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스페인에서 열린 영유아를 위한 공연예술축제에 참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영유아 관객을 위한 공연 페스티벌이라는 점부터, 스페인이라는 매력적인 나라에 대한 이미지까지 더해지며 더욱 기대감을 자아내는 출장이었다.
우리가 참석한 행사는 올해로 14회를 맞은 ‘엘 메스 뻬띳 데 또츠(El Més Petit de Tots)’, 우리말로는 ‘아주 작은 것들’이라는 이름의 축제로, 스페인의 사바델이라는 지역에 근간을 두고 바르셀로나와 주변 도시 일대에서 열렸다. 사바델은 바르셀로나 북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인데, 행사 주최 측 관계자에게 이곳은 무엇으로 유명하냐고 물었더니 이전에는 직물공업으로 유명했지만, 산업이 쇠퇴하게 되면서 현재는 이 축제가 도시의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행사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일주일간 드나들었던 베이스캠프 격이었던 공간이 옛 직물공장 건물과 그 부지였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5박 7일 동안에는 유럽 전역에서 참가한 20여 개 팀의 영유아 대상 공연과 가족 단위의 관람객을 위한 행사뿐 아니라 영유아 공연예술 관련 주요 이슈를 다루는 관계자 컨퍼런스와 미팅 등이 진행되었다. 이번 방문에는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과 종로문화재단 아이들극장 이은정 차장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두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더욱 풍성한 해석과 유의미한 논의를 더할 수 있었다.
엘 메스 뻬띳 데 또츠(El Mes Petit de Tots) 축제 포스터
(왼쪽부터 2011년, 2014년, 2017년, 2018년)
신생아부터 12개월 아기를 위한 공연
여러 공연에서 마주친 관객들 중 가장 어린 관객을 달리아 아신(Dalija Acin)의 작품 <생기 있는 마음정원(The Garden of spirited minds)>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공연은 신생아부터 12개월까지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다. 아마 이제껏 있어왔던, 그리고 현존하는 공연을 통틀어도 가장 어린 연령을 위한 무대가 아닐까. 달리아 아신은 스웨덴을 기반에 두고 활동하는 세르비아 출신의 현대무용가로, 공연의 콘셉트 기획 총괄, 무대디자인 기획, 그리고 메인 무용수로서 직접 공연을 펼친다. 그녀는 최근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이 공연은 달리아와 남성 무용수 1인이 함께 이끌어 가는 무용극인데, 무대와 관객석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즐기는 형태의 공연이다. 공간에 들어서면 예술적 아우라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우선 조명을 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하여 꽤나 어두운데, 이는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두운 환경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어두움을 편안해한다는 달리아의 생각을 반영한 기획이다. 신비로운 조명과 음악, 그리고 한켠에 피워둔 향을 통해 후각을 자극하며 다양한 오브제들 – 천정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여러 겹의 천과 레이스로 만들어진 설치물, 말랑한 촉감의 다양한 만질 거리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펼쳐져 있다.
<생기 있는 마음정원(The Garden of spirited minds)>
우리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아기와 보호자 관객들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닥에 놓인 소품들에 관심을 보이던 아기, 다른 관객들에게 성큼 다가가는 아기, 엄마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춤추는 달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빨려가듯 집중하는 아기 등 관객의 다양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리아와 남성 무용수는 묵묵히 자신들의 움직임을 이어나갔고, 어느새 모든 아기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공연에 몰입하였다. 어떤 자세로 앉아있어야 할지, 눈앞을 스치듯 지나가는 배우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은 망설여하던 어른들의 모습과는 사뭇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이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관객의 연령대뿐 아니라 6시간에 달하는 공연시간도 한몫한다. 두 명의 무용수가 함께 1시간 30분의 시퀀스(sequence)를 총 네 번 반복하는데(중간에 식사시간 겸 1시간 휴식을 한다), 관객은 그 시간 동안 언제든 원할 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매우 관객 친화적인 공연이다. 달리아 아신은 아기들을 위한 공연에서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모두가 퇴장해야 하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충분히 여운을 느끼고 싶거나 더 놀고 싶은 아기들도 있을 수 있지 않겠냐며 질문하던 달리아의 표정과 관객이 몇 명이든 정성을 다해 공연을 펼치는 모습. 갓 세상에 나와 아직 말문도 채 트이지 않은 아기들의 욕구를 존중하고, 이미 한 명의 개인으로 여기는 소중한 태도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어른 관객, 아기의 보호자들 역시 부모로서가 아닌 온전한 관객으로서 참여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무얼 하면 좋을까? 이렇게 놀아보자, 저기 무용수가 보이니?” 등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아기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본인의 관심사와 호기심을 공간 안에서 능동적으로 채워나갔다. 아기들이 1시간이 넘도록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도 이 안에서 무엇이든 ‘스스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를 데려온 한 어머니는 어느새 비스듬히 기대어 공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녀의 편안한 미소는 아기를 키워내는 고단함을 충분히 위로받는 듯 보였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결국 아이와 매개자 모두를 향하는 좋은 영유아 콘텐츠가 아닐까. 영유아극의 패러다임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해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생기 있는 마음정원(The Garden of spirited minds)>
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가 관람한 여러 공연 중 유일하게 시각장애를 가진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 있었다. 댄스시어터 아우라코(Dance Theatre Auraco)의 <툰투(Tuntu)>가 그것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자는 청각 등 다른 감각이 압도적으로 발달하게 마련이고, 그들을 위해 기획한 공연이라면 당연히 음악극 기반이 아닐까 했던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무용극이라니. 보는 것에 어려움을 가진 아이가 무용극을 어떤 방식으로 느낄 수 있을까. 이 공연은 시각장애가 있는 유아를 대상으로 기획되었지만, 비장애 유아와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공연이다. 단, 비장애 관객들은 아주 작은 구멍만이 뚫려 있는 종이 안경을 착용해야 하고, 시각이 거의 완전히 제한된 채 다른 감각에 의존하여 공연을 경험해야 한다.

