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경기도 광주 소재 영은미술관에서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레시던시 연계 프로그램 <나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의 6번째 시간이 진행됐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의 학생들이 어린 예술가가 되어 현직 작가와 함께 자신만의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본인들의 생각을 시각(작품)화 해보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발하게 개인 작업 활동을 하고 있는 김윤경 작가와 10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펼쳐질 전시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비가 쏟아지고 습한 기운이 맴도는 날이었다. 교육 장소에 들어서니 수업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들을 맞이하는 김윤경 작가의 목소리에서 반가움과 함께 여유가 느껴졌다. 김윤경 작가와 아이들이 함께 나누는 친근한 대화 속에서 이 수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빗속을 뚫고 한 명 두 명 아이들이 교육실로 들어왔다. 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머리랑 옷이 쫄딱 젖은 아이, 재잘재잘 떠들며 들어온 아이, 피곤함에 눈이 풀려서 온 아이 등 모두 제각각의 모습으로 나눠준 스케치북을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에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음악 대신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중학생다운 감수성이 돋보이는 대답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면 바로 마음을 닫아버리기 쉬운 나이인데, 수업을 함께하는 김윤경 작가, 함께하는 보조작가들과 뭔가 마음이 맞는 구석이 있는지 생글생글 얼굴이 밝다. 아이들이 제법 모였다. 김윤경 작가가 아이들의 앉은 위치와 화판의 방향을 하나하나 잡아주었다. 편안하면서도 적당히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이거 그리고 싶어요!”
오늘 수업의 주제는 인체 드로잉이었다. 초반 1~6회차의 경우, 작가와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시각과 관찰력을 깨워주기 위한 활동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그 마지막 시간이었다.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리는 수업에 낯설어하는 것도 잠시, 아이들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리면 되죠?”
“저는 얼굴을 좀 자세히 그리고 싶어요.”
“저는 의자부터 그리고 싶어요!”
스케치북 위의 손들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모습이었다. 인체 드로잉은 꽤나 어려운 수업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개성 있게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송의준 에듀케이터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 있게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첫 시간에는 작가들에게 그림을 안 보여주기도 하고, 그림이 보일까봐 손으로 가리고 그리는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리는 것이 맞는지, 이렇게 그려도 되는지 질문도 많이 했다고 한다. 지난 5번의 수업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윤경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교육프로그램은 기획자와 작가, 참여자의 ‘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수업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자신감은 자아존중감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아이들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거죠.”

–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레지던시 연계 프로그램> 김윤경 작가

성공적인 협업을 위해서는 작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일한 수업이라도 진행하는 작가에 따라 수업의 분위기와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차이는 작가의 경력이나 능력, 진행 방식보다도 작가의 교육관에서 비롯된다. 각자의 수준에 맞는 적절한 피드백과 일등과 꼴등이 없는 수업 분위기도 아이들이 자신있게 그림을 그리고 참여하게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고 칭찬했기에, 아이들이 도전정신을 갖고 어렵더라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 아이들 개개인에게 맞춘 배려있는 교육 방식도 엿볼 수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 작업에 몰입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다가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개인 작업노트에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주위를 환기하는 아이도 있었다. 배가 고프면 간식을 먹으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이 잘 안 풀리는지 엎드려 있다가 다시 일어나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들의 속도에 맞게 작업에 몰입해 갔다.
“익숙한 것을 깨는 것도 중요해.”
몰입과 집중의 시간이 한 바탕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서 김윤경 작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업 시간에 ‘나에게 익숙한 것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는 피드백을 받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사람을 그릴 때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었는데,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 있는 정형화 된 인물을 그리는 듯 했다. 그러던 중, 쉬는 시간 동안 김윤경 작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본인의 작업에 몰두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라웠던 부분은 아이가 작가의 피드백을 이해한 것에서 나아가 작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혼자서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해왔거나, 혹은 좋아하는 그림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창 예민한 나이임에도 이에 대한 피드백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 더 나아가 작가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작가와의 신뢰관계가 매우 잘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정도의 피드백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에서 듣는 잔소리와 다르게, 잔소리를 잔소리처럼 안 느껴지게 하는 것이 포인트에요. 아이의 그림을 보고 떠오른 수많은 피드백들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제하는 것이죠.”

