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간의 비행 후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의 나를 반겼던 것은 5월의 청명한 하늘, 상쾌한 바람, 저녁 햇살이 은빛으로 반짝이던 템스 강과 강변을 걷다 만난 서투른 버스킹 공연이었고, 지금 나를 기다리는 것은 사업 모니터링, 정산, 행사 운영, 결과 보고 등으로 아무리 해치워도 줄어들 기미가 없는 화수분과 같은 업무이다.
이 글은 2018년 5월에 영국 런던과 맨체스터의 고령자 대상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방문한 결과 리포트이다. [아르떼365]를 찾아보면 칼럼 섹션에 ‘ 나이 들기 좋은 사회, 예술의 역할 찾기(박윤조 영국문화원 아트 디렉터)’라는 기사가 있는데, 1부-2부라거나 프리퀄-본편의 관계는 아니지만 같은 방문단으로서 같은 곳을 다녀온 후의 소회이므로, 어떤 면에서건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번 출장은 영국문화원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국문화원과 협력하는 기관 담당자가 참여하는 다국적 방문단(3개국, 16명)이 구성되었다. 방문단은 6일간 13개 기관을 방문하거나 담당자와 만났고, 2개의 강연을 들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미팅과 프레젠테이션, 질문과 학습으로 나의 머릿속은 일찌감치 허락된 용량을 초과하였으나, 그 안에서 고민했던 것의 일부를 이 글에 담아보려 한다.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일반적인 기행문의 서사구조인 시간 순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잘 설명할 방문 기관, 예술단체, 작품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미 다녀온 지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 시간 순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 The Storybox Project
  • The Storybox Project – At Home
사진출처 : 스몰 띵스 홈페이지 smallthings.org.uk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 스몰 띵스
‘스몰 띵스(Small Things)’는 창의적인 활동을 통하여 배움을 증진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는 사회적기업이다. 문화 활동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이 바탕이 되고 있다. 영국 내에 치매를 앓는 사람들이 증가하며, 이들이 긍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스토리박스 프로젝트(Storybox project)’와 ‘스토리박스 앳홈(Storybox at home)’이라는 사업이 고안되었다고 한다. 스토리박스 프로젝트는 요양기관 내에 예술가가 거주하며 활동하는 일종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다. 예술가가 8주에서 12주간 요양기관에 머물며 치매를 앓는 노인들과 다양한 예술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프로그램 장르는 기관과 참가자의 수요에 따라 구성되는데, 연극, 스토리텔링, 노래, 시, 공예 등 다양하다. 활동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핵심은 지난 기억을 되새기거나 추억을 공유하기보다 현재에 집중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함께 소통함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스토리박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수혜자가 아닌 예술의 주체이고, 모든 활동은 예술가가 아닌 참여자가 주도한다. 흔히 복지 정책의 수혜자로만 인식되던 노인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참여자들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아 정체감을 강화한다는 모범적인 사업 소개를 듣고, 사업 기간, 사업 현장, 대상자에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교육진흥원)의 노인 대상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들었다면 한국과 영국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며 <위 아 더 월드>를 불렀을 텐데 이런 나를 만류하듯 스몰 띵스의 담당자는 스토리박스 앳홈에 대해 들려주었다. 스토리박스 앳홈은 교육진흥원에서 그간 시도해보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닌, 자료를 보내고 사람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스토리박스 앳홈의 구독자가 되면 일주일에 12파운드(약 17,000원)의 금액으로 다양한 워크숍 활동들과 이에 필요한 자원(자료)을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다. 타깃이 되는 구독자는 요양 시설의 직원이다. 이들은 워크숍을 통하여 교육을 받고 활동에 필요한 자료를 지원받아 직접 다양한 창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스토리박스 프로젝트를 제공받지 못하는 범위까지 스몰 띵스의 지원이 확산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연스럽게 지켜진 조화와 균형 – 테이트 익스체인지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는 영국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이다. 테이트 갤러리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중 우리가 주목한 것은 테이트 익스체인지(tate-exchange)의 ‘리제너레이션(Re-generation)’ 프로그램이다. 리제너레이션은 63개의 회원 단체와 전 세계의 예술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일반인이 함께 참여하여 사회 속에서 예술의 역할과 영향에 대해 실험해보는 연간 프로그램이다. 토론, 워크숍, 전시 등 여러 형식으로 사회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예술적 시도들을 선보이고 있다.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고, 테이트 익스체인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관객 참여형으로 방문객은 단순한 관람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저곳 탐방과 관찰에 열중하고 있는 나에게 ‘늙는 것(old)’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습적인 질문과 함께 마이크가 들어와 잠시 긴장하기도 하였다.
