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폭발하는 에너지가 교감하는 무대,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

이선옥|기획운영팀장|dal0310@naver.com

나는 지난 여름 내가 한 일을 기억하는가? 에딘버러를 다녀온 지 불과 한달 반 남짓 지났으니 또렷이 기억해야 하건만 시간의 체감 흐름이 유럽보다 몇 배는 빠른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속에 살다보니 벌써 몇 달 전 기억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벌써부터 내년의 축제를 꿈꾸고 기대하게 된다.

나에게 “프린지(Fringe, 사전적으로 가장자리, 주변부 의미)”는 개인적으로 문화예술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젊은 예술인들과 뜻 맞는 예비 문화기획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의도치 않게 한번 크게 판을 벌인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활동을 통해 축제 자체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던 것이다. 이후 프린지의 역사적 연원으로 흔히 언급하는 유럽 프린지의 양대 산맥인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와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OFF)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두 축제 모두 공식 행사인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과 아비뇽 페스티벌(IN)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유럽의 삶을 치유하고 화합하기 위해 1947년 만들어졌다는 역사적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공식 행사와는 별도로 미학적, 정치적 입장에서 궤를 달리하는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목소리들이 모여 각각 프린지와 오프가 탄생했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이 있다.

유럽 프린지의 양대 산맥,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와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과는 지난 2002년 관객으로 참여하면서 인연이 시작됐고, 2003년에는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의 축제감독인 알랭 레오나르씨를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강연회에 기획 초청하는 뜻깊은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매년 7월 한달 동안 아담하고 고풍스런 도시 아비뇽은 공연예술과 관련하여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예술인들과 관객들로 마치 마법처럼 아름답게 변모한다. 일상적인 공간들이 저마다 다른 색깔의 공연장들로 탈바꿈하며 아마추어 극단부터 유명 전문극단까지 500개 이상의 극단이 600여편의 공연을 가지고 일상적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공연장, 카페, 광장, 거리 등이 온통 공연과 삶에 대해 토론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아비뇽은 축제 동안 관객들에게는 공연예술에 대한 일상적 체험을 제공하는 장이 되며, 예술인들에게는 특히 신진 작가들에게는 교육 및 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한다. 특히 매해 새로운 주제로 진행하는 각종 컨퍼런스나 배우와의 만남 등을 통해 예술인, 매개자, 관객 교육에도 노력하고 있다.

자국 문화중심, 자국 예술인들의 육성에 좀더 무게 중심을 두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비해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은 참여도나 기타 규모 면에서 더욱 국제성과 상업성을 겸비하여 국제아트마켓으로서 그 역할과 영향력이 막강하다.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유서깊은 도시 에딘버러에서 펼쳐지는 “에딘버러 페스티벌”은 사실 독립적으로 기획 조직되는 7개의 축제가 서로 다른 색깔로 함께 빛나는 무지개와 같은 형상을 띈다. 에딘버러 국제 재즈 & 블루스 페스티벌(7.30-8.8 www.jazzmusic.co.uk), 에딘버러 밀리터리 타투(8.6-28 www.edintattoo.co.uk),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8.8-30 www.edfringe.com), 에딘버러 국제 북페스티벌(8.14-30 www.edbookfest.co.uk),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8.15-9.5 www.eif.co.uk), 에딘버러 국제 영화제(8.18-29 www.edfimlfest.org.uk), 에딘버러 멜라(9.4-5 www.edinburgh-mela.co.kr)가 함께 모여 전체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구성하지만, 지금의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라는 공연예술계의 세계적인 브랜드 창출은 상당부분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 기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프린지는 공식 행사의 단순한 부대행사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나 파급 효과 면에서 공식 행사를 넘어선 지 오래되어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라는 이름 자체를 빼앗아와야 할 단계가 아니냐는 도발적인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역사의 흐름이란 참 얄궂은 면이 있다. 1947년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 때 초청받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이 주류 기성 예술계의 홀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주변부(fringe)에서 만든 움직임이 이제 주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넣는 것을 넘어서서 주류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줄 그 당시 기성 예술인들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에딘버러 프린지의 성장 그리고 상업화의 그늘

