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에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월요일 아침, 급기야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스산함을 느끼며 장충체육관으로 향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이런 날씨에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댄스파티’를 열어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제 곧 ‘입시지옥’에서 벗어날 테지만 잔뜩 억눌려 있을 그들이 졸업과 동시에 들어설 이 땅의 현실은, 꼭 지금 날씨처럼 흐리지 않은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춤이라도 추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그야말로 생기 넘치는 청소년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도 십대는 좋은 시절이 아닌가 하는, 지나가 버린 청춘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참으로 ‘꼰대’다운 발상을 하면서 행사장에 이르렀다.
깨어난 문화감성
이런 생각이 부질없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충체육관 지하 2층의 보조체육관 입구에 이미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행사를 기다리는 그들은 날씨의 상태 따위와는 무관해 보였다. 지나치게 부산하지도 않았지만 음침한 구석도 없었다. 새삼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니 저마다 생김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그들을 하나의 집합체로 규정하는 것은 마치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본다. 흔히 고3이라면 입시와 뗄 수 없는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어른들의 시선이다. 그들에게도 놀이와 취미, 감각과 기호 등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감성과 교감의 방식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 ‘세대 차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에 성인은 종종 청소년의 문화적 욕구를 무시한다. 성인 자신도 겪었을 청소년기의 충만한 감성을 잊어버린다. 그래, 오늘 이들에게 선사하는 댄스파티는 혹여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개중에 ‘노는 아이’ ‘뭘 좀 아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되는 ‘2015 고3·수험생 대상 문화예술교육 상상만개’는 수험생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수능을 마친 이들에게 문화예술을 매개로 청소년의 감성과 언어를 확인할 수 있는 다채로운 ‘판’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11월부터 전국 5개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이날 장충체육관에서는 안은미 컴퍼니가 ‘고3 졸업파티’를 열고 수험생들을 맞이했다. 노는 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안은미 안무가의 명성을 참가자들이 알 리가 만무하겠지만, 일단 독특한 금색 의상을 갖춘 안무가의 등장과 함께, 마찬가지로 남녀 무용수가 착용한 은색의 짧은 드레스 아래로 보이는 ‘몸뻬’의 바짓가랑이만으로도 참가자의 시선은 이들에게 집중된다. 잠이 깬 것이다. 이제,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참가자의 시선을 제압한 안은미 안무가는 댄스에 대한 참가자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막춤을 선사한다. 아울러 참가자와 무용수 간의 친밀도는 급상승한다. 상황의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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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이완하고 다시 시작
사실 우리에게 공개적인 졸업파티란 낯선 문화이다. 졸업 시즌에 단골 메뉴로 제공되는 뉴스 대부분은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음성화된 신고식이다. 하지만 이날 개최된 댄스파티는 부담 없이 놀 수 있는, 그야말로 ‘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어떤 안무가보다 이러한 의식에 투철한 안은미 안무가는 앞서 완결된 시민참여형 춤 공연과 커뮤니티 댄스를 진행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몸짓을 그린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 십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심 없는 땐쓰>(2012), 중장년층 남성의 애환이 반영된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2013) 시리즈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안은미 안무가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춤을 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강한 에너지를 알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춤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 졸업파티에도 적용된다.
“사실 이렇게 어린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아마도 이 친구들은 지금 부연 안개 속을 걷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들도 곧, 갑자기 현실의 가혹함을 겪게 될 것이다.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위태롭게 과속을 내며 달리는 만원 버스에서 나의 생존능력을 떠올리곤 했다. 내일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견뎌낼지를 생각했다. 지금 이 친구들에게 그러한 생존능력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표피적으로 봐도 황폐해진 상황이라 이완이 필요하다. 몸의 수축이 계속되면 뇌가 굳고 생각이 굳는다. 이른 아침, 이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경험한 현대무용은 마치 꿈같을 것일 게다. 뭔가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왔다 갔다 이상한 경험이지만, 초조한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의 짐을 다소 덜어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돈 안 들고 창의적으로 놀 수 있는 방식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 안은미 _ 안무가, 문화예술 명예교사

