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EBS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함께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를 진행하면서 필자의 동료와 협업 파트너들이 지난 1여 년간 걸어온 과정을 되돌아보고, 또 가야 할 길을 곰곰이 고민해 보는 글이다.
고민과 반성에서 시작된 해답 찾기
프랑스어 ‘미장센’(mise en scène)은 무대 위에 연출된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연극용어이다. 필자는 이러한 방송의 미장센을 담당하는 공간디자이너이다.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표현주의 회화처럼 비현실적 공간이나 기하학적 표현으로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맞춰 시각적 스타일을 구현하고, 최종에는 연출가와 디자이너가 합의한 디자인을 시청자에게 전달하여 내용의 재미와 함께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방송 미술의 프로세스는 디자이너와 연출가의 감각과 취향이 주도적인 구조인 것이다.
몇 년 전 세계적 디자이너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 “내가 디자인한 것은 모두 쓸모없었다. 디자인이란 자기표현의 무시무시한 방식이다.”라며 일방적 물질주의 생산자였음에 대한 반성과 함께 디자인 포기선언을 하였다. 비슷하게 필자 역시 “나의 작업은 과연 시청자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일까? 특히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에 있어서 디자인은 어떻게 유아‧어린이들에게 예술 경험과 상상력 그리고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예술의 역할과 디자인의 사회적 책무가 커다란 고민과 반성으로 다가왔다.
여러 관련 기관과 학교를 방문하고 메일을 보내며 그 해답을 찾고자 했으나 결실 없이 시간만 보내던 중 2016년 9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진흥원)과 첫 만남이 성사되었다. 수많은 노크에도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예술은 보여주고 경험케 하는 역할과 함께 교육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와 그들이 본 세상을 예술 활동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미션으로 하는 진흥원과의 만남은 그동안 산재되어 있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방귀대장 뿡뿡이 특집> 워크숍 및 촬영현장
업무 부담과 난해한 과제를 넘어
방송 미술의 사회적 책무로서 필자 업무에 대한 고민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탐구는 진흥원을 만나면서 확장되었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과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함께 가치 있는 예술교육 콘텐츠를 연구해봅시다’라는 막연한 제안에 흔쾌히 공감하고, 동의해 준 진흥원이라는 소중한 파트너를 만나게 되었다. 몇 차례 논의를 통해 EBS 협력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선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지식과 다양한 교육커리큘럼을 가지고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알리고 실천하는 진흥원과 생애주기별 평생교육과 창의교육을 고품질 콘텐츠로 주도해야 하는 EBS는 서로 목적을 공유하였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프로젝트에 투입된 팀원들은 밀린 개인 업무 외에 추가된 일을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문화예술교육의 핵심가치를 반영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이라는 난해한 과제는 덤이었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Hou Hsiao hsien)은 추상을 구체화하고 시각화해야 하는 영화감독의 힘든 작업을 이렇게 묘사했다. 문화예술 콘텐츠 공동개발이라는 추상적 과제를 현실적 결과물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의 일도 그러한 작업이었다.
구체적인 목적이나 문화예술교육 콘텐츠에 대한 해석 등 그 간극을 좁히는 논의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문화예술교육 오프라인 현장 프로그램을 방송콘텐츠로 만드는 것에 대한 상호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였기에 그 해답을 찾는 여정은 길었다. 일례로 진흥원의 관점에선 오프라인 대면 교육을 온라인 콘텐츠로 만들 때 발생할 수 있는 교육철학의 부재를, EBS는 시청자의 재미와 흥미에 대한 내용적 요구가 가장 큰 이견이었다.

매개자 대상 영상 콘텐츠 <꿈틀> 워크숍
변화를 이끌 힘을 모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관성의 끈덕진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이것과 맞싸우는 힘이 필요하다. 작년 한 해만 30여 차례의 제작 회의와 전문가 자문회의, 수십 차례의 제작 미팅을 하며 그 힘을 모았다. 이러한 치열한 토론을 통하여 문화예술 콘텐츠는 기존 콘텐츠와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내부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문화예술교육 콘텐츠가 살아있는 교육의 가치 있는 도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방향과 성격의 위상 역시 보다 새롭게 정립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통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의 제작 방향과 목적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방송콘텐츠는 문화예술교육의 A부터 Z까지를 모두 담기보다는 시청자들에게 내재적 동기를 깨우고 열린 과정의 단계를 보여주는 선으로 재미와 교육이 함께 담기도록 제작한다.
