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눈먼-여름> : ‘눈먼’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것에 너무 반하거나 집착하여 맹목적으로 되는 것’이다. 무엇을 못 보게 되는 이유가 특정한 것에 대한 과도한 몰입이라는 ‘눈먼’의 부정적 함의는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믿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는 긍정의 ‘눈먼’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눈먼’으로 대변되는 저돌성과 몰입, 자기 확신은 예술행위의 특성이자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오로지 그 세계만 보던 소싯적 ‘눈먼’ 시선은 어떻게 진화하여 지금·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술가로서, 예술교육자로서, 혹은 교육자로서 지금 무엇에 눈먼 상태인가? 우리는 이제 무엇에 기꺼이 눈을 부라리고, 무엇을 과감히 외면할 것인가?”

– <다시-눈먼-여름> 강의개요 중

시시한 예술의 시대
위의 질문들을 화두로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 ‘다시-눈먼-여름’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눈먼-여름’, 연수의 제목으로는 조금 낯설어서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연수명의 매력에 홀려서 신청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단 작명에는 성공한 셈입니다.
특강이나 연수 때마다 자주 인용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이 발표한 ‘시’의 한 장면입니다. 의사가 주인공 미자에게 알츠하이머에 걸렸음을 통고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명사와 동사에 대해 의견을 나눕니다. “명사가 제일 중요하잖아요.”라고 미자가 얘기를 하자, 의사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병에 꽂힌 동백꽃을 줌인 합니다. 의사와 미자 사이 대화의 단초가 되었던 진료실의 동백꽃입니다. 그 동백이 ‘조화’ 라는, 주인공으로서는 전혀 뜻밖의 정보를 의사로부터 들으면서 장면은 마무리됩니다. 극중에서 미자는 오래 전부터 시를 써보고 싶었지만 알츠하이머로 인해 명사를 잊기 시작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시를 배웁니다. 시를 처음 쓰려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붉은 꽃은 고통의 꽃, 하얀 꽃은 순결, 노랑은 영광 등의 상징들을 줄줄 외웁니다. 딸 대신 맡아 키우는 손자가 한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해서 피해 학생이 자살을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그녀는 그런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나무나 꽃을 통해 시상을 떠올리려 갖은 애를 씁니다. 그러다 맞닥뜨린 붉은 동백꽃을 보고 고통의 꽃이라고 반갑게 아는 체를 하는데, 그 꽃은 가짜 꽃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함께 보고 난 후 저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명사와 동사 중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을 꼭 던집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예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죽어가는, 이 시대 예술의 문제가 과연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제목 ‘시’는 詩이기도 하고 屍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우리의 삶에 별반 영향을 끼치는 것 없이 ‘시시’해진 문제를 다루는데 명사, 동사가 왜 중요하게 거론되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연하게도 제 어머니 또한 8년째 치매를 앓고 계셔서, “명사를 먼저 잊고 점차 동사를 잊어가게 된다.”는 영화 속 의사의 예고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를 보고 아들인줄은 알지만 이름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 단계를 지나, 아들, 딸이라는 명사를 잊고 가족, 친척이라고 하시더니, 얼마 전부터 저는 제 어머니에게 그냥 아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주치기만 하면 ‘밥은 먹었니?’, 혹은 ‘진지 자셨어요?’ 하십니다. 세세한 이름말들을 잊어가면서도 ‘개밥주기’, ‘화초에 물주기’ 등은 꽤 오래도록 챙기신 어머니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명사의 상실과 함께 세상에 대한 분별은 둔해져 가는데도 생존과 직결된 동사는 본능이 붙들고 있음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명사보다는 동사가 삶과 더 절실한 관계라는 것을 확인한 셈인데, 그렇다면 동사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명사와 동사의 중요도에 대한 질문의 취지는 예술이 죽어 가고 있는, 시시한 예술의 시대를 함께 진단해보자는 데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예술이 주목하는 것은 동물적으로 생명을 부지하는 것(exist)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live)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엔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 섬세하게 분별하는 역할을 하는 명사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주인공 미자도 명사가 중요하다고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꽃이 생화인지 조화인지도 모르는 채로 동백꽃을 붉은 꽃으로, 붉은 꽃은 다시 고통이라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단순화해 