참가자들이 댄스파티에 집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그들이 직접 신문지로 의상을 만들어보는 과정에 있었다. 개인별로 종이옷을 만든 참가자도 있었지만, 그룹별로 자연스럽게 모여 일종의 캐릭터 의상을 만들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제시된 주제에 따라 화려한 망토와 왕관, 칼 등 소품의 세심한 구성까지 갖춘 그룹도 있었다. 전체 70여 명의 참가자 중에 압도적으로 남학생이 많았던 상황이라, 다소 까칠해 보이는 그들이 순순히 신문지와 풀, 가위를 가지고 ‘의상 만들기’에 그렇게 집중할 줄은 몰랐다. 예상 밖의 일이다.
“나 역시도 학생들이 이렇게 얌전히, 서로 어울려 노는 것에 놀랐다. 평소에 안 해본 것이지만 학생들은 손으로 만드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 사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괴롭다. 시험을 마쳤지만, 진학을 하든 취업을 준비하든 간에 아직 자신의 앞길을 모른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함께 어울려 지낸 친구들이 서로를 ‘비교’하게 된다. 그전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졸업을 앞두고 생겨나는 것이다. 두려움, 불안, 후회, 아쉬움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바로 이 시기가 그렇다. 교사로서 해주고 싶은 말은 이렇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작심삼일이라도 좋다. 3일마다 각오를 다진다. 지금까지 안 해서 후회하는 일이라도 지금 시작하면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점을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지금이라도 깨우쳤으면 한다.”

– 김옥선 _ 세명컴퓨터고등학교 교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은 땀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음주․가무’가 아닌 건강한 놀이를 통해 머리와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은 비단 땀만은 아닐 것이다. 삶이 공부에 점령당한 청소년이나 혹독한 경쟁 속에 노출된 성인들에게 댄스파티와 의상 만들기와 같은 놀이적 세계를 선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잠시 현실 세계를 잊고 몸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 이상의 뭔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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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졸업파티를 처음 가 본 오늘, 잠시 시간을 되돌려본다. 나는 언제 청소년이란 꼬리표를 떼고 어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좀 우스운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댄스파티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감각을 열어보려고 눈을 반짝이는 열아홉의 그들을 보면서, 아뿔싸! 어른이라는 자의식은 점차 감각의 퇴화로 얻어지는 불감증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그들과 나이 든 나는 확실히 감각의 반응이나 상황의 적응력에서 차이가 크다. 집에 가서 체조라도 시작해야겠다. 몸의 감각을 깨어야지 생각이 덜 경직될 것 같다. 이제라도 시작한다면 아직 늦은 게 아닐 수도 있다.
놀이적 발상과 움직임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고3 졸업파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두 시간가량 그들이 음악의 리듬에 맞춰 흔들어댄 몸의 감각과 낯선 예술가와의 만남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졸업파티는 그들에게 소소한 놀이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안무가가 말한 대로 돈 안 들이고 노는 법을 그들에게 보태 준 셈이다.
2015 고3 · 수험생 대상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상상만개’
‘상상만개’는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들의 닫혀 있던 몸과 마음의 감각을 깨우고, 예술가와 함께 생각을 나누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수험생들이 그동안의 학습과 시험에 대한 부담을 비워내고 청년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서로 응원하고자 마련되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된 ‘2015 상상만개’는 11월 17일부터 12월 17일까지 대구, 부산, 광주, 대전, 서울 등 5개 지역에서 학교별로 참가하는 대규모 프로그램 ‘Go! Go! 고3’, 20~30명 내외의 고3 학생들이 참여하는 소규모 프로그램 ‘삶을 짓는 상상’, SNS 캠페인 ‘To 고3’과 프로그램 결과를 시민들과 공유하는 전시회가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은 고3 학생들과 안무가, 건축가, 만화가, 시인, 밴드(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만나 랩, 액션드로잉, 무용, 영화, 음악 등을 매개로 일상적인 관계와 공간, 움직임 등을 깨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상상만개 페이스북 www.facebook.com/sangsanggo3

염혜원
염혜원 _ 자유기고가
연극을 공부했고 월간 [한국연극], 국립오페라단,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일했으며,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나오시마 삼인삼색』(웅진리빙하우스)이 있고, 『연극 속의 청소년극, 청소년극 속의 연극』(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등을 기획·편집했다.
byeyum@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