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9일 세운상가 세운홀에서 ‘워라밸 시대, 문화예술교육을 말하다’를 주제로 한 포럼이 열렸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라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번 포럼은 이러한 변화와 관심에 대하여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대응을 하고 있으며 향후 정책 방향은 어떠해야 할지 짚어보는 자리였다. 포럼에 사회자로 참여하며 들었던 생각과 현장에서 나누었던 논의를 짧게 정리해 본다.
(왼쪽)‘워라밸시대, 문화예술교육을 말하다’ 포럼, (오른쪽)김정운
1. ‘창조는 편집이다 : 예술, 삶의 균형점’을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은 성찰 없이 달려온 한국 사회와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영역을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자신도 ‘교수’라는 직업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화(日本畵)를 배워 현재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휴식과 재미를 바탕으로 종합하는 능력인 ‘편집력’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이의 흥미를 돋우며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2. ‘주 52시간 근무제와 문화정책의 방향’을 주제로 발표한 장훈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여가정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자칫 산만하게 여겨질 수 있는 여가문화의 밑그림을 제도 차원에서 그려주었다. 특히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노동시간과 공동체성을 논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경우 공동체를 현대사회의 대안으로 꼽는데,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는 공동체에 대한 신념체계보다 시간이 더 큰 변수”라는 지적은 두고두고 곱씹을만하다. 장훈 부연구위원은 이어 문화예술교육을 포함한 공공 문화서비스의 점검 및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늘어난 욕구에 대응하는 공공영역의 적극적인 대응 방안으로 공간과 시간 전략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이소연 부천평생학습센터 소장은 ‘퇴근길 배움 한 잔 어때요?’라는 발표를 통해 공공영역에서 문화예술분야 신규수요를 창출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부천평생학습센터에서 운영 중인 ‘퇴근학습길’ 사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대중교통을 중심으로 작은 거점을 만들어 시민의 동선 안에서 새로운 수요와 욕구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2016년부터 시작한 퇴근학습길 사업은 현재 지하철 1, 7호선 인근의 19개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 센터는 이를 통해 평생학습과 문화예술 영역에 포괄되지 않던 직장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평생학습 영역과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고정된 공간을 벗어나 시민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거점들을 만들어내는 전략은 다른 기관에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줬으리라 생각한다. 공공영역의 경직된 공간운영방식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는 유연한 공간운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점이 도출될 수 있다. 가능하면 시민의 일상의 동선을 따라 보편적인 삶을 제대로 따라잡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파트너 발굴을 위한 적극성과 파트너십을 위한 유연하고 열린 태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장훈
  • 이소연
  • 임영숙
  • 윤수영
  • 정민룡
4. 문화예술교육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문화예술을 즐기는 이들을 확장하는 것, 즉 수요의 확대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은 기관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현대무용 장르를 알리고 실제 무용을 즐기려는 계층을 넓히기 위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임영숙 홍보마케팅팀 팀장은 ‘전문성이 특성이다’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현대무용의 낯섦을 극복하고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교육프로그램은 인기가 워낙 높아 항상 대기자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교육 참여자에 남성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 교육을 시행한 이후에 점차 유료 관객이 늘어나며 전공자로 가득 찼던 공연장 로비풍경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문화예술의 생산과 향유의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여가활동과 문화예술교육의 적극적인 만남이 요청되는 지점이다.
