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농, 문명의 뿌리』

    『소농, 문명의 뿌리』(웬델 베리, 한티재, 2016)
  • 『나비문명』

    『나비문명』(마사키 다카시, 책세상, 2010)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위대한 작가 웬델 베리가 벗의 죽음을 추모하며 한 말이다. 미국 1세대 환경운동가로서 팔십 평생을 살아온 웬델 베리의 사상이 집약된 표현이다. 전부를 걸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투기꾼’과도 같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인 자작(自作) 소농(小農)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웬델 베리의 시적 선언이라고 간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웬델 베리의 이러한 열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이 남아 있다면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경제성장 중심의 근대 신화는 위력을 더하고 있다. 나쁜 이야기를 유포하고 권장하는 ‘나쁜 언어’는 제 힘을 잃지 않고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문제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모니터링할 때, 그런 나쁜 언어가 유포하는 나쁜 이야기를 자주 접하곤 한다는 점이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질 나쁜 관점을 내면화하며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의 삶과 문화를 철저히 옹호하고 묵수(墨守)하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볼 때마다 아득해진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 ‘환경교육’ 현장에서조차 그런 쓰디쓴 경험을 할 때가 적지 않다. 환경교육을 표방하지만, 어린 미적 인간에 대한 사유와 실천적 교육방법론은 보이지 않고, ‘무늬만 환경교육’인 양상을 보여주는 현장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생태철학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잘못된 언어 사용이 갖는 문제들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왜 잘못된 언어 사용이 문제인가. 그것은 말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행동을 낳고, 행동은 변화를 낳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나쁜 언어의 사용이 갖는 ‘오만한 무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 작가가 바로 미국 작가 웬델 베리와 일본 생태사상가 마사키 다카시라고 할 수 있다. 웬델 베리의 첫 저작 『소농, 문명의 뿌리』(1977년, 한국어판 2016년 출간)와 마사키 다카시의 『나비문명』(2009년, 한국어판 2010년 출간)은 생태철학적 전환에 값하는 훌륭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대지(大地)의 청지기로서 땅을 지키고 농적(農的) 순환의 삶을 지키려는 위대한 보수주의자로서의 풍모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보수주의는 자신의 이익과 재산만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웬델 베리는 『소농, 문명의 뿌리』에서 인간 생존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사람이 문화적으로 결합될 때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대화·산업화·도시화는 덕성의 위기, 농업의 위기, 문화의 위기를 낳으며, 더 이상 ‘지탱 불가능한’ 생태 위기의 상황에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농업과 자연이 상실되고, 그에 따라 농업과 자연에 근거한 절제와 겸손의 문화 또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문명의 뿌리가 뽑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웬델 베리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같은 위대한 고전 텍스트들을 원용하며 ‘집을 향한 여행’에 나서자고 제안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문명의 현재는 물론이요, 이 문명의 파괴적 미래에 대해 생각하자는 것이다. 나는 근본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 삶과 문화의 ‘근본(根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웬델 베리의 제안을 깊이 경청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웬델 베리의 이러한 제안은 일본 생태사상가 마사키 다카시의 ‘그라운딩(Grounding, 회귀)’ 개념과 통한다. 마사키 다카시는 젊은 시절 적극적으로 도쿄적 질서에서 탈출하여 일본 남단 규슈의 시골에 가서 나무를 심고 한국과 일본 각지를 순례하며 ‘전쟁국가 일본’을 성찰한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삶에 대해 침몰하는 배에서 스스로 내리는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드롭아웃(drop-out)’이라고 풀이한다. 다시 말해 제 안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탈정(脫井)의 사유와 실천적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그가 “학교에 ‘못’ 간다가 아니고 ‘안’ 간다였다”고 자기 인생의 방향전환을 술회하는 대목이 퍽 강렬하다.
그리고 마사키 다카시는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유지되는 파괴적 자본주의 문화를 상징하는 ‘애벌레 문명’에서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나비 문명’으로 방향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인이 존재의 기반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그라운딩’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라.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드는 기쁨을 역설하는 그의 심오한 생명평화사상은 아이들을 위한 미적(생태적) 교육 현장에서 좋은 참조점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모든 것을 인간 편이 아니라 숲(자연)의 편에 서서 보려는 열린 감수성이야말로 문명 전환을 예감하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와사카 만(灣)을 순례하던 중 한 젊은이가 “저는 이제 바다 편에서만 사물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감동적이다.
웬델 베리는 “삶의 방식은 삶을 통해서만 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마사키 다카시는 “삶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다보면 유기농업이든 대안 교육이든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두 사상가의 이러한 ‘어록’은 결코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니리라. 결국, 우리는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좋은 문명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삶인지 치열하게 자문자답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없는 문화예술교육은 이른바 ‘기능교육’의 악무한(惡無限)에 갇히게 된다.
두 사상가의 사유와 실천을 나침반 삼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개안(開眼)적 깨달음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사키 다카시가 소개한 일본 시인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 「대어(大漁)」를 함께 읽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그는 이 시의 의미를 ‘바다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바다로서’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나비문명’의 에콜로지적 감수성이라고 간주해도 좋으리라.
아침 노을 작게 타오른다
대어(大漁)다
커다랗게 날개 펼친 멸치떼
대어다
바닷가는 축제같이
보여도
바닷속에서는
몇만의
멸치떼가 아파하겠지
_ 가네코 미스즈 「대어」
이미지 제공_ 한티재, 책세상
고영직 _ 문학평론가
고영직 _ 문학평론가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최근 『자치와 상상력』(공저)이라는 책을 펴냈다.
gohy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