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리니, 전 지구적 이슈들이 죄다 보이더라

 

1980년대와 90년대 제법 두터운 독자층을 가졌던 김남일은 14년 만에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을 발표했다. 민중·노동문학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문적 여정은 이른바 <대자보문학>과 식민지 조선민중의 아픔을 그린 <국경>을 넘어 <천재토끼 차상문>에서 제국주의와 못난 대리인들이 자기 영토에서 저질렀던 지난 세기의 잘못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김날일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한동안 잊혀졌던’ 작가다. 이 역시 그의 말마따나 2002년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자주 거명됐던 이름이었는데 동명의 축구선수 덕분(?)에 변방으로 밀렸다. 오랜만에 작품을 출간한 뒤 한겨레신문의 하니TV(www.hanitv.com)와 공개방송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때도 김 작가는 이 말부터 꺼내 방청객들을 웃겼다.

 

“예전에는 김남일 검색하면 내가 제일 위에 떴는데 이제는 온통 축구선수 김남일 뿐이에요. (그래서) 요즘 나를 소개하는 게 어려워요.(웃음) 오랜만에 책을 내서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잘 썼다고 생각하고,(웃음) 쓰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를 들고 새해 벽두, 14년 만에 독자들과 다시 만난 그의 요즘 검색어 주가는 블로그와 카페 시장 강세, 뉴스 시장 보합세, 동영상 시장 약세다. 절반 이상은 성공한 셈인데, 오롯 작품성 때문이다.

 

소설가 박범신은 추천사에서 이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다. “기발하고, 재미있고, 슬프고, 무섭다. 좌, 우 폭력적 결합을 통해 태어난 토끼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그 발상에서 협소한 우리 서사문학의 지평을 넓혔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상상력 때문에 흥미진진하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반적 부정과 반역을 드러내 슬프기 한정 없고, 그 모든 것이 강력하게 오늘날 우리 삶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섭다”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 성 문제 등 골고루 관통

 

<천재토끼 차상문>은 좌파(도피 중이던 운동권 오빠의 여동생)와 우파(오빠를 추적 수사하던 공안경찰) 사이에서 성폭력으로 태어난 차상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낀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 성 문제 등을 골고루 관통한 작품이다. 모티프는 기술 발전에 반대하며 우편물 폭탄 테러를 자행했던 미국의 천재 수학자 유나바머로부터 따왔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무한정 버무려 탄생시킨 토끼 영장류 차상문을 통해 모든 주제들을 풍자적으로 파헤쳤다. “이 작품은 어떤 특정 주인공이, 어떤 사건까지 이르는 과정 속에서 어떤 심리적 갈등이라든지 그런 걸 추적하자는 데 초점이 있는 건 아니었고,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는 점에 신경을 썼습니다. 예컨대 주인공 차상문의 족적을 따라 지난 세기 195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굴곡뿐 아니라 전 지구적 이슈들을 모조리 다뤄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지난 2007년 소설집 <산을 내려가는 법> 한 권을 펴낸 바 있지만 장편소설로는 식민지 조선시대 민중들의 아픔을 아리게 그렸던 7권짜리 대하소설 <국경>을 펴낸 뒤 14년 만의 일이다. 1957년생으로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장편 <청년일기>와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등으로 1980년대와 90년대 제법 두터운 독자층을 가졌던 그는 언론의 일치된 표현대로 1980년대를 치열하게 건너온 민중·노동문학 작가다.

 

 

80, 90년대 대자보 문학의 대가

 

지난 2007년 전주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대회를 앞두고 관련 자료집의 마무리 교정을 보면서 함께 밤샘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 ‘김남일’의 이미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개가 겹쳐 자주 헷갈린다. 이종찬 시인이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밝힌 대로 ‘사람이 너무 착하고 좋아, 그저 얼굴만 떠올려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썩 좋아지는 작가’란 이미지와 그날 함께 밤샘하면서 이영진 시인이 그를 가리켜 표현했던 ‘80, 90년대 대자보 문학의 대가’란 이미지가 각기 낯설게 교차되기 때문이다.

 

“저야말로 80년대 작가죠. 80년대에 글쓰기를 시작해서 90년대 초반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썼지요. 그런데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 동유럽 국가들과 구(舊)소련 체제가 무너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좀 흔들렸습니다. 그 때부터 말하자면 허무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었다고나 할까요?”

 

이후 그는 베트남 여행을 통해 자신의 통로 하나를 열며 이후에는 작가 김남일보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든 이로,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란 모임을 만든 이로, 그리고 ‘아시아문화네트워크’ 대표 김남일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회자되곤 했다. 그리고 2007년 마침내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대회를 국내에 유치해 제국주의 중심 문학에 대항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문인들의 ‘전주선언’을 이끌어낸 중심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재미에 푹 빠져 쓴 작품

 

사실 김남일의 시선은 늘 한 가지였다.이번 작품에서도 그 같은 시선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IQ 200의 천재토끼 차상문이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난 뒤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토끼 영장류들을 만나게 되는데, 토끼 영장류들 모두가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저개발 국가 출신들이었다. 민중·노동문학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문적 여정은 이른바 <대자보문학>과 식민지 조선민중의 아픔을 그린 <국경>을 넘어 베트남이며 팔레스타인 등의 아시아네트워크를 거쳐 제국주의와 못난 대리인들이 자기 영토에서 저질렀던 지난 세기의 잘못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메시지, 그것이 그의 ‘착한 표정’에 담겨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번 작품을 쓰는 동안 너무 행복하고 좋았어요, 80년대부터 글을 써왔는데, 그동안은 흥이 나서 썼다기보다는 어떤 문학사적 의미, 무게, 세상에 대한 고발, 이런 것들만이 무겁게 짓눌려있었어요. 그런데 다 허무해지고 내 속에서 모든 걸 버리고 나니까, 이제 더 내려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고 나서 토끼를 발견한 게 작년 1월이었는데, 한 달 반 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800매 일차 초고를 다 썼을 만큼 재미에 푹 빠져 쓴 작품이라 오랜만에 독자들과 만나는 일임에도 부끄럽지는 않네요.”

한편 김남일 작가는 최근 출판전문방송 온북TV(www.onbooktv.co.kr)와 2시간 넘게 특별 대담을 가졌다. 문학평론가인 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와 함께 나눈 이 대담을 통해 그는 이번 작품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비롯한 자신의 문학세계 전반을 깊이 있게 드러냈다. 특히 최근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느낀 소회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 작가들에 대한 높은 식견을 알기 쉽게 설명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천재토끼 차상문> 독자들에게 덤으로 줄만한 즐거움 하나가 더 기다리는 셈이다. 3월부터 방송 예정이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