놀라웠던 것은 평수를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공간에 대충 봐도 10여 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떤 강제성이나 불만, 사고 없이 전체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어르신 여러 명이 모여 흙을 주물러 그릇을 빚는 활동, 흡사 전문가처럼 보이는 어르신 무용수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맨발로 리허설을 하는 장면, 방문객이 미래의 본인에게 편지를 써서 벽에 붙이고 이미 벽에 붙어있는 편지를 읽어보는 모습, 어르신 강연자가 어르신 관객 앞에서 강연하는 모습 등 다종다양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 활동들에 나를 참여시키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여러 개의 활동이 한 공간에서 펼쳐짐을 상상했을 때 자리 배치, 소음에 대한 규제 등을 먼저 떠올렸던, 사람을 믿지 못하고 행사의 결과와 효과만을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테이트 익스체인지 ‘re:GENERATION’ 프로그램 무용 공연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어르신 – 컴퍼니 오브 엘더스
새들러스 웰스(Saddler’s Wells) 극장의 ‘컴퍼니 오브 엘더스(Company of Elders)’는 1989년에 창단된 퍼포먼스 그룹으로 60세 이상 노인 28명으로 이루어져있다. 매주 진행되는 수업과 리허설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주도하고 있고, 매튜 본(Matthew Bourne),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 등 유명 안무가들이 함께해왔다. 영국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등에서 진행된 국내공연뿐 아니라 베니스비엔날레 무용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공연한 적이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투어 공연도 진행하였다. 방문단이 도착했을 때는 어르신 무용수 20여 명의 공연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긴장감 안에서 리허설을 관람했고, 리허설이 끝났을 때는 본공연 못지않은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무용단은 무대에, 방문단은 무대 밖에 서서 궁금한 것을 묻고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 모이신 어르신들은 무용가가 30~40대가 되면 신체적인 한계로 무용을 그만둬야 하는 현실을 수긍하지 않았고, 나이가 많아지고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표현할 수 있는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진다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노인이 주체가 된 무용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조차도 리허설을 본 이후에는 어떤 특정한 주제의 무용은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분들은 해외 투어 공연도 여러 번 진행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고 계시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과 교감하는 하루하루의 무용 연습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하였고, 이런 마인드는 앞서 언급한 우리나라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겹쳐졌다. 즉, 어르신들에게는 내일 어떤 것을 잘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보다 문화예술을 즐기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혹시 중간에 그만두는 단원은 없냐고 물었을 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사라진다(disappear)는 답이 돌아왔을 때 확신하였다.
노년 세대의 힘과 에너지 – 볼드페스티벌
고백하건대, 한 자리에서 그렇게 많은 노인을 본 적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축제였다. ‘볼드((B)old)페스티벌’의 볼드는 ‘올드(old)’라는 단어 앞에 B를 더함으로써 강인한 나이듦을 떠올리게 한다. 볼드페스티벌은 65세 이상으로 각 예술 분야에서 인정받는 국내외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로, 시간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가는 노인 예술가들을 기념한다.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예술계에서 과연 ‘전성기’는 언제인지, 나이듦이 당신의 예술적 시도들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어떻게 시대의 흐름에 계속해서 발맞출 수 있을지에 대해 공연, 심포지엄, 체험워크숍 등 여러 형태로 고민해보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페스티벌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65세 이상의 전업 예술가만이 아니라, 지역의 예술단체, 커뮤니티 등에서 활동하는 노인들도 이 행사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유명한 무용가의 공연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길에 지역 어르신들이 추는 라인 댄스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는 구조였다. 출연자도 봉사자도 참여자도 모두 노인으로, 젊은이의 도움 없이 노인들만의 힘으로도 재미있는 판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복지혜택의 소극적인 수혜자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고 노인들이 만들어낸 노인들의 세계 안에 다른 세대를 참여시키려는 노인의 힘과 의지, 능력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노년의 외로움을 사회적 의제로 – 더 베드
도시 한복판에 의료용 침대가 놓여있고 잠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 누운 노인은 뜨개질을 하거나 사진을 꺼내 보는 등의 소일거리 중이다. 지나던 사람은 의아해하며 노인에게 다가가고, 노인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더 베드(The Bed)>라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70~80대 고령의 아티스트 그룹과 협력하여 설계되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사우스뱅크센터 주변과 템스 강변의 세 지점에서 진행되었다. 침대와 침대 위의 노인이 공공장소에 ‘버려지는’ 것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멈춰선 관객은 노인 퍼포머로부터 내러티브의 조각을 포착할 수 있게 되는데 멈추고, 보고, 듣고, 대화하는 모든 과정이 예술작업인 셈이다. 이들 노인 퍼포머는 실제 요양 시설에 거주 중으로 희망자를 선별하여 그들의 삶의 이야기로 스토리를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고령사회로 접어든 영국이 직면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이라는 이슈를 대담한 방법으로 건드리고자 하였다. 우리 방문단이 용기를 내서 다가간 어르신은 젊을 때 생계가 곤란해 딸을 입양 보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르신의 이야기에 몰입했던 나는 이것이 ‘기획된’ 작품이고 ‘재구성된’ 스토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외로움과 고립감과 싸워야 했던 어르신 퍼포머들은 한국의 홍대 입구만큼이나 젊은이로 북적거리던 템스 강변에서 잠옷을 입은 채로 또 다른 종류의 낯섦과 두려움에 맞서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와 노력은 영국 사회가 노년 세대의 고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한 강력한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 (B)old Festival의 무용 공연
  • (B)old Festival의 작품 중
영국 방문에서의 경험이 내가 담당하고 있는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과 문화예술치유 사업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기회는 아직 없었다. 그러나 노인 세대를 젊은 세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로 보던 나의 시각을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었고,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온전한 문화 경험을 만들고 누릴 수 있는 주체임을 알게 된 점은 큰 성과이다. 예술 행정에 몸담으며, 내가 하는 일의 목표와 의미를 지금만큼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예술 행정에서 ‘예술’은 뒤에 따라붙는 ‘행정’의 영역을 한정하고자 붙는 수식어 정도로 생각해왔다. 혹시 예술 행정이란 ‘예술분야에서의 행정’이 아니라 ‘예술적인 행정’이 아닐까. 모든 사람과 모든 경우의 개별성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각 상황에 맞는 각각의 태도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편적인 경험일 수 있겠지만, 이국의 도시를 종횡무진 누비며 어르신들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섬세하게 어르신의 마음과 상황과 환경을 헤아리는 문화예술교육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또 하나의 화수분이 될지라도.
사진없음
박수아 _ 교육나눔팀
sooa@art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