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제 어머니가 저와 맺은 생생하고 고유한 경험들을 ‘원철이→아들→가족→아는 사람’으로 뭉뚱그리면서 인식의 퇴행 현상을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여기의 예술이, 예술교육이 딱 이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예술이 드러내는 하찮음이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작가 자신이 맞닥뜨린 실질적 경험과 별 상관없는 보편적 상징을 천연덕스럽게 쓰고 있는 예술이 대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물이건 사람이건 내가 직접 마주쳐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단독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단독적 경험을 쌓아가며 우리는 계속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술에서 다뤄지는 명사는 자기 경험을 통해 완전히 소화된 명사, 자기화 된 명사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술이건 삶이건 시시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느슨한 예술 교육
명사가 잘게 쪼개져서 사소한 차이까지 이름에서 드러나는, 섬세하게 분화된 명사의 세계를 저는 꿈꿉니다. 온갖 표준화에 반(反)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끄는 것이 예술의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못마땅한 명사의 분화 사례가 있습니다. ‘교육’에서 ‘혁신교육’이, ‘예술교육’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생겨난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 사례에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기존의 명사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차이가 발생해, 그 차이를 더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새롭게 명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혁신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그냥 교육이 추구하던 것과 다르지 않고 문화예술교육이 이루려하는 것 또한 예술교육의 목표와 같습니다. 문제는 교육이나 예술교육 둘 다 왜곡된 모습을 띤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전 이름으로는 본 모습을 되살리기에 한계가 있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화예술교육’은 이미 세상 속에서 경험적으로 생산되어 새로운 이름과 함께 등장한 과거완료형, 혹은 현재완료형 명사가 아닙니다. 예술교육이 본래의 제 역할을 못하는 데 대한 문제인식과 개선 의지가 반영된 미래형 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예술교육의 정체성은 기존의 예술교육이 책임지지 못한 부분에 주목함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술교육이 삶의 맥락에서 이탈되어 실질적 삶의 변화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태생이 사회운동, 문화운동인 까닭도 그 때문입니다.
창의적 예술교육프로젝트 ‘다시-눈먼-여름’을 실행하기 몇 주 전, 초등학교 교감·교장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문화예술교육 비전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어떤 동기와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연수에 참여하는지를 미리 알고 싶어서 신청서를 꼼꼼히 읽어 봤습니다. 20여명의 연수 참가 동기는 놀랍게도 ‘역량강화, 소양증진, 동향파악, 사례수집’ 16글자로 요약됐습니다. 놀랐다는 표현을 쓴 것은 참가자 모두가 거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참가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일종의 직업적 강박이 심각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문화예술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실행의지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다른 분야 연수를 받는 태도와 다르지 않게, 오로지 ‘쓰임’ ‘활용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창의성, 감수성, 심미성 등 예술교육과 함께 항상 언급되는 단골 명사들이 있습니다.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우리는 예술교육을 하면서 그 너머의 가치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컨대 창의성 얘기만 할 뿐 창의성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왜 중요하고 어떻게 작동돼야 하는지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워크숍에서 취하는 태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수행 역량 강화는 동향파악과 사례수집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유감이라며 워크숍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예술을 통해 선생님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변화된 적이 있는지, 삶에 있어서 예술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착되고 중요한 관계로 느껴진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술이 내 일상의 삶에 끼어들 여지를 만들고, 예술이 내 삶에 개입함으로써 이전의 삶과 달라지는 성찰적 경험을 통과할 때 예술교육에 대한 꽉 막힌 인식의 지평은 열릴 수 있습니다. 삶과 단절된 기존 예술교육의 왜곡현상을 반성하지 않은 채로 문화예술교육을 학습하려는 것은 허상을 좇는 일과도 같습니다.
