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열린책들, 2016)
  • 『나이듦 수업: 중년 이후 존엄한 인생 2막을 위하여』
    (고미숙 외, 서해문집, 2016)
요즘 노년 대상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노년 문화예술(교육)을 특화한 정책사업이 활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인 혹은 노년에 대한 우리 안의 인식과 관심은 노인 ‘문제’로써만 접근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적 성찰이 요청된다. 노인은 언제나 ‘문제’의 대상이 될 때 정책적 대상으로 취급되었지, 한 사람의 오롯한 ‘존재’로서 이해되고 존중을 받는 사회문화정책은 여전히 부재하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 혹은 노년에 관한 담론 자체가 사실상 전무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노인 ‘문제’가 아니라 노년 ‘존재’로의 획기적인 시선 전환이 없고서는 노년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예방적 사회정책의 형성은 간단치 않으리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갈수록 세대전쟁 양상마저 띠는 세대 간 대화 부재 상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걱정스럽다.
노인 혹은 노년은 누구인가. 그리고 노인 혹은 노년은 무엇을 욕망하고, 노년은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스웨덴 여성작가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Catharina Ingelman-Sundberg)가 쓴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2013년, 한국어판 2016년 출간)라는 소설은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노인요양소에 거주하는 전직 체육 교사 출신의 79세 메르타 할머니이다. 메르타 할머니는 체육 교사 시절 불의(不義)에 맞서 자주 반항을 하며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꿈꾸어온 사람이다. 그런 메르타 할머니의 삶이 한순간에 변한 것은 ‘고아원 같은’ 노인요양소에서 생활하면서부터이다. 메르타 할머니가 “여기, 노인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 버렸을까?”라고 자문자답하는 내용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요양소 같은 이른바 제도화된 복지시설에서 철저히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메르타 할머니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메르타 할머니는 요양소의 은방울꽃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노인강도단을 결성해 박물관의 그림을 훔치고, 은행을 털어 ‘강도 행각’을 벌이며, 마침내 외국으로 도망을 친다.
왜 메르타 할머니는 감옥에 가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것은 ‘빛나는’ 제3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8시 취침, 간식 금지, 산책은 어쩌다 한 번만 해야 하는 노인요양소에서 썩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메르타 할머니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더 들어보자. “나이 많은 노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이 날도둑놈들이 활개를 치는 사회에서 79세의 노인 메르타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소설은 일종의 범죄소설 형식을 취하지만, 시종여일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메르타 할머니를 비롯해 스티나, 안나그레타, 천재, 갈퀴 등 5명의 남녀 혼성 노인강도단의 범죄 행각이 진행될수록 작가의 의도가 위협받고 있는 소수자로서의 노인(혹은 노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환기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작가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가 강도단의 리더이자 소설의 주인공 메르타가 ‘자신과 닮아 있다’고 술회한 것에서도 작중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스웨덴에서만 4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미 40여 개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소설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는 이른바 1백세 시대를 의미하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 노년정책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하는 작품이다. 나는 특히 메르타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었던 곳은 인스턴트식품으로 배를 채운 다음, 플라스틱 커피잔을 손에 들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노인요양소가 아니었다고 술회하는 대목에서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이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품위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품위 있는 삶은 단순히 정책의 ‘수혜자’라는 관점에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다는 점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정책의 ‘대상’으로서 노인을 대상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정책의 ‘주체’와 삶의 ‘주인공’으로서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맥락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은 메르타 할머니의 진술은 품위 있는 노년의 삶과 깊은 관련을 맺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옛날에는 이 요양소에서도 노인들이 각자 작은 개인 부엌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시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면서 새로 온 주인이 이 개인 취사 시설을 없애 버렸다.” 결국,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타율적인 삶이 아니라, 노년 스스로의 주도성을 어떻게 일상적 삶에서 구현할 것인지가 관건인 셈이다. 노인복지관 등에서 현재 시행하는 프로그램 공급 위주의 노년 문화예술교육에서 전적으로 탈피해 노인들이 주도하는 방식의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충북 옥천군 안남어머니학교,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활동하는 뭐라도학교의 사례는 그런 의미에서 참고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 ‘나이듦’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노년으로 살아도 괜찮은 사회는 노인친화도시를 선언하면 저절로 보장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책 『나이듦 수업』(2016)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 2014년부터 세대 간 문화적 공유지대의 접점을 형성하고자 <오버 더 시니어>라는 정책사업을 진행하면서 느껴온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다. 그것은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척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심리학자 김태형이 지금의 노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라고 역설하는 주장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한 사람의 노인 혹은 노년의 삶을 이해하고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삶의 이력(履歷)을 온전히 주목하는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력이라는 한자에 나오는 ‘이(履)’ 자는 신발이라는 의미이다. 이력이란 결국 ‘신발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분 한 분의 노인이 걸어온 신발의 역사를 더듬으며, 삶의 주인공으로서 관계 2막을 연출하며 살아갈 수 있는 노년 문화예술교육은 어떻게 가능한가. 해외로 도피하는 메르타 할머니 일행이 스톡홀름 경찰청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 내용은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정계에 입문하려는 자는 남자든 여자든, 적어도 6개월 동안 노인요양소에 와서 일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같은 구절이 그렇다. 인간에 대한 질 낮은 인식에서 수준 높은 교육-활동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노년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도전해야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팔순의 메르타 할머니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일러준 지혜였다.
이미지 제공 _ 열린책들, 서해문집
고영직
고영직
문학평론가.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자치와 상상력』(공저)이라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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