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
‘바틱 스토리(Batik Story)’의 시작은 7년 전, 보르네오 섬에 있는 코타키나발루에서 마리나와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리나는 사바애니메이션센터(Sabah Animation Creative Content Center, 이하 SAC3) 디렉터로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 하는 친구였다. 우리는 금방 의기투합을 하여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미디어아트는커녕 현대미술 인프라도 없는 곳이었다. SAC3의 학생들은 국비지원을 받아 교육받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었고, 당연히 전시나 현대미술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마리나와 나는 우선 인력풀부터 만들기로 했다. 내가 한국에서 미디어아티스트들이나 현대미술작가들을 코타키나발루에 초청하고, SAC3에서 아이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국제행사를 기획 운영하는 방식도 익히게 하고, 좀 더 욕심을 내어 국제미디어아트페스티벌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5년 간 ‘플레이그라운드 인 아일랜드(Playground in Island)’라는 제목으로 꽤 열심히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최정화, 노순택, 송호준, 옥인콜렉티브, 서효정, 방&리 등 많은 작가들과 미디어랩 멤버들도 참여했다. 아이들은 처음과는 달리 능숙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프로그램 진행도 척척 해내었다. 학생으로 참여했던 아이가 SAC3의 스태프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아트페스티벌을 만들지 못했다. 아니, 만들지 않았다. 문득, 왜 이곳에 미디어아트페스티벌이 있어야 하는지 당위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좋은데, 굳이, 왜? 누구를 위해서 그런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은 것인지 자문했을 때, 부끄럽지만 개인적인 욕심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리나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마리나는 쿨하게 답했다.
“알겠어. 그럼 ‘플레이 그라운드 인 아일랜드’는 여기에서 정리하자. 그런데 혹시 괜찮다면 내가 프로젝트를 제안해도 될까?”
마리나가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는 ‘바틱’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전통 수공예 염색 기술인 바틱은 원래 자바어로 ‘점이나 얼룩이 있는 천’이라는 뜻의 ‘암바틱(ambatik)’에서 유래되었다. SAC3가 소속되어 있던 사바대학(Kolej Yayasan Sabah, 현 University College Sabah Foundation)에서 학생들에게 바틱을 가르치는데, 실질적으로 바틱 기술이 아이들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나는 친환경적인 천연 바틱의 다양한 가능성을 한국 예술가들과 함께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과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틱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2015년 겨울,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작은 바틱 공방에서 ‘플레이그라운드 인 아일랜드 : 바틱 스토리(Playground in Island : Batik Story)’가 만들어졌다. 사진작가, 패션디자이너, 잡지 에디터, 일러스트레이터, 미디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영역의 작가 및 디자이너들이 함께 했다. 바틱의 제작공정을 배우고, 어떤 방식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탐색해 보는 시간이었다. 작은 공방에서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바틱 선생님 부 이파(Bu Ifa)에게 배운 대로 바틱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바틱의 역사가 무엇인지, 어떤 재료들이 어떻게 가공되어 쓰이는지, 더 중요하게는 바틱의 중요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그저 ‘기술(skill)’만 배우고 있었다. 바틱과 그들의 삶을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알람바틱센터
  • 바틱 체험
바틱의 고향 자바섬으로
지난 12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평창문화올림픽 ODA ‘아트 드림캠프’의 일환으로 바틱의 본고장 인도네시아에서 바틱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부 이파 선생님을 모시고 인도네시아 바틱의 고향 욕야카르타(Yogyakarta)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선생님의 고향인 파수루안(Pasuruan)에서 제자들이 알람바틱센터(Alam Batik Center)를 운영하고 있는데, 제자들과 지역에 있는 소외계층의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인도네시아는 초행일 뿐 아니라 바틱에 대해서도 이제 배워가는 입장에서, 그리고 바틱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꾸려 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당연히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우리는 2016년 12월 1일부터 7일까지 바틱의 고향 자바섬으로 떠나기로 했다.
