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重版出来!)>는 만화 매거진 편집부에서 만화 코너를 기획하는 편집자와 만화가 간의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으로 만화 출판을 위한 각계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은 본인이 맡은 일에는 전력을 다하는 당찬 신입 편집자.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는 맡은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매일매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작가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생각한 아이디어는 무조건 실행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마음 한편이 찌릿했던 것은 왜였을까. 과연 나는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그녀처럼 최선을 다했는가. 사업 담당자로서 어떤 태도로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빗대어보면 사업 담당자인 나는 편집자, 교육을 실행하는 선생님들과 예술가들은 만화 작가이며, 교육 참여자는 독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문화예술교육 ODA’)’ 사업을 진행하며 낯선 베트남의 한복판에서 매번 난관에 부딪히며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민낯을 마주하게 될 때 담당자로서의 무게감과 중압감이 컸다. 사업 담당 2년 차가 된 지금, 6년 차의 사업 ‘문화예술교육 ODA’를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 본다.
사파현 문학(독서) 매개자 연수
5년의 성과, 전환의 시작
문화예술교육 ODA는 2013년 베트남 북부 산간지역 ‘라오까이성(Lao Cai)’의 초‧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아동‧청소년, 현지 교사를 대상으로 사진, 시각예술, 무용, 연극 등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을 시행해 왔다. 지난 5년간 500여 명이 교육에 참여했으며, 그중 사파지역에서 사진 교육을 받은 한 학생은 전문 사진작가가 꿈이 되어 사진학과를 택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수업 통역과 보조강사로 참여했던 학생은 문화예술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한국 유학길에 오르는 등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성과가 있었다.
2018년 문화예술교육 ODA는 전환의 시점이었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의 협력으로 라오까이성의 라오까이시, 사파현, 그리고 므엉크엉현의 기숙사 학교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운영 체계를 갖추었고, 인도네시아로 신규국가를 확장하여 서자바주 치르본시(Cirebon) 마을에 커뮤니티 기반의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 라오까이 지역은 지난 5년간의 사업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개념과 중요성에 대한 관계자들의 인식이 상당히 제고되었다. 이에 향후 5년을 시작하는 2018년에는 ‘문화예술교육 접근성 확대’와 ‘새로운 시도’를 기조로 사업을 기획했다. 한 번의 문화예술 경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접근이 용이하고, 지속가능한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에, 참여 학교의 수요조사에서 가장 요청이 컸던 ‘문학(독서)’을 선정,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교육연극을 선보였다. 또한, 4차 산업혁명으로 국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막 시동을 건 인공지능 기술 등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를 라오까이에 그대로 옮겨왔다. 현지 수업이 종료된 후에는 서울과 라오까이 간 원격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라인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등 다소 실험적인 도전도 감행했다.
문학, 읽고 재해석하여 재창조하기까지
‘문화예술교육 ODA’는 베트남 학제에 따라 학기 시작인 9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약 3개월간 한국 교육강사들의 현지 교육이 이루어지고, 종료 시점인 11월에는 교육 결과를 학생들과 선생님, 학교 관계자들과 가족들에게 선보이는 결과발표회가 개최된다. 한국의 11월과 사뭇 다른 후텁지근한 하노이에 도착해 5시간가량 차를 타고 더 들어가면 안개로 뒤덮인 사파(Sapa)의 계단식 논이 펼쳐졌다.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사파 소수민족 중‧고등학교’에서는 ‘문학(독서)’ 장르의 결과발표회가 열렸다. 문학 수업의 경우 학교의 문학 교사와 예체능 교사가 팀을 이루어 한국 교육강사와의 집중 연수를 통해 학생들에게 적합한 베트남 문학을 선정하고, 커리큘럼 개발, 수업 운영안을 기획해 직접 학생들을 교육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학생이 연극 발표회를 보고자 야외 객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참여 학생들은 전사부터 요괴, 해설까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진지하게 소화해 냈고, 학생 관객은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듯 깔깔 웃어대며 공연에 푹 빠져들었다. 문학작품을 읽고 등장인물을 재해석하여 나만의 캐릭터로 구상해보고, 연극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무대 경험을 통한 자신감과 흥미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꼭 읽어야 할 문학작품을 놀이와 같은 접근방식으로 지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라오까이 미디어 아트 수업
미디어 아트, 시야를 넓히는 꿈의 교구로
다음날 라오까이시의 ‘라오까이성종합고등학교’에서는 ‘미디어 아트’의 결과 전시 및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진 등 1차 제작물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다양한 미술 기법과 도구를 활용하여 시각예술 작품을 만들었고, 원격교육을 통해 라오까이를 상징하는 로고, 인포그래픽 등 산업디자인 영역에도 도전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짧은 교육 기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한국 교육강사가 SNS에 올린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구매하고 싶다는 팬까지 생겼을 정도란다. 3명의 학생들은 VR 아티스트가 되어 인공지능 아트를 선보였다.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악기 연주, 런치패드(Launchpad)를 활용한 디제잉, 구글의 틸트 브러쉬(Tilt Brush) 퍼포먼스, 그리고 프로젝트 맵핑까지……. 시골 마을 한적한 학교 강당에서 펼쳐진 공연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디지털 기술은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없는 라오까이에서 아이들이 가장 손쉽게 문화예술을 접하고, 직접 창작할 수 있는 꿈의 교구가 되었다.