흔히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으로만 여기는 예술 행위는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를 동시에 완성시켜 갑니다.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입니다. 작품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달라지고 새로워지듯이 그 과정 속에서 작가 스스로도 끊임없이 갱신되는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 예술행위입니다. 예술행위는 예술가가 작품의 완성을 지배하는 일방적 행위에 머물지 않고, 작품이 예술가를 완성시켜가는 역설적 상호관계로 이어짐으로써 위대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고민이 깊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기기도 하며, 불현듯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등, 예술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자기 갱신의 고통, 혹은 희열은 결과적으로 작품이 지니게 되는 공감의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술교육 수행의 주체는 refresh 정도의 예술적 체험을 넘어서 renew, reborn 수준의 존재적 변모를 각 자의 예술 활동 속에서 끈질기게 추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세계관의 실현을 위해 불안을 직면하고 위험에 맞서가며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자기 갱신의 예술행위를 경험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예술교육은 느슨하고 한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교육의 힘은 예술 행위가 가져다주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들이 예술교육 수행자에게 지속적으로 채워지는 데서 발생됩니다.
다시 기꺼이 눈멀기
‘다시-눈먼-여름’은 이렇듯 시시한 예술의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느슨한 예술교육에 어떻게 치열함, 간절함, 절실함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 프로그램입니다. 통합프로젝트 형식의 연수로는 ‘이름-길-이름’, ‘터-무늬-터’, ‘숨-바람-숨’에 이어 네 번째인데도 기획과정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연수의 지향점을 정하고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들을 조직하려 열심히 궁리를 하지만, 결국 현장에서 실행됨으로써 비로소 계획이 완성되는, 낯선 프로세스를 매번 경험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연수의 핵심요소는 바로 참여자이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신념에 눈멀기, 자기 관심에 눈멀기, 자기 감정에 눈멀기, 자기 계획에 눈멀기 등 책임져야 할 것, 배려해야할 것, 고려해야 할 것들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것에 적어도 2박3일 동안은 오롯이 몰입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연수를 여는 강의 공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무참히 깨는 ‘체스’ 강의로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체스’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채, 참고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동안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정한 세계에 푹 빠진 작가가 무작정 이끄는 ‘눈먼 경험’에 참가자들이 어떤 태도로 반응하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일명 ‘눈먼 작가 만나기’는 체스에 대한 강의가 아니라, 예술 행위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거울 같은 퍼포먼스로 배치한 것입니다, 예술가가 올인 하고 있는 세계는 세상 일반의 관심 밖에 놓이기 십상이어서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의 관심과 지지는 눈먼 상태를 지속시켜가는 큰 힘이 됩니다. 말하자면 나의 눈먼 상태의 지속은 타인의 눈멂에 대한 인정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손끝의 감각에 의존하여 점토 빚기’, ‘눈먼 과거 돌아보기’, ‘자신의 눈멂과 눈뜸 소개하기’ 등의 활동이 차분하고 진지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낯선 각자의 경험과 관심을 자기 일처럼 보듬어보려 애쓰는, ‘동병상련’의 푸근한 기운이 강의 공간에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인문학공동체에서 공부를 해보려 문을 두드렸던 첫날, 공부를 왜 하려 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들었던 경고성 덕담입니다. 백 척 높이의 벼랑 끝에서 한발을 더 내딛고자하는 간절한 동기와 각오가 없는 공부는 한가한 지적 놀음에 불과합니다. 