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서둘러 세찬 소나기를 뚫고 여기저기 도로공사 구간과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물 맑은 경기도 양평에 어렵게 도착했다. 아담한 세월초등학교에 들어서자 다행히 비는 멎었고, 막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와 발걸음으로 활기참이 느껴졌다. 교정 곳곳에는 고사리 손으로 직접 가꿔 제법 영근 고추, 가지, 오이로 빼곡한 텃밭과 해마다 벽면을 다양하게 채워나가는 타일아트, 시계탑을 채색한 벽화, 반짝이는 은박지 옷을 입은 석고상, ‘짜증’, ‘답답함’ 등 아이들이 밟고 싶은 단어들로 채워진 계단 등 아이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분교, 폐교 위기에 처해있던 학교가 어떻게 새로운 활력으로 되살아났을까.
운명적 만남
전교생 50명 안쪽이던 시절, 세월초등학교는 폐교 위기에 몰렸고 학교를 살리자는 목소리가 교사들, 동문들, 마을주민들을 중심으로 커져갔다. 2007년 부임했던 남궁역 교사는 그 시절을 기억하며, 하고 싶은 교육을 하자는 마음으로 교사모임 ‘작은교육연대’를 통해 교육과정을 만들어갔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교사연수를 통해 교육연극을 체험했던 것이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제가 수학, 이과 쪽을 전공해서 사실 예술은 늘 멀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2007년 연수과정에서 연극을 통해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는 놀라운 경험을 했죠. 그 후 예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예술로 아이들을 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수 때 경험한 것을 하반기에는 직접 아이들에게 적용하기도 했고요.”(남궁역)
2007년 교사연수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교육연극연구소 프락시스 김지연 대표(현재 세월초등학교 문화코디네이터)와 의기투합하여 2008년 마을학교축제를 기획했다. 축제를 매개로 3월부터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전문가가 결합하여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그렇게 만들어져 진행된 교육과정을 마을과 학부모, 학교가 함께 공유하는 소통의 축제로 만들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서로의 마음이 모여 시작된 축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농촌 지역의 새로운 교육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로 나가는 학교
마을과 학교를 살리겠다는 노력으로 출발하여 2010년 혁신학교, 2015년 예술꽃 씨앗학교에 지정된 세월초등학교는 주제중심 문화예술교육을 다양한 전문가와 교사들이 협업하여 시도하고 있다. 학교가 집중하는 방향은 ‘커뮤니티 아트로 만들어가는 마을-학교’로, 작년에는 ‘마을-공간’ 중심의 탐색을 시도하면서 배움의 공간을 확대하고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 공동체 예술)를 실험해보았다. 올해는 ‘마을-관계’ 중심으로 마을과 학생들 삶의 관계를 확대하려 한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프로젝트형 공동체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학기별로 운영하고, 수업은 매주 목요일로 집중하여 학년·분야 간 통합운영이 자연스럽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취재차 방문한 날은 마침 ‘예술꽃데이’가 진행되는 목요일. 1학년 교실은 마을연계 이야기 구성을 통해 무대소품을 만들고, 2학년은 발도르프 교육(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창한 교육 사상) 기반 습식수채화를 직접 익힌 남궁역 교사의 수업이 한창이다. 3학년은 공동체예술 수업의 일환으로 담임교사와 김현주 강사(시각예술가)가 화분 만들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고무장화부터 페트병, 재활용 화분까지 다양한 소재에 물감으로 채색하느라 정신이 쏙 빠져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보기보다 간단치 않았다. 마을을 직접 탐색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화단의 용도를 함께 궁리하면서, 3시간여 협의 끝에 설치 장소를 학교 계단으로 결정했다. 화단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관리 계획도 세워봤다. 교사들과 전교생의 관심과 참여를 얻기 위해 화단조성계획 광고지를 만들어 돌렸고 이들로부터 화분으로 쓸 재활용 소재들을 한보따리 받아두었다.
2015년부터 자문위원으로 세월초등학교를 지켜봤던 김현주 강사는 장소특정형 작업과 커뮤니티 아트 작업을 주로 해왔다. 학교가 배움터이자 놀이터인 마을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집중하면서 ‘공동체예술’ 과목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공동체예술에 대한 접근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교육의 목적은 “마을의 익숙한 장소, 그 일상성을 미술이라는 낯선 매개를 통해 특별한 관계와 경험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로 물드는 마을
‘마을-학교’의 구성원들은 교사와 전문가,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를 포함한 마을 주민을 포괄한다. 현재 세월초등학교 인근의 마을주민은 300~350가구 정도인데, 여기서 나고 자란 원주민 외에도 교육 때문에 시내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있다. 사물놀이 등 마을 주민이 중심이 된 동아리 활동도 늘어나고 있는데, 2014년 마을회관 2층을 리모델링한 ‘마을사랑방’에서는 마침 마을 주민 10여명이 가죽공예 활동을 하느라 분주했다. 이곳은 카페와 공방 역할을 하고 있어 세월초등학교 아이들도 자주 들락거리는 마을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근처에는 6월 29일 오픈한 마을갤러리 ‘세월 달빛 갤러리’가 있어 마을 짚풀 달인 임경재 어르신의 짚풀공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갤러리는 최근 강상면사무소에서 제공한 컨테이너를 이용, 마을 주민의 힘을 모아 오픈했는데 부녀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기획 운영될 예정이다.