먼저 팀을 구성해야 했다. 현지 상황을 기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 사진작가(노순택, 노기훈), 영상담당(김형주, 최윤석), 도록을 제작할 디자이너(손혜인), 바틱천을 활용한 아이템을 연구할 패션디자이너(마소영), 홍보를 위해 잡지에디터(이미혜), 전시나 팝업스토어 공간구성을 할 디자이너(장태훈)가 함께 하기로 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바틱과 예전 코타키나발루에서의 작업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처음으로 합류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코타키나발루에서 활동하시는 부 이파 선생님, 그리고 알람바틱의 바틱 전문가 분들과의 소통을 위한 미디에이터(mediator,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그 일은 마리나와 그녀의 동생이자 SAC3에서 행정직으로 일하고 있는 비비가 맡아 주었다.
마리나와 비비의 도움은 컸다. 코타키나발루에서는 학생들하고 짧게라도 영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아이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우리는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몰랐다. 마리나와 비비는 현지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재료, 차량, 숙소 등 워크숍 전반의 과정을 준비해주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도네시아에서의 ‘바틱 스토리2’는 한국의 토탈미술관, 말레이시아의 SAC3,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알람바틱센터가 마치 2인3각 경기에 나선 선수들처럼 호흡을 맞춰 각자의 역할을 다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프로젝트였다.
알람바틱센터, 바틱 그리고 아이들과의 만남
아침을 먹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시골길을 따라 알람바틱센터가 있는 파자란(Pajaran) 마을로 갔다. 알람바틱센터는 사진으로 보았던 것 보다 훨씬 작고 허름했다. 아이들은 평상같이 생긴 마루에 앉아 바틱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프로그램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알람바틱 측에서는 사전에 아이들을 모집하였고, 조금 일찍 바틱의 기본 테크닉을 가르쳤다고 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은 아직 서로 어색한 듯 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온 ‘무리’들을 보고는 신기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듯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도 쑥스러워했다.
프로그램 시작에 앞서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바틱에 대한 간단한 교육이 있었다. 부 이파는 친절하게 알람바틱을 운영하고 있는 제자들을 소개해주었고, 바틱을 만드는 과정, 바틱을 보존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서 안내해 주었다. 그 후 아이들과의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한 그룹은 바틱을 제작하고, 다른 그룹은 바틱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기로 했다. 바틱을 만드는 그룹은 먼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겨울, 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먼저 종이에 그리고, 다시 그것을 천위에 옮겨 그렸다. ‘챈팅(Tjanting)’이라는 통에 녹인 밀랍을 담아 밑그림을 따라 다시 그렸다. 그림이 그려진 천은 천연염색을 통해서 색깔을 얻게 되는데 염색 과정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관계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 챈팅(Tjanting)
  • 바틱 잡지 제작 과정
눈이 없는 나라의 아이들이 생각하는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비록 눈을 직접 보거나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곳 아이들도 눈과 겨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겨울 한 가운데에서 눈을 만져보고 싶기는 했겠지만, 아이들의 그림은 달랐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아이의 겨울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저는 눈이 오는 것이 싫어요. 눈이 오면 마토아 나무에 눈이 쌓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토아 열매는 죽을 거예요. 마토아 열매가 없으면 바틱을 하기도 어려워지고…” 눈이 없는 나라의 아이들이기에 눈과 겨울을 동경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단순한 나의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잡지를 만드는 아이들도 바틱을 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신이 나 있었다. 아이들은 바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림으로 정리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바틱 재료를 찾아 그림을 그려 설명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여 간략한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아이들의 잡지는 종이가 아닌 천으로 만들기로 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그것을 다시 천에 베껴 그리고, 챈팅으로 덧그리고 염색하는 바틱의 전 과정을 그대로 밟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잡지는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엮어 의젓한 바틱 잡지가 되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일정동안 우기(雨期)로 매일매일 내리는 비 때문에 염색한 천이 빨리 마르지 않아 애를 태웠지만, 바틱 작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떠나기 전날 우리는 파라잔 마을이 속한 스콜레조(Skolejo) 시청 건물 한편에 아이들이 만든 바틱과 바틱 잡지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동네에 있는 쪽 대나무와 사무실에 있는 책상으로 설치구조를 만들고 아이들의 작품을 걸었다. 전시를 통해 짧은 일정을 보람 있게 마무리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새삼 뿌듯했다. 설치를 마치고, 우리는 하얀 티셔츠를 나눠가졌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티셔츠에 서로의 이름을 써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참가자 모두의 이름이 적힌 티셔츠가 생겼다.