예술 또한 똑 같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안정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용기와 그 상황에 과감히 맞서는 눈먼 상태를 겪어 보는 활동을 마련한 이유입니다. ‘걷기’는 매우 익숙하여 불안의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일상적 움직임입니다. ‘장다리’라는 목발 같은 장치는 몇 십년동안 몸이 기억하고 있던 균형감각을 뒤흔들어서 두발로 서기와 걷기를 한 순간에 두려운 행동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키가 50cm 커지는 몸의 변화를 원한다면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의 도움을 받아 뒤뚱거리다 보면 어느새 두 발로 세상에 우뚝 서게 됩니다.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면서 눈앞의 광경 또한 전혀 다른 느낌으로 포착됩니다. 모든 참가자들이 다칠 위험을 각오하고 달려들어 다 함께 높은 곳을 걷게 되는 상황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라는 바도 아니었습니다. 앉아 있는 사람, 넘어지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높이 걷는 사람, 높이 춤추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에서 참가자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 기획 초기, 참신한 발상을 떠올리려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제목도 없이 온통 보라색으로 장정을 한 책이 문득 눈에 들어 왔습니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페소아와 페소아들」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서치, 알바루 드 캄푸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안토니우 모라, 헨리 모어, 토마스 크로스, 마리아 주제 … 모두 페르난두 페소아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페소아는 70개가 넘는 서로 다른 이름(異名)으로 엄청난 양의 글쓰기를 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내가 낯설다’며 자신에게 존재하는 모든 상이한 가능성들을 현실화하려했던 페소아의 시도에는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었지만, 페르난두 페소아에 미쳐서 페소아를 연구하고 책을 엮고 번역한 김한민이라는 일러스트 작가의 문학적, 예술적 통찰이 보라색 책 장정에서 확연히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빨강과 파랑 사이 셀 수없이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우리는 모두 ‘보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라’와 같은 통칭이나 통념 뒤에 가려진 미세한 차이들을 가려내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모순되는 충동과 기질을 지닌 ‘나’들을 마주했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와 그 치열했던 문학적 시도를 ‘보라색’ 하나로 명징하게 제시한 김한민의 해석은 이번 연수 프로그램 기획의 중심에 위치하여 많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빨간색과 파란색 물감을 섞어 각자가 원하는 보라색을 만듭니다. 정육각형의 판에 자신이 만든 보라색을 곱게 칠합니다. 다 칠해진 육각형의 판은 벽에 하나 둘씩 붙여지면서 점점 벌집 모양이 됩니다. 육각 면들이 군집을 이루면서 하나의 보라색 면과 이웃하는 여섯 개의 보라색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제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한 만큼, 자신이 만들어 칠한 ‘보라’를 더 이상 그냥 ‘보라’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00을 보라, 00하게 보라, 00하여 보라, 00으로 보라, 00처럼 보라 등 우리말의 명령형 어미 ‘보라’에 빗대어 참가자들은 새로운 ‘보라’색 이름에 자신의 의지나 기대까지도 담아 보려 애를 씁니다.

“꺼져라!! 꺼져라!! 꺼져라!!
가짜 심리학자, 진정성의 돌팔이들, 원대한 생각 한번 못해본 사람, 몰상식을 대담함의 기둥으로 여기는 사람들, 나약함 밖에는 외칠 구호가 없는 약골들, 권력 말고는 부르짖을 게 없는 초 약골들, 척추를 상실한 세련된 감수성들, 집인 양 행세하는 벽돌더미들, 깡통 인생의 기획자들,
날 둘러싸는 이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숨 좀 쉬게 내버려둬!, 창문을 다 열어젖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문보다 더 많이, 모두 열어!!”

– 알바루 드 캄푸스 ‘최후통첩’ 중

페르난두 페소아가 알바루 드 캄푸스라는 이명으로 쓴 산문 ‘최후통첩’에서 따온 외침들입니다. 이런 통렬함을 새로운 보라색의 작명에 반영한다면 육각형의 판에 보라색을 칠하는 단순한 활동이 자신의 소신을 웅변하고 주변의 못마땅함에 경고를 날리는 예술가 집단의 선언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연수시간표 상에 ‘눈먼 자들’이라는 순서로 배치한 이 활동이 마무리되면서 세상에 없던, 전혀 새로운 이름의 색들이 존재하게 됐습니다. ‘두렴없이 해보라’, ‘온화한 담대함으로 보라’, ‘있는 그대로 보라’, ‘소용돌이쳐 보라’, ‘세상을 울려 보라’, ‘결핍을 보라’, ‘꺼진 꿈도 다시 보라’와 같은 고유한 보라색의 이름들을 통해 참가자들은 다시 기꺼이 눈멀기 위한 각 자의 각오, 목표, 구체적 방법 등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있었습니다.
