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문화교육에 대해 묻는다: 청주여자교도소, 성미산학교, 문화예술교육

전효관|기획운영단장, 시민문화네트워크 대표<!– | nanaoya@hanmail.net–>

교도소와 문화의 집

7월 16일 청주에 간다. 좀 특별한 느낌이 있는 이유는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문화의 집> 시설을 하는데 한번 와보면 좋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일행들이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 때문에 한참을 교도소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10년 넘게 이곳 저곳의 교도소에 근무한 적이있는 직원은 특수한 어려움에 대해 내게 누누이 강조한다. 그 이야기에 내가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의사표시와 표정관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행들이 도착하고 난 후 문화의 집 시설 계획과 프로그램 운영계획을 들었다. 가급적 감옥 내부를 들여다보지 말라는 주문 때문인지, 아니면 ‘교도소’에 따라붙는 지겨운 편견 때문인지 시선 처리가 편하진 않다. 강당, 지하, 1층, 야외공간 등에 지원금을 받아 문화의 집 시설을 하려고 하는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들었지만, 사람들의 조건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아픈 수감자들을 위한 작은 공간 계획, 아이를 키우는 수감자들을 위한 작은 방 계획, 장기 수감자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 구상 들을 들었다.

나는 내내 문화가 삶의 ‘잉여’일 것인가, 아니면 삶의 ‘구성부분’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위적인 말은 적지 않지만, 실천은 언제나 부족하다. 교도소와 문화의 집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득 베트남 전쟁 당시 산 속에 아틀리에를 만들고 인상파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베트남을 방문한 사람들은 흔히 제국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내면적으로 성숙해져버린 베트남 사람들의 깊이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아마 그 정신적 성숙은 전쟁 중에 아틀리에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저력에 관한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성미산 학교

7월 18일성미산 학교준비모임에 들렸다. 십년도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 때 알던 김상복이라는 분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 기억 속에서 그는 전노협(생소할 사람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기 전의 노동운동 조직이다) 쟁의부장이었다. 지금은 성미산 학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고, 교사 모임이 있는데 한번 와보면 어떻겠냐는 청에 따라 지역에서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을 보기로 한 것이다.

성미산 지역은 공동육아, 성미산지키기 운동, 지역 카센터 설립, 대안학교 설립 등으로 이어지는 민간의 지역공동체 모델을 실험하고 있는 지역이다.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조건에서 민간의 자치 실험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상상하면서 그 애정과 열정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품는다. 교사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넘겨보면서 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진주처럼 박혀있는 한국사회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이력서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80년대라는 시대 경험이 숨을 쉬고 있다. 나는 희망과 좌절 사이를 비집고 있는 조그만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대 경험에 대해 섣부르게 재단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교만한 일이다. 개인의 이력서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경험에 지금 주목하는 이유는 열정과 애정을 복원하지 않고서 개선은 불가능하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문화가 실천의 과정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하면, 그 어려운 현장과 호흡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 사회의 문화 만들기 현장이 아닐까 생각에 빠져든다. 지속되는 현장이 없는 사람들과 현장의 고통을 부여받고 사는 사람들 사이의 분할이 문화적 의미에서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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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성미산학교 준비 온라인 커뮤니티)

국가와 민간, 그 경계에 서기

몇 년 동안 민간의 문제의식이 국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문화교육의 문제의식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문화교육 정책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민간 주체들이 발굴되어야 하지만, 그 토대가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정책 변화만큼 실질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천의 주체, 생산의 주체를 발견하기 힘든 것이다. 더욱이 서울과 지역의 차이, 운영 주체별 사업 이해방식의 차이, 상호작용이 거의 없는 사업방식 등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은 사업을 벌리는 만큼 되돌아보는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정책이라는 녹녹치 않은 사회적 과제를 현실에 착근시키기 위해서는 과정에 좀더 집중해야 한다. 작은 주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실효성있는 대책, 민과 관이 공존할 수 있는 프로세스에 대한 설계 등이 중요하다. 성찰의 주체가 아닌 사업 주체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주체일 뿐이다. 관리 능력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고 오만일 뿐이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흉내를 내는 것으로는 개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아주 작은 고민을 하는 직원, 성미산학교에서 교과과정을 고민하는 교사에게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유혹에 견딜 시간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숙고하고 다시 로드맵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애정을 가진 주체와 만나고 싶다.

전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