–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레지던시 연계 프로그램> 김윤경 작가

김윤경 작가가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니 대화의 기본 전제는 공감이었다. 아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부분이 어려웠는지 공감한 후에 유머가 섞인 칭찬과 피드백을 덧붙였다.
때때로 아이들은 인체를 그린다는 어려움에 도움을 호소하는 눈빛으로 곤란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김윤경 작가의 피드백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작품을 이어갔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던 작가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김윤경 작가의 피드백 속에 아이들이 혼잣말로, 때론 한숨 쉬며 했던 말들이 모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노는 공간
마지막 시간은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수업으로 진행됐다. <아비뇽의 처녀들>과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며 벌써부터 재밌어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기법을 활용하여 스케치북 한 장에 작은 크기로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린 아이가 있었다. 장난치듯 신나하면서 각각의 그림들에 말풍선을 그려 넣었다. 순식간에 짤막한 만화가 탄생했다. 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을 함께 감상한 후 아이들 주변의 다양한 오브제의 모습을 정밀 묘사하는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이번 수업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업 뒷정리를 마치고 인터뷰를 하던 중, 박은규, 정은송 보조작가가 지난 시간 모아 뮤지움에 견학을 갔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아이가 박선기 작가의 작품 <산란> 앞에서 작가 작업노트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작품의 그림자가 너무 예쁘다며 그림자를 그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인체 드로잉이 만화가 되고 판타지가 섞였던 것은 어쩌다 얻어걸린 우연이 아니다. 사물과 작품을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도하고, 전시관람을 할 때도 개인 작업노트와 드로잉 도구를 챙겨간 작가들의 치밀함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 눈을 그릴 대상물에 고정시키고 종이를 보지 않고서 연속적인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즉,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은 대상물을 파악하는 정확한 눈을 가질 수 있는 좋은 훈련이 된다.

‘노는 것’ 자체를 즐기는 공간
“첫 수업 때 아이들에게 개인 작업노트를 나눠주면서 20회의 수업이 다 끝날 때쯤에야 이 노트를 다 쓸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3주 뒤, 몇 명의 학생들이 노트를 다 썼다며 새 노트를 달라고 했죠. 수업을 들으면서 그림에 자신감이 붙고 미술에 재미를 느낀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집에서, 학교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던 거예요. 아이들은 어느새 미술 자체를 즐기고 있었어요. 저는 이 수업이 놀이터 같은 수업이 되었으면 해요”

– 송의준 영은미술관 에듀케이터

놀이터에서 놀 때는 누가 시켜서 놀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그만 놀라고 말려도 논다. 영은 미술관에서 아이들은 미술을 하면서 논다. 강사가 시켜서, 부모님이 보내서 노는 것이 아니라, 미술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노는 것이다. 인체 드로잉 수업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한 학생이 이제 쉬어야겠다며 개인 작업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오일 파스텔로 정해진 주제 없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그걸 본 옆에 앉아있던 친구도 개인 작업노트를 꺼내 들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서로의 그림을 보고 웃고 떠들고 제목을 지어주기도 한다. 그림 자체가 아이들에게 이미 놀이가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면서 ‘작가와 아이들과의 단합, 아이들끼리의 단합이다’고 강조하는 송의준 에듀케이터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영은 미술관이라는 놀이터 속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단체 활동을 할 때는 왁자지껄하게 ‘함께’하고, 개인 작품 활동을 할 때는 ‘따로’인 듯 보이지만, 친구들의 작품에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작품이 잘 안 나올 때는 서로 기운을 북돋아 주면서 ‘함께’했다.

또 오고 싶은 공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레지던시 프로그램 6회차에 진행한 인체 드로잉 수업은 아이들에게 다소 어렵기도 하고 비교적 흥미롭지 않은 시간이었을 수 있지만, 기본기를 기르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꼭 필요한 수업이기도 했다. 이번 경험이 앞으로 아이들이 작업하면서 어떠한 사물이나 인물을 표현할 때 기본 골격과 비례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할 때도 이전과 비교해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필자가 본 영은미술관은 충분히 매력적인 놀이터다.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들의 교육관과 그들 사이의 합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면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 잘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예술가가 되어 본다는 기획의도뿐만 아니라 재미의 요소도 놓치지 않은 균형 잡힌 교육 프로그램이다. 어린 예술가들이 20회의 수업 동안 얼마나 멋지게 본인들의 생각을 정리하며 성장할지 기대가 된다.

김정민_예감아트 대표
김정민_예감아트 대표
대학교에서 아동학을 전공하고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했다. 현재 <예감아트> 대표로 교육프로그램 및 교구재를 개발하고, 박물관·미술관 교육 강사로 활동 중이다. 대표 교육프로그램 및 교구재 <2015 주제 따라 박물관 한 바퀴>, <짜잔 서커스 따라잡기>, <2016 이심전심-보드게임Ⅱ, 빅북 (태국, 몽골)> 등이 있다.
flking@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