생생한 예술-삶-예술교육
‘다시-눈먼-여름’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저는 참가자들에게 “연수의 카테고리 이름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를 ‘교육예술’ 프로젝트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장소에서 두 밤을 자며 아무리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얘기를 주고받았더라도, 예술의 장에서는 예술의 문법과 예술적 장치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작품으로 마무리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수를 받을 땐 학생의 입장이 되고, 일상 속에선 생활인이 되며, 교육현장에선 선생이 되고, 작업장에 가서야 예술가가 되는, 분절된 삶의 태도는 예술행위와 삶의 밀착 관계를 회복해야하는 문화예술교육의 과제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영화 ‘시’에서 시 강좌를 이끄는 선생님은 수강자들에게 강좌가 끝날 때 모두 시 한 편씩을 쓰자고 제안합니다. 주인공 미자는 그들 중 유일하게 시를 써 냅니다. 무진히 애를 써도 좀체 써지지 않던 시를 그녀가 쓸 수 있게 되는 계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중 평행선을 달리며 도저히 만날 것 같지 않았던 두 개의 플롯, 손자가 벌인 사건의 은밀한 해결 과정과 시를 배우고 깨우쳐가는 과정이 하나의 레이어로 겹쳐지면서 시는 완성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 여학생의 입장에 자신을 온전히 이입함으로써 주인공에게 시 쓰기는 더 이상 삶과 분리된 창작 행위가 아니라 참회와 속죄의 절절한 발언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건 말건 태연한 ‘시시’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로 인해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길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제시인 셈입니다.
삶, 예술, 교육 그리고 눈멂, 눈뜸 등의 의미가 정신없이 교차하는 가운데 느꼈던 소감들을 주제삼아 5분 내외의 퍼포먼스로 구성하고 공연하는 것을 프로그램의 마지막 활동으로 제안했습니다. 50cm 키높이 장다리를 반드시 활용하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23명이 같은 시공간에서 벌였던 공동의 경험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짧지만 매우 감동적인 4개의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작품의 배역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장다리 걸음이 익숙하지 않았던 참가자가 과감히 배역을 자청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극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불안한 균형감을 극복하고 성큼성큼 걷게 되는 변화는 더 이상 극이 아니었습니다. 한 선생님의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혼신의 절규엔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5~6명으로 구성된 모둠별로 1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동안 무대도, 조명도, 음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강의실에서 즉석 퍼포먼스를 기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이틀 밤낮의 시간동안 직면해온 각자의 삶과 예술과 교육에 대한 생각을 온전히 투영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겐 4개의 5분 퍼포먼스가 영화 ‘시’의 주인공이 써낸 시와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습니다. 멀리서 주제를 찾고 억지스럽게 만들어낸, 극을 위한 극이 아니라 18시간 동안의 깊은 사유와 성찰의 지점들을 그대로 담아내는, 삶의 연장으로서의 예술 활동이었습니다. 낯선 만남으로 시작하여 서로의 존재를 슬쩍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마무리 활동 단계에서 느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생한 예술의 힘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지를 어렴풋이 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뒤이은 노력 없이는 공부의 소용이 없듯이 삶에 예술이 개입하고, 예술에 삶이 녹아들어야만 예술에 힘이 생깁니다. 생생한 예술은 생생한 삶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휘둘리는 눈먼 상태로부터 깨어나 자신이 믿는 가치에 오롯이 집중하며 다시 기꺼이 눈먼 세상을 살아가려는 여러 선생님들을 응원합니다. 나아가 그런 꿋꿋한 인간적, 예술가적 삶의 경험이 생생한 예술로 교육현장에서 활짝 펼쳐지게 되기를 고대하며 ‘다시-눈먼-여름’을 마무리합니다.

정원철
정원철_작가·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
1960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과(학사, 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카셀종합대학교에서 조형예술(석사)을 전공했다. 《명사와 동사 사이의 아포리즘》(17717, 서울), 《展示展 혹은 轉市展》(쿤스트독, 서울), 《지독한 노동》(소마미술관, 서울)등 작품 활동과 함께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북아현동에서 잃어버린 마르티스를 찾습니다》(2008) 총감독, 통인시장의 발견 프로젝트 《꿈보다 해몽 공작소》(2011) 기획 등 다수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커뮤니티에 기반한 미술대학 교육과정을 만들고 학생들과 함께 지역을 탐색하고 재생산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2016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아르떼 아카데미 예술강사 연수 ‘통합예술교육 프로젝트’ 와 2017 아르떼 아카데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에 강사로 참여했다.
wachj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