둘째, 워크숍이나 오프라인 프로그램을 영상 콘텐츠화할 시에는 편집에서 예술교육자가 깊숙이 개입하여 예술교육철학이 잘 전달되도록 제작한다.
셋째, 러닝타임, 제작형식 등 콘텐츠 유통 플랫폼의 변화에 맞게 제작하여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다양한 실험과 도전으로 새로운 포맷, 스토리텔링을 기획하여 미래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한다.
결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협력프로젝트 설정, 기획, 제작, 방송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끌어냈다. ▲문화예술의 내재적 동기부여와 함께 음악을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여정을 실사와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한 <꼬마 별 이야기> ▲‘나의 아지트’라는 주제로 꿈꾸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글쓰기와 음악 창작 그리고 비주얼로 표현하는 <나의 아지트> ▲하나의 사물을 각각의 아티스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재해석해 새롭게 창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아이 오프너> ▲아티스트들의 예술철학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아티스트처럼 생각하기> ▲유아‧어린이들의 예술 경험과 상상력을 주기 위한 <방귀대장 뿡뿡이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 파일럿>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와 중요성을 위한 대국민 홍보 라디오 캠페인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 개막과 해외전문가의 발제와 토론 공유를 위한 중계방송 ▲향후 온라인 교육콘텐츠를 고려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오프라인 워크숍과 영상물 등 지난 1년여 간 8개의 새로운 포맷과 20여 편이 넘는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였다.

<꼬마 별 이야기> 촬영 현장
실험과 도전이 만든 예술교육 콘텐츠
단순히 잘 만들어진 정보전달 콘텐츠만이 아닌 수혜자가 우리의 콘텐츠를 통해 예술 활동에 호기심을 갖고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활동까지 이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과정에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있었다. <꼬마 별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감정변화를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평면, 조명, 소품 등 전체적 톤을 맞추는 아트디렉팅을 하였다. 주인공의 침대에서 거실과 욕실 내부의 거울까지 동시에 보여주는 풀 숏(full shot)으로 일상의 무미건조함으로 왜소해진 개인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이러한 구조로 된 공간은 없었다. 결국, 로케이션 촬영을 포기하고 콘셉트에 맞는 아파트 내부를 정교하게 제작했다. 유아‧어린이 파일럿을 제작할 때에는 기존 대본 중심의 제작 프로세스와는 다르게 예술교육자가 녹화 전 3회 이상 출연하는 어린이들과 예술교육을 함께 하여 실제 스튜디오에서도 어린이들의 자연스러운 예술놀이가 이뤄지도록 하였다. 공간디자인에 있어서도 디자이너의 일방적 형태와 컬러 제안이 아닌 예술교육 중 나타난 어린이들의 공감각적인 기호를 예술교육자와 논의하여 반영하였다.
오프라인 워크숍은 방송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에 영상제작에 있어서 더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우선 예술교육자 주도의 촬영과 편집을 하였고 교육 목적에 대해 자세한 인터뷰를 하여 교육철학이 중심이 된 온라인용 클립 영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시간에 쫓기는 방송현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기존의 영상제작 언어와도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무모하게 보이는 우리의 도전을 통해 이전의 콘텐츠에서 발견하지 못 했던 호기심, 창작의 기쁨과 예술적 영감,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필자는 필자의 업무를 시각적 스타일만이 아닌 예술교육적 매체로 접근하며 방송 미술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었다.
“정치는 동의하지 않으면 배척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포용하고 나눈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말한 포용과 나눔을 협업의 과정을 거치며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새로운 과제를 준비하면서 본연의 목적인 문화예술교육의 비전과 철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서로의 영역과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 제안 그리고 용기 있는 도전이 다시 한 번 필요함을 강조한다. 끝으로 진흥원과 EBS의 첫 시도를 통해 문화예술교육의 놀라운 경험을 함께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최원석
최원석
EBS 미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며, <딩동댕 유치원>, <방귀대장 뿡뿡이>, <만들어 볼까요> 등 유아‧어린이 프로그램부터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 <장학퀴즈>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 <자본주의>, <철학하라>, <빛의 물리학> 등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TV 프로그램의 공간을 디자인했다. 2004년 한국PD대상 미술상을 수상했고, 2009년 월드스테이지디자인엑스포(World Stage Design Expo)에 참여했다. 2015년에는 부탄방송국(BBS)과 아시아태평양방송연합(ABU)이 개최한 ‘뮤직 & 스튜디오 메이킹쇼 프로그래밍 워크숍’을 진행한 바 있다.
iota15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