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에 엉킨 어지러운 전선이 횡으로 종으로 풍경을 가르는 부천 원미동의 뒷골목. 빼곡한 다세대주택이 만들어낸 굽은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붉은 벽돌의 낡은 빌라와 철제대문, 신축 공사 현장과 엉성한 시멘트 담장 사이에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입구는 대문도 없이 훤히 열려있었고 간판은 ‘일흥수퍼’를 지칭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나마 바람에 흩날리는 색색의 배너와 심상찮은 작업의 흔적들이 작은 단서가 되었다. 골목의 일상에 스민 사소한 생경함, ‘여러가지연구소’의 첫인상이었다.

삶을 연구하는 순례자
여러가지연구소는 부천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커뮤니티이다. 단체나 조직을 표방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며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래서인지 여러가지연구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들고 나는 사랑방 같았다. 처마 아래 장독이 늘어서 있는 아담한 단층 주택, 장판 위의 접이식 밥상에 일단 자리를 잡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눌러 앉아있을 법했다. 어수선하지만 편안하고, 낯설지만 정겨웠다.
“여러가지연구소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된장도 담그며 함께 노는 놀이터예요. 동네 꼬마들은 책가방을 메고 들어와 만화책도 읽고 가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요. 할머니들은 괜히 텃밭이며 장독 관리에 이것저것 참견하고 가기도 하세요.”
– 민경은 작가, 여러가지연구소 대표
이곳의 마담을 자처하는 민경은 작가는 다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여러가지연구소를 구상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작업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그녀에게 예술은 곧 자신과 세계를 탐구하는 일이었고, 이는 타인과 만나고 소통하며 함께 살아가는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통해 세계를 인식했고, 나-너는 삶 속에서 만났다.
“예술가는 삶의 연구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는 과정,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인 거죠. 저는 사실 ‘예술가’라는 단어보다 ‘순례자’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는데요. 끝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요. 사람을 만나든, 공간을 만나든, 사물을 만나든, 저에게는 그 과정이 모두 순례예요. 나와 타인이 세계를 인식해가는 과정을 탐구하는 삶의 연구자이고 싶어서 여러가지연구소를 만들게 됐어요.”

인연 따라, 사람을 만나다
부천은 민경은 작가가 학창시절부터 살아온 곳이다. 그녀는 삶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삶터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녀는 동네 탐색부터 시작했다. 종점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끝까지 가보는 버스 여행도 하고, 친구들과 부천의 유휴공간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익숙했던 부천의 낯선 모습들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때, 처음 만나게 된 친구들이 청소년들이었어요. 고강동 골목길 미술관이나 송내동 예술 텃밭 같은 프로젝트가 부천의 청소년들과 함께한 거예요. 처음에는 공간 없이 시작했다가 사람들이 모이면서 공간의 필요성이 확연해졌을 때, 원미동에 있는 비어있는 공간을 만나게 됐고, 그 인연으로 이곳에 왔어요. 저는 확실한 목적과 기대효과를 좇기보다는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었는데요. 원미동을 만나 이 공간을 활용해서 사람들을 만나며 작업을 조금씩 해나가다 보니 또 다른 인연이 생기고, 그 인연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고, 그러면서 연속적으로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소소하게 만들고 해나갔던 것 같아요.”
원미동에 터를 잡은 여러가지연구소의 활동은 안과 밖, 집과 골목을 넘나들며 이어졌다. 주제와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떤 프로젝트든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D.D.I.Y(Don’t Do It Yourself) CAFÉ’ 프로젝트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난 학생들과 함께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두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과 함께 그들만의 수레 카페를 만들었다. ‘땀땀공작소’ 프로젝트에는 한평생 작은 수선집에서 바느질하며 살아온 장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함께했다. 그의 개인적 서사를 재구성하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일상 속 예술, 예술 속 일상을 재해석해보는 작업도 병행했다. ‘밭&곁’ 프로젝트에서는 마당의 텃밭과 식물을 통해서 동네 주민들과 소통했다. 주민들은 저마다의 농사비법을 한마디씩 거들며 텃밭에 들어왔다. 모종을 나눠주거나 불쑥 곁순을 따주기도 했다. 별칭이 ‘참견 텃밭’일 정도니, 오죽했을까 싶다. 작년부터는 ‘언니네 글밭’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나 살기도 바쁜 현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업하는 일이 버겁지는 않을까.
“힘든 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과연 버티기만 했나… 생각해보면 꼭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즐겼던 것 같아요. 여러가지연구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다자성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개별성과 공동체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요.”