5. 독서 모임 플랫폼 트레바리의 활동은 공공영역의 시도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트레바리는 4개월 단위 독서 모임 참가비로 19만 원, 혹은 29만 원의 비용을 받는 유료서비스다. 2015년 출범한 이 스타트업은 3년 만에 클럽 수 200개에 멤버 수 3,000명을 넘기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윤수영 대표의 발표 제목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 함께 업데이트 되기’였다. 트레바리 서비스의 연결이 없었다면 ‘읽지 않을 책, 쓰지 않을 글, 하지 않을 대화,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 있다는 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커뮤니티’로 소개하는 윤수영 대표의 시선이 이채로웠다. 개인들의 활동을 묶어주는 플랫폼에 대한 요구가 점차로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6. 정민룡 광주 북구문화의집 관장은 ‘문화예술교육, 개인 여가에서 사회적 여가를 위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사회적 여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정민룡 관장은 우선 ‘일과 여가’라는 분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현재의 워라밸 정책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부각했다. 현재의 워라밸 정책은 도시의 정규직 직장인을 대상으로 세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부의 워라밸은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같을 수가 없다. 논에서 일하며 새참으로 술도 마시고 노동요도 부르곤 하는 농부의 경우는 또 어떤가. 정책 분야에서는 다수에 대한 접근, 정책수단이 손쉬운 대상에 대한 접근, 파생 효과가 큰 영역에 대한 조치를 가장 먼저 취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직장인만을 위한 워라밸 정책은 조금 아쉬운 지점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제도로서의 시간은 개인적이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시간은 사회 내에서 산출된 것이며, 따라서 사회마다 달리 규정하는 객관화된 사회적 사유 범주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간, 혹은 일과 여가를 구분하는 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정민룡 관장은 사회적 여가를 “문화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문화 활동이 그룹 또는 최소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정의하며 개인적 여가활동을 사회적 여가로 전환하는 매개로서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7. 정민룡 관장은 ‘산책커즈’라는 청년모임의 사례를 소개했다. 산책커즈는 20~30대 청년들이 모여 동네 산책길을 찾아다닌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문화, 생태, 지리적 정보를 수집하고 산책길이 갖고 있는 장소성을 파악해 독립출판의 형태로 소수의 사람들과 콘텐츠를 공유하는 활동을 한다. 정민룡 관장은 산책커즈의 활동이 산책이라는 여가를 통해 일상의 모습, 사람의 마음, 도시 산책길의 장소성을 발견하고 있으며, “걷는 즐거움과 같은 산책이 갖고 있는 인문성, 독립출판이라는 형식, 글쓰기의 요령 등을 배우는 교육적 활동이 수반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교활동의 일환으로 모임을 하며 일터에서는 찾기 어려운 성취감을 맛본다. 개인의 여가 활동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는 방식이 된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산책을 하며 산책 코스를 평가하고 산책하기에 적합한 곳을 캐스팅하는 모습은 색다름을 넘어 사회적 여가의 어떤 모습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토론회는 현재 일과 삶의 균형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간단한 지형을 그리는 시론 격으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에서 비롯되는 여가의 확장이 개별 욕구의 충족에 그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찾는 과정에 문화예술교육의 접근이 있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수렴됐다. 개별발표 이후 이어진 토론에서도 사회적 여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뤘다. 패널들은 공공영역이 단순 수요 추종을 넘어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장르 편중을 막으며 민간-공공의 시너지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에 더해 여가가 발생하는 사회적 상황과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사실, 여가활동과 관련해서는 현재 전격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생활문화 정책과 겹치거나 유사한 지점이 상당 부분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에 대해 더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트레바리 등의 플랫폼이 보여주는 중간지대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여가가 규범적으로 작동한다면 그것 역시 곤란한 일이다. 공동체 활동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응은 캐주얼한 모임은 기꺼이 참여할 수 있지만, 필요 이상의 관계는 꺼리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도 고려할 지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흔히 문화센터로 통칭하는 민간 활동 영역의 확인이었다. 300인 이상의 사업장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7월 이후 신용카드 매출이나 대중교통 이용 빅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직장인들의 퇴근 후 민간 문화예술 서비스 시장의 접근이 크게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민간 영역의 대응과 전략을 살펴보고 공공과의 교차지점을 확인해보는 것이 의미 있었을 거란 생각이다. 주최 측이 다양한 채널로 요청했으나 백화점과 마트 등 많은 사업자 측에서 부담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마도 민간의 문화예술교육 시장과 관련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_ 장영주(디블리스코리아)
안태호
안태호
협동조합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사단법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활동가를 시작으로 웹진 [컬처뉴스] 편집장,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 팀장 등을 거쳤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며, 여전히 만화를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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