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시대, 재외 민족공동체의 새로운 역할

2001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참사가 일어나자 외교통상부는 뉴욕(유엔) 근무경험이 있는 필자를 뉴욕총영사로 임명했다. 그해 11월에 뉴욕총영사로 부임한 필자는 100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에서 다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 참석해 국제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인들의 비장한 각오와 응징결의를 직접 보고 듣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잘살고 안전한 기회의 땅이라고 믿고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우리 동포사회 역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뉴욕동포사회 지도층 인사들 중에는 뉴욕총영사가 방백으로 예전 평양감사 같은 직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난국에 놓인 미국(특히 뉴욕지역)의 총영사로서 과연 무엇부터 해야 할 지 곰곰이 생각한 결과 50만 뉴욕 동포사회를 미국 주류사회는 물론 다른 민족공동체와의 협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특히 뉴욕지역에서 정치 · 경제 · 문화 · 예술 · 금융 · 교육 · 미디어 등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이 막강하고 또 다양한 한인동포 생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태인 공동체와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하고, 또 African American(흑인) 네트워크와도 협력을 추진했다. 그 후 정치적 영향력이 큰 유태인공동체는 물론 미국 의회에서 영향력이 큰 찰스 랭글 17선 의원도 우리 한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매우 높이 평가하게 됐다.

하루 1달러 돕기 운동 실천하는 뉴욕한인공동체재단다른 민족공동체와의 협력 강화 업무와 관련해 뉴욕동포 지도층 인사들과 자주 만나던 와중 어느 한 분이 들려준 몸소 겪은 이야기에서 좋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30여 년 전 남미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한인가게에 야채를 배달하면서 어렵게 살던 시절 교회에서 만난 한 노인으로부터 트럭 살 돈을 지원받았다. 훗날 노인에게 빚을 갚으려고 하자 그 노인은 사양하면서 대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에 그 사람은 이민온 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트럭을 사도록 도와주는 일을 시작하게 됐고, 이어서 가정폭력희생자, 불우청소년, 장애인, 노인들을 돕는 다양한 자선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 미담의 주인공을 포함해 몇몇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하루 1달러 돕기(A dollar A day) 운동을 시작하기로 하고, 이 운동에는 바쁜 일상에 얽매여 동포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1.5세와 2세 청장년을 최대한 참여시키기로 했다. 이것이 모티브가 되어서 창설된 것이 뉴욕한인공동체재단(NY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 KACF)이다. 2002년 말 총영사관저에서 첫 모임을 갖고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하되,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원칙을 정하고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창립이사회의장은 세브란스 부원장과 뉴욕 시립병원장을 역임한 홍준식 박사, 창립회장은 법무법인의 수석변호사(파트너)로 맨해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권도장을 쌍둥이 동생(두 사람 모두 태권도 5단)과 함께 운영하는 황성철 변호사가 맡기로 했다. 세계 최대 출판사 랜덤하우스 CEO와 아시아 부회장을 역임한 지영석, ABC TV 앵커 주주 장, FOX TV 앵커 윤경, 체이스은행 지점장 카렌 나, 황준철 변호사, 노재헌 변호사 등이 창립이사를 맡았다. 총영사관은 처음 시작 단계에서만 도와주고 몇 달 후부터는 이사진이 주관토록 했는데 직장에서 늦게까지 근무하고 한밤중에 만나 새벽까지 회의하고 해외출장자도 국제전화로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 열의에 큰 감동을 받았다. 2002년 말에 총영사관 직원들과 20여명 동포들이 시작한 이 운동에 지금은 2천 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미국 명문대 출신이다. 작년 모금만찬에는 뉴욕호텔 볼룸 최대 수용인원인 945명이 참석해 70만 달러 넘게 모금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KACF가 미 주류사회 Ford재단,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 소사이어티 같은 주요 단체와 협력사업을 하게 되자 최근에는 공화당과 민주당 싱크탱크에서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미국 가정이나 학교교육에서 제일 중요하게 손꼽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 고통을 나눈다는 뜻)을 기르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되는데 뉴욕 한인공동체재단이 미국과 캐나다 동포사회에서 역할모델이 되고 있어 여간 기쁘지 않다.미국에서 민족공동체 역할이 왜 중요한가?미국 인구의 2%(600만 명) 밖에 안되는 유태인들이 미국 정치인의 20%를 차지하고, 경제 · 금융 · 교육 · 언론 · 문화 ·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지도자를 어떻게 양성해내는가를 보면 민족공동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각 지역에 거미줄처럼 짜여있는 수많은 유태인 공동체가 그들의 온상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에 대한민국과 수많은 약소 개도국의 수십억 인구를 식민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정으로부터 누가 구해 냈는가? 필자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마음과 그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큰 꿈 덕택이 제일 컸다고 믿고 있다. 그가 신봉하고 주창했던 4대 자유 즉, 믿음(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 부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41년 의회연설에서 나치, 일본제국주의, 파시스트를 ‘인류 공동의 적’이라고 규정하면서 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 공적들을 모두 제압하고 해체시켜버린 덕분에 우리와 수많은 나라사람들이 4대자유와 주권을 되찾게 된 것이 아닌가. 4대 자유를 포함한 인류 보편적가치의 공유가 한·미동맹의 초석이 되어 우리의 안보를 지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 미국은 경제 · 금융 · 교육 ·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협력 파트너가 되어 우리는 모든 국가가 부러워하는 민주 · 경제대국을 건설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세계를 이끌어 나갈 미국과의 협력 틀을 더욱 넓혀 동맹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미국 주류사회와 협력체 우리 한인 동포사회가 튼튼한 가교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