“춤은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춤은 어떤 소리일까요?”

(How do you hear a dance? What does the dance sound like?)

댄스시어터 아우라코 디렉터 파이비 아우라(Päivi Aura)가 <툰투(Tuntu)> 창작 과정을 소개하는 발표에 앞서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와 단원들이 항상 자문해 왔던 질문이었음을 덧붙였다. 무용은 보는 예술이지만, 언제나 당연히 인간을 지배하는 시각 자극이 때때로 우리를 안일하게 만들며,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Blindness)이 그들에게는 움직임의 조각을 만들어 가는 역할이라고 한다. 공기의 흐름, 손끝에 만져지는 촉감, 사람의 호흡, 옷의 바스락거림, 바닥을 쓰는 소리 등 우리는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과 온몸을 통해서도 굉장히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보는 것, 보이는 것의 안정감을 벗어나면 어떠한 감각이 우리에게 펼쳐질 수 있을까.
공연을 제작하기에 앞서 파이비 아우라와 아우라코 단원들은 시각을 제한한 채 일상을 경험해 보고자, 눈을 가리고 지하철을 타보는 등 도시 곳곳을 탐색하는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 몇몇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해주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아우라코가 보다 체계적인 공연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시각장애를 가진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장애‧비장애 아동들과 진행한 여러 차례의 워크숍 등은 더욱 탄탄한 공연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툰투(Tuntu)>
공연 <툰투(Tuntu)>에서 움직이고, 만져지고, 들리는 모든 것은 하나도 그냥 선택된 것이 없다. 댄스시어터 아우라코는 공연에 쓰이는 소품과 의상, 음악에 대해서도 탄탄한 연구를 동반하였다. 바닥에 놓는 패브릭 소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보다 적합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소재에 대한 조사부터, 각종 레퍼런스를 검토하는 등 지난한 고민과 검토의 과정을 겪었다. 공연에 쓰이는 음악 역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악기의 음색에 귀 기울이고, 관객에게 더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선율을 만드는 데 집중하였다.
“당신이 눈을 가린 채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벽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 온다면, 눈으로 볼 때는 결코 듣지 못했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보지 않고도 주변의 수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가 느꼈던 것을 <툰투(Tuntu)>를 통해 여러분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이비 아우라의 발표문 중 한 구절이다. 일상을 다르게 보게 해주고,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내 안의 감정과 느낌, 자극을 깨워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예술이 아닐까.
파이비 아우라 디렉터 발제 및 토론
미래 세대를 위하여
유럽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영유아를 위한 예술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연구하고 있다. 기획자와 예술가들은 영유아 또한 좋은 예술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수준 높은 공연예술을 접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예술가들은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 더욱 실험적인 것을 시도해야 마땅하며, 자신의 작업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매개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을 지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때문에 유럽의 영유아 공연은 성인 관객이 보기에도 무척 흥미롭다. 그간 축적된 역사를 발판삼아 미래세대를 위한 자산을 키워내는 데 집중하고, 3세 이하의 영유아를 위한 문화예술 지원과 교육을 공들여 추진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 혹은 무거운 책임감이 우리에게도 보이고 느껴졌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도들이 있다. 부천문화재단의 ‘0세 공연콘텐츠 개발사업’,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24개월 미만 아기를 위한 영유아극 창작연구’ 등 소중한 시도와 과정이 수면위로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어린 관객을 대하는 예술과 문화는 어떠한 책임감을 지녀야 할까. 정부 국정과제인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지원과 지원 대상 다각화 이슈가 부각되면서 유아를 위한 문화예술교육 지원예산이 급속도로 확충되고 있다. 조금 더 느릿하고 신중하게, 우리만의 속력을 잘 잡을 수 있어야 하겠다. 이제 첫발이다.
관련링크(사진출처)
엘 메스 뻬띳 데 또츠 축제 www.elmespetitdetots.cat
달리아 아신 www.dalijaacinthelander.com
댄스시어터 아우라코 auraco.fi
권재현, 이가윤, 정송희_학교교육팀
김민지 _ 국제협력팀 대리
mjee@arte.or.kr
고아라 _ 국제협력팀 주임
arako@art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