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면면이 살피다 보면, 매체나 표현법보다는 공존, 인권, 시민, 생태, 공동체 등의 주제의식이 도드라진다. 특히 학교 교과과정과 연계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더욱 그렇다. 다양한 예술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두는 저학년 프로그램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제외하면, ‘미래를 여는 작은 예술가’와 ‘다큐로 보는 세상’ 모두 주제에 대한 공부와 토론을 병행한다. 예컨대 인권에 대해 배우고 생각한 후 소수자를 배려하는 공공디자인을 경험해보거나, 마을 신문 기사를 토대로 마을의 현재 이슈와 문제들을 토론한 후 마을 소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는 식이다.
“저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우리 지역에 서린 이야기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보게 만들고 싶어요. 그러면 나와 내 주변, 내가 속해 있는 세상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애정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 이남엽 교사
내 주변과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긴 항구초등학교 아이들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설치미술 작품 <귀신고래, 널 그리워하다>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구룡포 일대에서 볼 수 있었던 ‘귀신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내, 2017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시민참여 작품 전시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6년 ‘다큐로 보는 세상’의 일환으로 제작했던 영상 작품 <할머니의 눈물>(항구초 이하린 감독, 당시 6학년)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할머니에게서 항일 운동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제 11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BIKY) 레디액션 부문에서 ‘마음의 별빛상’을 수상했다.
‘갈매기 나래 펴다’ 공연에서도 올해의 다큐멘터리 2편 <항구오전뉴스>와 <바다 옆 풍경>이 상영되었다. <항구오전뉴스>는 예술꽃 씨앗학교의 프로그램들을 뉴스의 형식으로 소개하며 학생들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스케치했다. <바다 옆 풍경>에는 바다를 걷고 줄넘기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바닷가 마을 작은 학교’의 소소하고 따뜻한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냈다. 나와 내 친구, 우리 선생님이 화면에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까르르, 숨이 넘어갔다. 학부모들은 상영의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내내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공연에는 무용, 피아노 독주, 합주, 합창 등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준비한 다양한 무대도 함께 했다. 때론 박자가 길을 잃기도 하고 음정이 비껴나가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평가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모자만 덮어써도 환호성이 터지고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아이들도 선생님들의 합창 공연에 그 어느 때보다 큰 함성을 질렀다. 선생님 파이팅, 선생님 잘생겼어요, 쏟아지는 응원 메시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공연 전,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에도 진심으로 연호하던 아이들이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항구초등학교의 졸업생들도 객석에서 후배들과 선생님들의 무대를 격려했다. 작은 학교의 끈끈한 분위기가 참으로 다정했다.
“아는 동생이 있는 건 아닌데 항구초등학교 후배들 하는 거 보려고 왔어요. 와보니까 애들도 귀엽고 선생님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초등학교 때 생각이 많이 나요. 이런저런 거 많이 할 수도 있고 사람들한테 보여줄 기회도 많았고…. 큰 추억인 것 같아요. 그런 추억 때문에 학교가 자꾸 생각나는 것 같아요.”
– 박지홍, 대도중학교 2학년, 항구초 졸업생
‘갈매기 나래 펴다’ 공연에는 예술꽃 씨앗학교 1기였던 포항 송라초등학교 학생들의 관악 합주와 가야금 병창, 사물놀이 무대도 함께 했다. 항구초등학교 이남엽 교사와의 깊은 인연을 계기로 초청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예술꽃 씨앗학교 선배로서 후배 학교 축제에 원정 나온 셈이다. 송라초등학교 학생들은 은행잎 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축하 무대에 올랐다. 자신들의 공연을 멋지게 마치고 나서도 끝까지 남아 같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역 내 예술꽃 씨앗학교 네트워크가 좀 더 확장된다면, 학생들의 예술 활동 또한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포항 항구초등학교의 성과공유회는 예술꽃 씨앗학교 이후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결해줄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학교 문화예술교육이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갖게 만들 수 있다면, 아이들의 예술 활동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적극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교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다양한 기회와 경험을 안겨줄 수 있다. 항구초등학교가 포스트 예술꽃 씨앗학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거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_ 김규형(사진작가)
박유미
박유미
설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은 미술작가. 2013년 개인전 《what a wonderful world》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어린이 예술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여전히 예술로 말하고 예술을 가르치는 작가 겸 강사로 목하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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