한편 에딘버러 프린지는 오랜 역사와 함께 성장을 거듭하면서 상업적 성공이 몰고 온 부작용들도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싸구려 캬바레쇼, 무명배우들, 값싼 티켓, 학생 공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공연 등의 몇가지 혼합적 키워드로 알려졌던 프린지가 이제는 급속하게 유명배우, 손익계산 빠른 후원/협찬사와의 계약, 런던의 브로드웨이인 West End와의 거래라는 완전히 다른 언어들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대중에 영합하는 공연물들, 관료화, 관람료 상승, 배우나 극단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심화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올 8월에 가서 몇 편의 공연들을 보며 느낀 것은 프린지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나 가치 그리고 활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논리로 움직이면서 많은 공연들이 영국 ‘채널 파이브’ 같은 상업 방송에서 나올 법한 너저분한 공연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적잖은 실망이 들기도 했다. 티켓 가격 또한 대다수가 10파운드(1파운드 약 2,100원)를 상회하며 어느 정도 이름있는 배우나 극단의 작품의 경우 심지어 16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예술인들 역시 영국 코미디씬의 스타들의 경우 축제 기간동안의 공연으로 50,000파운드까지 벌어들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신생팀의 경우 여행경비도 충당하기 힘들 정도이다. 심지어 좋은 평을 받는다 하더라도 축제 기간동안 5,000 파운드 정도는 손실을 보는 게 일반적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부작용들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넘나들기라는 자연스러운 역사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기성 주류 예술계는 비주류가 가진 새로운 에너지를 수혈받고, 비주류의 울타리에서 좀더 확장을 꾀하는 움직임은 주류로 넘나드는 과정. 이 과정이 유연하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전제로 할 경우 생산적인 파트너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지나치게 상업화로 치닫고 있는 에딘버러 프린지에 반발하는 “프린지오브프린지(finge of fringe)“라는 새로운 흐름도 이미 만들어졌다. 두세군데 대형 홍보사들을 끼고 진행하는 공연물들과 달리 협찬이나 홍보사 없이 직접 목청 돋구어가며 공연을 알리고 엽서를 돌리는 등 ‘자가재정운영(self-financed)’을 실천하고 있는 예술인들에게 에딘버러는 아직 가능성의 무대로 열려있다.

탈일상적인 축제 무대에서 문화예술을 일상적으로 발견한다시내 곳곳의 공연장, 교회, 까페, 주차장, 공터 등을 개조한 207개의 장소에서 연일 1,000여개 이상의 공연이 이루어졌던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 2004는 전년도에 비해 참여 관객 면에서 더욱 성장하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객은 예비 공연자, 기획자, 언론인 등으로 그 면면이 다양하다. 이들에게 에딘버러 프린지는 탈일상적인 축제 무대에서 역설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발견의 기쁨을 일상화하는 공간이다.

에딘버러 프린지는 방대한 공연물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워크숍이나 이벤트 등의 교육 프로그램도 관객 취향대로 다채롭게 기획 운영한다. 에딘버러 중심가 곳곳에 위치한 프린지 클럽에서는 직업 배우, 극작가, 디렉터를 위한 전문적인 워크숍 예컨대 세익스피어 작품의 대사와 구조와 같은 세심한 부분부터 그 사상에 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 원작을 각색하는 방법에 대한 워크숍, 캐릭터 탐구 및 스토리텔링 워크숍, 피지컬 씨어터 작업에 필요한 테크닉을 연마하는 프로그램, 탱고/아프리카 댄스/브레이크 댄스/요가/피트니스 등 신체 표현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무료로 또는 적은 비용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워크숍 프로그램들을 통해 배우들은 다양한 나라들에서 온 전문인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경험을 갖게 된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인 교육 프로그램 외에, 별도의 선정 기준없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에딘버러 프린지라는 무대에서 작품을 만들고 홍보하고 다국적 관객들, 타국의 예술인들, 기획자들을 만나는 축제 참여 과정 전체가 더 나은 공연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데 필요한 압축적인 교육의 장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연예술과 관련한 직업인들 외에 일반 관객들을 위해서도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Drama games & Singing for fun’과 같은 워크숍은 8세부터 80세 사이의 특별한 경험이나 테크닉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 가능한데, 다양한 연극 놀이를 활용해 즉흥적으로 직접 자신만의 무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드라마가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되는지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또한 어린이들만을 위한 특화된 교육 프로그램도 있는데, “My Neverland”와 같은 워크숍은 7-10세 사이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게임과 상상놀이를 통해 어린이들 특유의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한다.

축제, 문화예술교육의 드넓은 광장으로서의 가능성

매년 8월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에딘버러 인구는 평소에 비해 세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또 이 기간 이후 에딘버러 사람들은 몇 달 일하지 않고 쉬어도 될 정도로 축제가 지역에 끼치는 경제적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지방자치제와 궤를 같이하여 우후죽순 수많은 지역축제들이 생겨났다. 일정의 문화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이들 축제들이 비판받고 있는 주된 이유는 서구의 유수한 축제들이 가진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생략하고 경제적 효과라는 현상에만 집중했던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자유로운 교감을 꿈꾸는 예술인들과 관객들의 진정성이 서로를 향해 일상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비일상의 공간. 축제는 그런 면에서 일상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문화예술을 일상적이되 밀도있는 폭발적 에너지로 체험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의 드넓은 광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정 기간과 공간에서 축제를 함께 경험한 예술인들, 기획자, 관객들은 다양한 소통과 체험의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한 채 이전과는 다른 감수성으로 새로운 삶을 기획하고 1년 후의 축제를 설레게 기대하고 준비할 테니까.

이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