시간을 내어 둘러본 마을 곳곳마다 세월초등학교 아이들의 흔적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이들이 올라가기 좋게 생긴 나무 주변으로 형성된 자연 놀이터는 가을이면 마을축제 무대로 탈바꿈한다. 모두를 품어주는 넉넉한 할머니의 성품을 느끼게 하는 ‘느티나무 같은 할머니’,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는 옛 빨래터에 붙은 ‘물은 강으로 가고 싶다’ 같은 시적인 문패는 2014년 학생들이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뚝딱뚝딱 작업해서 붙여둔 작품들이다. 마을 어귀의 버스정류장은 목공 수업의 결과로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양평군에서 아이들 작업물 바로 옆에 공식정류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은 어느 쪽 정류장을 이용할까?
교사의 내적 수요부터 유연한 시스템까지
그동안의 노력으로 세월초등학교는 폐교 위기에서 벗어났고, 현재 학년별 1학급씩 총 6학급, 전교생 84명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을 살리기 위한 동문회와 마을 설득 작업도 있었지만, 핵심은 결국 교사들과 교육과정에 있었다. 흔히 교육 수요에 대한 이해를 최종 수혜자인 교육 참여자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초등학교 사례는 이와 더불어 학생들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교사들의 내적 수요, 즉 그들의 드러난 혹은 잠재된 열정과 욕망을 발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마음 맞는 교사와 전문가의 협업으로 새로운 자극과 방법론을 개발할 기회를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교사는 해당분야 전문가의 작업을 관찰하고 아이들의 구체적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피드백하면서 함께 교육방향과 교육과정을 함께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교사 중심, 주제 중심의 교육과정은 예술의 장르적 구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성과라면 우선 선생님들의 행복감을 얘기할 수 있어요. 학교에 문화가 쌓이는 과정에서 새롭게 배우는 것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낍니다. 공립학교 교사다보니, 중간에 2년 동안 다른 학교에 있었는데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허전함을 떨칠 수 없었죠. 그래서 올해 다시 세월초등학교에 돌아왔습니다.” (남궁역)
남궁역 교사는 뜻 맞는 교사, 전문가들을 만난 것도 행운이고 이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고 자부하지만, 교사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를 협의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주기적으로 전근할 수밖에 없는 공립학교의 특성상 교사 개인 중심의 활동은 지속성에 한계가 있기에, 유연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과제다.
적정 규모에서의 삶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하는지도 모른다. 300가구 정도의 마을, 84명의 학생과 11명의 교사, 1명의 씨앗가꿈이와 8명의 전문강사는 ‘마을-학교’라는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어준다. 적정 규모에서는 교육 수요도 좀 더 구체적 삶에 밀착할 수 있기에, 생활예술과 문화예술교육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마을과 학교의 경계를 트는 세월초등학교의 ‘마을로 나가는 학교, 예술로 물드는 마을’의 실험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예술꽃 씨앗학교는
전교생 400명 이하의 소규모 학교에 최대 4년간 전교생의 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선정된 학교에는 전문 예술강사 활용, 교육기자재 구입, 예술 현장 관람 등을 위한 예산이 지원된다. 학교는 국악, 관현악, 미술, 연극, 통합예술교육 등 자율적으로 분야를 선택해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학생들은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과 창의성, 표현력과 협동심을 함께 키운다. 또한 농산어촌 등 문화소외지역의 학교들을 중점적으로 선정하는데, 학교와 지역사회 연계 차원에서 학부모 강좌와 재능 나눔 활동 등을 통해 지역 공동체에도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현재 전국에 총 50개 예술꽃 씨앗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 예술꽃 씨앗학교 홈페이지 http://flower.arte.or.kr
사진제공 _ 세월초등학교
이선옥
이선옥
예술교육과 예술경영, 정책과 현장을 가로지르며 일해 왔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 하자센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문화재청,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에서 프로그램 기획홍보, 연구조사, 컨설팅 업무를 담당했다.
이메일_ dal0310@naver.com 블로그_ http://blog.naver.com/dal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