결과발표회에서 공연을 선보인 3명의 라오까이 학생은 지금껏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하노이에서 VR 아티스트로서의 데뷔전을 치렀다. 주베트남 한국문화원과 협력하여 교육프로그램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문화예술교육’ 결과 전시와 퍼포먼스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라오까이 결과발표회에서 선보였던 퍼포먼스 실력을 큰 무대에서 유감없이 선보였고, 체험 워크숍에서는 훌륭한 미디어 아트 강사로 활약했다.
사실 하노이 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던 주말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스즈키컵 4강 진출을 결정짓던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우리나라의 2002년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뜨거운 열기로 전시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경기가 열리기 1시간 전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50여 명이 넘는 관계자와 방문객, 25개의 현지 언론매체와 기자들이 현장을 찾았고, 이틀간의 전시 기간 200여 명의 관객이 전시회를 찾았다. 축구 열기를 뒤로하고 전시회를 찾아준 베트남 국민들, 그래서인지 그 누구보다 베트남의 우승이 기쁘다.
주베트남 한국문화원 협력 결과 전시 및 발표회
한걸음씩, 성장하는 ODA
수업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참여해준 아이들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한국 교육강사들 덕분에 베트남에서 ‘미디어 아트’ 장르의 가능성과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들이 라오까이 1호, 베트남 1호의 VR 아티스트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았다. 무엇보다 ‘라오까이’라는 작은 지역의 학생들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더 넓은 문화예술 세계를 경험하고, 시야를 확장해 그들의 세계관이 넓어질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더욱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새로운 시도와 운영 방식의 변화에도 ‘문화예술교육 ODA’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 매번 출장을 떠날 때마다 사업 운영에 대한 불안과 베트남 행정관과의 불편한 만남에 부담감을 느끼고 비행기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는 베트남에 펼쳐진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보면서 느끼는 뿌듯함과 보람, 그리고 담당자로서 반성하는 마음을 안고 온다. 앞으로의 5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문화예술교육 현장도 한국의 그 어떤 우수한 현장과 견주어 뒤처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을 기대하며 2019년 사업을 구상해봐야겠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의 명대사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전력을 쏟아가며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 나를 위해 일한다. 뭘 위해서라도 상관없다. 누군가가 움직이면 세상은 변한다. 그 한걸음이 누군가를 바꾼다. 매일은 계속된다. 오늘도 또다시 살아간다.”
<2018 문화예술교육 ODA – 베트남 지역 교육 결과>
교육기간 : 2018. 9. 18.(화) ~ 11. 25.(일)
교육분야 : 문학(독서), 미디어 아트
교육내용
‧ 문학(독서) : 청소년 대상 문학작품을 활용한 교육연극 교육 및 현지 교사 대상 교육 커리큘럼, 수업 운영안 개발 연수‧자문
‧ 미디어 아트 : 청소년 대상 디지털 기술 활용 VR 아트, 퍼포먼스 교육 및 예술대학교‧지방정부 관계자 대상 체험형 워크숍
교육대상 : 라오까이성 종합 고등학교 1학년 50명 및 매개자 5명, 사파현 소수민족 중학교 7학년 30명 및 매개자 2명, 므엉크엉현 소수민족 중학교 7학년 30명 및 매개자 2명, 라오까이 예술대학교 학생 및 교수 50명, 라오까이 교육국 관계자 20명 등 총 200여명
교육강사
․문학(독서) : 이윤미, 안용세, 유은정
․미디어 아트 : 김묘은, 박일준, 김성숙
김가영
김가영 _ 국제협력팀 주임
kykim@art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