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망국의 시간』
    (조한혜정, 사이행성, 2018)
  • 『미래, 교육을 묻다』
    (정광필, 살림터, 2018)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의 신작 『선망국의 시간』 표지에는 위의 구절이 인쇄되어 있다. 지금·여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위의 질문에 진지하게 자문자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물리적인 시간과 생리적인 연명을 넘어, 무엇이 의미를 생성하는 진짜 삶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를 위한 시간조차 소비사회의 주체로서 쇼핑하는 데 소진하고 있으며, 유명 셀럽들의 자기계발 서적 따위를 탐독하며 각종 스펙 쌓기에 탕진하며 보내고 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자아상이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 주식회사의 최고 경영자’(CEO of Me Inc.)로서 개인 브랜딩하도록 독촉하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한혜정은 『선망국의 시간』에서 이제는 다른 시간을 설계하고 직접 살자고 제안한다. 조한혜정이 말하는 다른 시간이란 책의 구성이기도 한 ‘전환의 시간, 미래의 시간, 신뢰의 시간, 시민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을 재구성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문화와 행복의 본질이 ‘시간의 활용’ 자체에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시간의 향기’ 또한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서문에 수록된 고정희 시인의 「예수 전상서」에 나오는 “그대도 나도 불온한 땅의 불온한 환자”라는 시적 표현에 아프게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한혜정이 생각하는 이러한 인식틀은 다음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세상이 계속 좋아질 것을 믿는 문명이 수명을 다했다.” 이 문장은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핵심 문장이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저자가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침통하게 응시하는 인식틀이라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는 모두 그냥 생존하다 죽는 존재일 뿐인 한낱 호모 사케르(Homo-Sacer, 헐벗은 삶)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난민이고 고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취향을 좇는 소비자인 동시에, 이익을 좇는 투자자가 되었고, 이제는 개인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조물주가 되어버렸다는 저자의 진단이 결코 억측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서 조한혜정이 ‘먼저 망한 나라’를 뜻하는 의미에서 ‘선망국(先亡國)’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이생망’이라는 말을 저절로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생망은 ‘이번 생은 망했다’는 뜻을 지닌 신조어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조한혜정은 「선망국에서 선망국으로」라는 서문에서 대한민국이 ‘먼저 망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촌 주민들이 부러워할 ‘선망국(羨望國)’으로 변신하자고 제안한다. 극단적 상황에서 도리어 좋은 길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작고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제안한 바 있는 ‘해방국 파국’이라는 개념에서 비롯하였다.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 먼저 위험을 맞았으므로, 길도 앞장서서 찾자는 주장인 셈이다. 그리고 조한혜정은 공유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며,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일종의 ‘사회적 자궁’ 역할을 하는 환대의 커뮤니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조한혜정의 주장은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도’가 있고, ‘인기척’이 살아 있는 삶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외면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터가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되고,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은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유구한 에토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환’이라는 키워드가 각별하다. 자산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인생길이 아니라, ‘쉼’의 자유를 통해 새로운 재활력화 운동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각자’와 ‘각자’로 서로를 존중하며, 돌봄의 감각을 회복하며, 소통과 관계의 재생을 통해 ‘전환’의 삶과 ‘전환’의 문명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학습자 중심의 맞춤형 학습 현장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 실험들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조한혜정의 목소리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도 적극 경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재산권 신수설’과 ‘학력 신수설’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새로운 활력도 희망도 감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망국의 시간』에 나타난 문제의식은 교육자 정광필의 문제의식과도 통한다. 2003년 이우학교 초대교장을 지냈고, 길 위의 학교 혁신 전도사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SBS 창사특집 <바람의 학교>를 운영했으며, 2016년 이후 서울시 50+ 인생학교 학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광필의 『미래, 교육을 묻다』는 주로 학교 현장을 중심으로 교육의 미래 혹은 미래의 교육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문답 형식으로 쉽게 쓰인 책이어서 학교 예술강사를 비롯해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독자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정광필이 말하는 핵심 논지는 우리는 교육의 본질인 내면의 힘과 야성(野性)에 대해 사유와 행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의 성장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발달단계에 맞게 기획하고 자극하며 아이들을 ‘각성된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야생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교육 현장에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실천가로서 활동해온 내공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50+ 생애전환 세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는 강의보다는 워크숍 위주로 운영해야 한다는 등의 생생한 ‘간증’의 말들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창의는 시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말은 ‘창의적 체험활동은 시켜서 하는 활동’이라는 뜻이다. 현재 초등학교에서 법이 강제하는 범교과 활동을 진행하려면 전체 창의 시간의 무려 86%를 할애해야 한다. 그래서 ‘창의는 시체’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수긍이 된다. 따라서 아이들이 활동을 기획하거나 준비하는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은 엄밀히 말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당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창의적 체험활동은 아이의 내적인 성장으로 결코 이어질 수 없다. 힐링 성격이 강한 주제나 팀원들의 구성이 느슨한 경우 이론 학습이 잘 안 이루어지고, 두려움이 아이들을 길들일 수는 있지만 성장으로 이끌 수는 없다는 저자의 진단과 처방에 십분 공감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학교 현장을 바꿀 것인가이다. 정광필은 “30%는 양보한다”는 허심(虛心)이 필요하며, “큰 귀를 가진 일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학교 현장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의 변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결국, ‘길이 곧 목적지’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두 권의 책을 보며 2014년 7월 한국을 찾은 미국 프리스쿨(free school) 운동을 주도한 교육자 크리스 메리코글리아노의 말이 귓전에서 계속 맴돈다. 그는 “우리는 저마다 초원의 들꽃 같은 야생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들꽃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트랙터와 제초기, 탐욕스러운 부동산 개발업자로부터 보호받는 일뿐이다”라고. 어쩌면 문화예술교육은 전환의 삶을 위한 야생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교육의 미래, 혹은 미래의 교육을 걱정하는 독자들에게 두 권의 책을 권유한다. 읽고, 사유하고, 행동하라.
이미지 제공 _ 사이행성, 살림터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자치와 상상력』, 『 노년 예술 수업』(공저) 등을 펴냈다.
gohy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