누군가의 인생에 들어간다는 것
워크숍 기간 동안 참가한 아이들의 집을 방문했었다. 알람바틱센터가 있는 파자란 마을도 그리 크거나 부유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사는 마을은 더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집과 집 사이에 담도 없었고, 동네 이곳저곳에는 닭들이 자연스레 돌아다니고, 우리에는 염소들이 있었고, 집집마다 처마에는 새장이 있었다. 대중교통이 없는, 그래서 누군가 오토바이로 데리다 주지 않으면 마을에서 나올 방법이 없을 정도의 시골마을도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자, 동네사람들은 우르르 구경나왔고, 거실에 앉아 아이와 아이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집 아저씨 같은 분이 망고나무에서 망고를 따다 주셨다. 동네사람들이 푼돈을 모아 음료수를 사다주시기도 했다. 거실이라 해 봤자 카펫 하나 덜렁 깔려 있고, 그 흔하다는 TV는커녕 제대로 된 가구조차 없었다. 거실에 깔았던 카펫 역시 근처 사원에서 빌려왔을지도 모른다고 부 이파 선생님은 말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한 아이는 바틱을 열심히 배워서 돈을 벌겠다고 했다.
워크숍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할 아이들이었다. 워크숍은 전시와는 다른 경험치를 준다. 하지만,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우리가 함께 한 일주일은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과 추억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달린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바틱 잡지 결과물
  • 전시회 이후 참가자들과 함께
여담. 바틱 전문가 페리 아저씨 이야기
페리아저씨는 부 이파 선생님의 제자이다. 그는 4년 전 파라잔 마을로 들어와 다섯 명의 바틱 전문가들과 함께 알람바틱센터를 열고 인근 마을 주부들에게 바틱을 가르쳤다. 자신들에게 주문이 들어오면, 일감을 마을 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도네시아의 대다수의 주부들은 집안일을 주로 한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여자들이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다. 페리 아저씨는 그런 주부들에게 일거리를 주었고, 적게나마 수입이 더 생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에게 바틱 재료로 쓰이는 작물을 키우도록 장려했다. 예를 들어 망고나무를 심어서 열매는 먹거나 내다 팔고, 안 쓰는 잎들은 모아서 알람바틱센터에 재료로 파는 방식이었다. 이 역시 조금이나마 마을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알람바틱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재료들은 마을에서 해결한다. 페리 아저씨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바틱을 익혀 그들의 삶이 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페리 아저씨에게 바틱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만은 아니다. 바틱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와도 같고, 대단히 영적인(spiritual) 일이라고 했다. 실제도 바틱 주문을 받으면 몸을 정갈히 하고 한동안 사람들과의 만남도 끊으면서 주문자의 바람이나 이야기에만 집중하기도 한다고 했다. 철저하게 자본에 좌우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어쩌면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과 웃음을 보면서 요즘 같은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누군가의 인생에 들어가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만남들은 서로에게 큰 행복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우리의 짧은 일주일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오는 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왔지만, 돌아오는 2월 파라잔 마을에서 만난 열 명의 아이들이 곧 한국을 찾을 것이기에 웃으며 돌아설 수 있었다. 햇살이 눈부신 코끝 쨍한 겨울을 아이들은 어떻게 경험할까.
평창문화올림픽 ‘아트 드림캠프’는
추운 겨울이 없는 남반구 국가 아동·청소년들의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추진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2016년 11월 5일(토) 베트남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총 4개국에서 한국의 예술가들이 동계스포츠로부터 소외된 남반구 국가를 직접 방문해 현지 아동‧청소년 및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예술교육을 진행했다. 베트남, 콜롬비아, 말라위, 인도네시아 등 4개국에 분야별 전문 예술가들이 현지를 직접 방문하여 인형극, 현대무용, 음악 및 시각예술, 공예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또한 2017년 2월에는 현지 참여자들을 평창으로 초청해 국내에서 4개국 교육결과물이 하나의 작품이 되는 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사진 제공 _ 토탈미술관
신보슬
신보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부터 전시기획을 시작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아트센터 나비에서 근무했고,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미디어시티서울) 전시팀장(2003~2005), 의정부디지털아트페스티벌 큐레이터(2005), 대안공간 루프 책임큐레이터 등을 역임했으며,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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