  • 골목 장터
  • 골목은 놀이터
삶 속에서 이어지는 의미
여러가지연구소의 활동은 공공(public) 혹은 공동체(community)를 대상으로 하지만, 작은 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분명한 사회적 역할에 목적의식을 두기보다는 인간 삶에 대한 보편적 고민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공공예술’이나 ‘사회참여 예술’과 같은 용어로 설명하기 충분치 않은 지점이 생긴다.
“여러가지연구소가 마을에 변화를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있었어요. 무언가 많이 드러나는 활동을 왜 안 하냐는 질문을 몇 번 받았는데요. 그때마다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어요. 내가 지금 여기서 함께 놀고 있어요.’라고 얘기했어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변화를 만들려하기 보다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 8년간, 여러가지연구소에는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그 사이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는지 물었더니, 의외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민경은 작가가 끝난 프로젝트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며, 운을 뗀다.
“요즘에는 프로젝트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한 프로젝트에서 건져 올린 가치들이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고 다시금 새롭게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 프로젝트는 수면 위에 돌을 던지는 행위인 것 같아요. 우리가 앞을 내다보면서 돌을 던지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물 위의 동심원이잖아요. 돌이 물 안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을 일으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죠. 안 보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들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느 때에 누구와 함께 던졌던 돌들은 지금 이런 일들을 일으키고 있구나, 또 어느 때에 누구와 함께 던졌던 돌들은 지금 이런 변화를 만들고 있구나. 그건 사실 아주 사소해요. 하지만 각자의 일상 속에서, 성장과 변화의 과정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가지연구소의 보금자리는 현재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다. 그 때문에 올해 안에 공간을 비워줘야 한다. 민경은 작가는 그간의 시간만큼 쌓인 짐들을 풀 수 있는 공간이 다시 있을지 모르겠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3개월 남짓, 그녀는 여러가지연구소를 기억하고 사랑해준 사람들과 함께 아쉬움까지 공유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파티를 준비 중이다.
“너무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공간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닫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동산 개발에 의해서 공간은 밀려나고 사라지는데, 사람들 마음에는 여전히 열려있는 채로 있으니, 함께 잘 닫으려는 거죠. 그렇게 여기서 함께 있었던 시간이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 기억이 자기 삶과 연결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위) 공공수레, 주민 모임
(아래) 땀땀 공작소, 가지가지 공작소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물 밑바닥에 조용히 침전된 것을 작품이라 부른다면, 아직 그 이전의, 물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흙 알갱이와 같은 것이 그다음, 또 그다음 작품의 싹이 되고 뿌리가 된다고 말했다. 지난 8년간, 여러가지연구소는 잔잔한 일상에 파동을 일으키는 작은 돌멩이 하나였을 것이다. 완벽하고 정돈된 플랫폼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고, 이야기가 흘렀다. 돌멩이가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올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천천히 유영하는 흙 알갱이들을 일으킬 수는 있다. 그것들이 모이고 쌓여 무언가의 싹이 되고 뿌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민경은

민경은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전공하고 다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어릴 적 자랐던 우리 동네 ‘부천’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2010년 부천시 원미동에 여러가지연구소를 열고, 지금까지 대표이자 마담을 맡고 있다. 자기를 표현하며 삶의 경험을 확장해보는 교육을 기획 진행하고 개인의 표현이 소통되는 삶의 문화를 생산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만들어가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빙스쿨 ‘D.D.I.Y CAFÉ’, 원미동 수선 장인 안토니오 할아버지와 함께한 ‘땀땀공작소’, 텃밭 프로젝트 ‘밭&곁’,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 ‘언니네 글밭’ 등 동네 주민들과의 소소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는 재개발로 떠나야 하는 원미동 공간을 함께했던 주민들과 잘 닫기 위해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영상_박영균(영상작가)
프로젝트 사진 제공_여러가지연구소
박유미
박유미_미술작가
설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은 미술작가. 2013년 개인전 《what a wonderful world》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어린이 예술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여전히 예술로 말하고 예술을 가르치는 작가 겸 강사로 목하 활동 중이다.
gomako198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