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특별한 공간 경험은 필요하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 환희, 두려움, 편안함, 쓸쓸함 같은 일상과 다른 느낌을 온몸으로, 때로는 편안하게, 어떤 때는 소름끼치게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은 어떤 곳들이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니 아무도 없는 새벽 거리, 텅 빈 예배당, 폐허가 된 아파트 현장, 지하 방공호, 한강 다리 밑, 영등포역, 교회의 종탑, 교회 지붕, 옥상이 떠오른다. 이외에 공간과 장소를 다르게 경험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한걸음씩 오르면 달라지는 풍경 – 10칼로리 타워
전망대를 싫어하는 아이와 어른은 없다.(고소공포증 환자라면 예외다.) 아이들은 부모의 걱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한다. 어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힘들게 땀을 흘리고 헉헉 대며 높은 산 정상 전망대까지 오른다. 나무 가지를 타고 높이 오르는 동네 형이 부러웠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나무 위로 오르는 상상을 해보지만 무거워진 몸을 탓할 뿐이다. 천천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변하는 조망과 조감을 경험해본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공간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태국의 시암 시멘트 그룹(Siam Cement Group)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영감을 주는 전망대를 세웠다. 전망대가 세워진 곳은 방콕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방사엔(Bangsaen) 해안가 시민공원. 이 전망대는 태국의 유명 건축 집단인 슈퍼머신 스튜디오(Supermachine Studio)가 설계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에 대다수 어른들은 소외되는 문제를 느끼면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아이와 달리 부모들은 다소 어색하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이 전망대를 세웠다. 높이 오르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와 어른은 없기 때문이다. 시멘트 계단들로 만들어진 미로로 구성된 전망대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여러 갈래의 경로가 있다. 아이나 부모들은 다양한 경로를 선택하고 조합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며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 정상까지 오르면 대략 10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기 때문에 이후 이 전망대는 ‘10칼로리 타워(10㎈ Tower)’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전망대를 오르며 부모와 아이는 공간을 함께 즐기고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지역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마을과 지역 어느 곳이나 같은 이유로 이러한 전망대는 필요하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시선 – 키싱 캔버스
이제 낮은 곳으로 가 보자. 몸을 굽혀 낮은 곳을 볼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다. 낮은 곳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이 있다. 작은 미물일 수도 있고, 세상을 만들어가는 서민들일 수도,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일수도 있다. 낮은 곳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균형 잡힌 시선으로 온전하게 세상을 볼 수 있다. 침대 밑, 테이블 아래, 그 어떤 낮은 곳을 기어가도 그것은 분명 조금은 불편하지만 낯설고 즐거운 체험이 된다. 일본 작가 아라카와(Ei Arakawa)가 테이트 모던에서 보여준 퍼포먼스 키싱 캔버스(Kissing the Canvas)는 예술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아라카와는 유타 퀘서(Jutta Koether)의 그림 라 팜므(La Femme)를 복제한 대형 캔버스를 낮게 설치해두고 사람들이 그림을 보며 그 밑을 지나가도록 했다. 이 엉뚱한 퍼포먼스는 박물관이 예술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하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었지만 우리에게 다른 방향의 영감을 준다. 의도적으로 낮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가능한 놀이는 무엇일까. 우리의 시선은 낮은 곳을 통과하며 어떤 것들을 발견하게 될까. 시야는 좁아지는 대신 시선은 집중하게 된다. 거대하게 확장된 세상은 결국 작은 디테일들로 만들어졌다는 걸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신비로운 안개 속 마법의 숲 – 쇼와 공원 안개 숲
독한 줄도 모르고 소독 연막차를 쫓아 달리며 마냥 즐거워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뿜어져 나오는 연막에 좁은 골목과 초라하기 그지없던 가난한 동네의 집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이들은 연막이 만드는 신비로운 공간 속으로 숨어든다. 어느새 골목길은 마법의 숲이 된다. 도쿄의 쇼와기념공원(国営昭和記念公園)은 어릴 적 연막차를 쫓던 것과 비슷한 추억을 가졌을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에게 환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공원의 안개 숲(fog forest)에는 15분마다 인공 안개를 뿜어내는 거대한 10미터 길이의 금속관이 있다. 이 관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오면 순식간에 숲 속 공간은 희석되고 감춰지면서 예술적이고 조형적인 신비로운 전경으로 바뀐다. 안개가 가득 차는 이 숲에는 지구라트 피라미드(ziggurat pyramid) 형태로 만들어진 흙 둔덕들이 줄 지어 있다. 안개는 그 어떤 공간도 희석하고 숨기어서 누구나 상상으로 뛰어다니게 하는 마법임이 분명하다. 이 안개 숲은 건축가 아츄시 기타가와라(Atsushi Kitagawara)와 안개 예술가로 유명한 후지코 나카야(Fujiko Nakaya)의 공동 작품이다.
  • 쇼와 공원 안개 숲
관련링크(이미지 출처)
http://www.gensojapan.org/in-the-fog/
거대한 팝업북 속으로 – 아트 플레이스케이프
싱가폴 국립미술관은 최근 케펠(Keppel) 그룹의 후원을 받아 예술교육센터(Keppel Centre for Art Education)를 열었다. 케펠 예술교육센터는 아이는 물론 어른들까지도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들며 한순간에 줄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공간이 되었다. 산드라 리(Sandra Lee)가 마치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만들어 낸 아트 플레이스케이프(Art Playscape)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체험 공간들 때문이다. 특히 아트 플레이스케이프는 거대한 팝업북 그 자체로 주목을 끈다. 5~12세 아이들을 위한 이 공간은 1미터 높이의 나무집 문을 통과할 수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신비로운 마법의 숲을 지나고, 위험한 강을 건너고, 미로를 헤매고, 격랑 이는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동화 속으로 걸어간다. 아이들이 넋을 잃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예술적 공간”은 언제나 그런 곳이 있는 사회의 축복이다.
김성원 _ 적정기술, 기술놀이교육 연구가
김성원_적정기술, 기술놀이교육 연구가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매니저이자 (사)한국흙건축연구회 기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집』(들녘, 2009),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소나무, 2011), 『화목난로의 시대』(소나무, 2014). 『근질거리는 나의 손』(소나무,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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