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평화’의 시대다. 북한이 남한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 참가하더니, 남북한의 정상이 말 그대로 ‘수시로’ 만나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핵 단추를 자랑하던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평화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전에도 우리 주변에 ‘평화’는 흔한 말이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이니, 임진각 평화누리니, 평화공원이니 심지어 평화장(필자가 해인사 인근에서 실제로 목격한 여관 이름이다)이니 하는 식으로 ‘평화’는 늘 곁에 있으면서도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니 너도나도 평화의 시대를 말하면서도 대체 평화란 무엇인지, 어떻게 평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현재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평화를 다음 세대에게 교육하는 일은 더더욱 절실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럴수록 삶의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온 문화예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평화의 시대를 끌어당길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평화의 가치를 되새길 근본적인 물음을 담은 두 책을 소개한다.

  • 『스물네 개의 눈동자』
    (쓰보이 사카에 저, 박현석 역, 현인, 2018)
  • 『똑똑똑 평화 있어요?』
    (데비 로빈스 저, 박현주 역, 검둥소, 2012)
평화보다 가까운 전쟁의 그늘
성큼 다가온 평화의 봄이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평화보다 전쟁에 더 익숙했던 인류의 과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상황을 담담한 필체로 그려낸 작가 쓰보이 사카에는 『스물네 개의 눈동자』에서 거대한 전쟁의 그늘 아래에서 시드는 개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이나 어머니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말했던 6학년생 고토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망처럼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지금쯤은 군인묘에 있을지도 모를 이 젊은 생명을 가차 없이 빼앗은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의 제목인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1920년대 후반 일본의 후미진 어촌 마을 분교에 부임한 오이시 선생님이 가르친 열두 명의 어린 제자들을 가리킨다. 오이시 선생님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한다. 병가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선생님을 만나러 8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가다가 지친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린 순간 선생님과 만난 일, 막내 동생을 낳다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학교에 나올 수 없게 된 마쓰에가 결국 학교를 떠나 남의 집에 팔려간 것을 알게 된 일, 동생과 번갈아 살림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고토에를 아무 말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
이들이 겪는 일들은 이런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다. 전쟁 국가가 된 일본에서 철없는 아이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고 싶어 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은 서로를 감시하거나 고발한다. 전쟁이 끝난 후 열두 명의 아이들 중 몇몇은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고, 가난을 이기지 못한 부모에 의해 팔려가거나, 병에 걸려 죽었으며, 장애인이 되었다. 오이시 선생님과 나머지 아이들이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은 열두 명의 삶을 회상할 때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쓰보이 사카에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 강력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엄마, 전쟁, 졌어. 라디오 못 들었어?”
그는 목소리까지 비장하게 흐려져 있었다.
“들었어. 그야 어찌 됐든 전쟁이 끝났다니 잘된 일 아니냐.”
“졌는데도?”
“응, 졌는데도. 이제 앞으로는 전사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 살아있는 사람은 돌아올 거야.”
(중략)
“엄마는 기뻐?”
따지듯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다이키치는 어떠냐? 우리 아버지는 전사하지 않았느냐?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하는 거야, 다이키치.”
전쟁은 살아있는 사람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갈라놓는다. 그런 전쟁은 이제 끝나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여정
한반도에 찾아온 새로운 평화의 시대는 강한 힘으로만 평화가 지켜질 수 있다고 믿었던 과거와 달리 대화와 공존을 통해 유지되는 평화, 삶의 일부분이 되는 평화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똑똑똑 평화 있어요?』는 평화를 찾아 나선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평화란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평화가 붙잡혔어요. 부술 수도 없는 유리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해요.”
“오, 이럴 수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네, 그래요. 평화의 양 날개가 벌써 축 처지기 시작했어요. 평화는 당신을 필요로 해요. 너무 늦기 전에 말이에요.”
평화는 유리 감옥에 갇혀 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평화와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주인공은 평화를 풀어줄 세 가지 열쇠를 찾는 여정에 오른다. 그 길에서 만난 고양이 ‘미스터 붓다’, 흰담비 ‘마흐마’, 오랑우탄 형제 ‘크리스’와 ‘모’, 신비한 목소리 ‘아’, 이들은 모두 평화에 다가가는 길들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인들의 상징이다. 고양이 ‘미스터 붓다’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이에요, 박쥐가 쥐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모험이라면 어떡하지요? 쥐가 고양이를 사랑하고, 고양이가 사향쥐를 사랑하는, 그것이 진짜 모험이라면 말이에요.”
고양이가 나누어준 ‘수용’을 마신 동물들은 서로에게서 지극히 싫어했던 부분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흉측스럽게 보이던 아르마딜로의 갑옷도, 지긋지긋한 바다사자의 젖은 냄새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흰담비 마흐마는 평화는 행동력과 결단력, 그리고 수완이 필요하다며,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평화 또한 훈련이라고 알려준다. 평화는 교육보다는 (싫어했던 어떤 것을) 받아들임과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똑똑똑 평화 있어요?』의 특별한 점은 ‘평화는 이것이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평화를 위한 여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수용과 연민, 사랑의 마음을 경험하는 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내 것으로 만들게 된다.
문화예술과 평화교육의 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평화의 시대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65년간 우리에게 전쟁은 멈춰있었고, 평화는 유예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전쟁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평화도 알려주지 못하는 시간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화의 봄을 맞이하려는 지금 어떻게 평화를 가르쳐 주어야 할까?
여기에서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시인‧비평가, 1893~1968-편집자 주)의 예술 교육론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20세기 유럽의 인간 소외와 전쟁 그리고 인격 파괴는 인성 불균형의 결과라고 믿었고, 인간성의 회복은 심미성의 회복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리드에게는 인간의 심미성을 회복하기 위한 예술교육이 필수적인 실천으로 ‘예술을 통한 교육(Education through Arts)’은 심미 교육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평화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리드의 예술 교육론은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교육이 기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다. “상상력은 억압된 무의식이든 자유로운 감각의 인식이든, 개인의 내면을 끌어내는 일이며, 자신이 성장한 문화에 대한 이해와 긍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곧 평화교육의 토대가 될 것이다.
평화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니, 평화를 ‘가르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드가 주장한 것과 달리 우리 사회는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의 시대에 걸맞은 문화예술교육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평화교육 일반에 관한 연구 역시 충분치 않은 상황이지만, 문화예술 분야와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다양한 교육 방법론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예술인 혹은 문화예술교육자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는 평화교육을 위한 고민과 협업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다가오는 평화의 시대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기를 바란다.
* 최혜자,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방향 모색: 허버트 리드의 ‘예술을 통한 교육’ 비판을 중심으로」, 문화정책논총 Vol 24. 문화관광정책연구원, 2010.
이미지 제공 _ 현인, 검둥소
오은영
오은영
(사)문화다움의 협력 연구위원이며, 현재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평화와 문화의 접점을 찾고 있다. 문화를 매개로 한 평화 구현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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