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서울 한 모퉁이에서 기이한 학교가 열렸다. 이름도 독특한 ‘불확실한 학교’이다. “확실한 세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잠재력을 탐구하는 학교”라는 표제를 가진 이 학교는 어떠한 곳일까? 확실하다는 것과 불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확실한 세계의 언어는 무엇이며, 그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잠재력은 또 무엇일까? ‘불확실’과 ‘학교’라는 두 어휘가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경계 없는 소통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마련된 ‘불확실한 학교’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이하 미디어시티서울)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서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작가, 활동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8월부터 두 달에 걸쳐 총 5회의 워크숍과 6회의 세미나로 구성·진행되었다. 참가자의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온라인 출판, 전시 방법 등이 워크숍으로 구성되었으며, 현대미술에서의 기술, 환경, 신체의 담론에 관한 주제로 미디어시티서울 참여 작가들을 강사로 섭외하여 세미나를 진행했다. 여기까지는 뉴미디어와 관련된 예술 워크숍과 세미나로 구성된 특별할 것 없는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확실한 세계의 언어’는 무엇일까? 이 세계는 확실하고 명확한가?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소통되는 언어는 명확한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장애도 없이 소통하고 있는가?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무엇으로 매개되는가? ‘불확실한 학교’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통의 문제를 통해 소통 체계를 이루고 있는 매체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기술과 예술의 차이 등 다양한 문제를 소환한다.
  • <불확실한 학교 다큐멘터리> (2016, ‘불확실한 학교’ 기획 최태윤 작가, 다큐멘터리 연출 라야)
    관련링크 (영상 출처)
    https://youtu.be/JQK6AYSmbbc
‘불확실한 학교’의 워크숍과 세미나는 예술, 기술, 그리고 장애의 관계를 모색하며, 현대예술에서의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제공하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청년예술가와 활동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장애 유무, 장애의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비와 수화 통역, 문자 통역이 제공되었다. 워크숍의 기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코드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언어이지만 구사가 가능해졌을 때 오히려 그 어떤 소통보다 용이할 뿐만 아니라 경계 없는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워크숍의 전 과정을 통해 매체와 소통, 차이와 경계, 기술과 예술 등의 문제를 환기하게 된다.
워크숍에서는 단순히 코드나, 컴퓨테이션, 넷아트, 디지털 영상 활용방법 등의 학습적인 차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매체를 근간으로 기술과 소통의 문제를 제기한다. 워크숍의 내용 중 하나로 두 사람이 손바닥을 포개어 마주하고 한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상대방을 의지하며 걷는 것이 있다. 이 과정에서 손바닥은 타인과의 연장선으로서의 매체로 기능하며 그 마주함은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불확실한 학교’는 매체와 신체, 기술과 환경, 장애와 비장애 등의 다양한 경계를 모두 불확실하게 하며 새로운 감각 체계를 작동시킨다.
‘불확실한 학교’ 워크숍, 강연 장면
관련링크 (사진 출처)
http://uncertaintyschool.org/(불확실한 학교 블로그)
때로는 새롭게, 때로는 있는 그대로
이에 연장하여 흥미로운 작품이 미디어시티서울에서 선보였다.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의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에서 관람객은 기계에 녹음된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온몸을 사용해 집중과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벽에 연결된 파란색 선에 기계를 잘 마찰시키며 움직여야 한다. 이는 수화 등 다른 방식의 소통 방법이 쉽지 않음을 인식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매체’라는 것을 통해 소통하고 있음을 아주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파란 선과 무전기와 같은 기계는 소통의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예술작품으로 존재한다. 또한, 이 작품을 관람하는 참여 방식 역시 소통의 행위이자 예술이다. 이 외에도 미디어시티서울에서는 기술 매체를 통한 다양한 소통방식으로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감각 세계를 표현한다. 나아가 예술가들이 상상하는 현재와 미래의 기술세계를 그들의 감각적 표현을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 그 표현과 소통 방식은 우리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매체이자 일상의 사물, 그리고 우리의 감각적 현실을 때로는 새롭게, 때로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용하고 있다.
다시 환기해보자.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최첨단 기술 매체 등의 뉴미디어는 우리의 삶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루도 그 환경을 벗어나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의 신체는 이미 이 환경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 ‘뉴미디어’라 일컫지만, 그것 또한 소통의 매개체이자 우리 신체와 연결 짓는 사물이다. 우리는 뉴미디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하는 모든 대상과 사물이 매체임을 잊는다. 현대인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주기적으로 기사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지를 경고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발상을 창출해내며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2015, 크리스틴 선 킴)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설치 전경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평범한 일상과 사물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뉴미디어든지 일반 사물 자체든지, 그것이 단순한 소통의 도구인지 그 이상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이다. 매체, 기술, 대상을 대하는 주체에 따라 그것은 단순한 사물이 되기도 하고, 주인-노예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만들기도,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예술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는 이와 같이 매체를 도구적 수단과 매체 자체로서의 사물을 넘어선 새로운 개념인 ‘환경으로서 매체’를 제시한다. ‘환경으로서의 매체’는 일상적 삶 속에서 새로운 경험으로서 지각 가능한 세계를 구축해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개념 속에서 일상적인 사물과 일반적인 소통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은, 감각적 환경을 불확실한 것으로 느끼고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18세기 독일 문학가이자 미학자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그의 책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서 인간성 분열의 해결방안으로서 미적 교육을 제시한다. 인간의 ‘유희 충동’이 모든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격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희하는 경우에만 완전한 인간”이라고 언급한 그의 말과 더불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예술적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 랑시에르의 매체 개념을 되새겨본다면, 기술과 매체, 그리고 우리의 감각적 현실에서 ‘불확실한’ 태도, 유희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온갖 디지털 매체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예술교육의 방법론이지 않을까 싶다.
최창희
최창희
영은미술관, 예술경영지원센터를 거쳐, 현재 문화예술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를 운영하며 예술을 통한 함께 살기에 대한 정책연구 등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미술사업 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mediaaur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