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움이 사그라진 객석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조금 전까지 부산하게 움직였던 무대 위에는 생기를 잃은 무표정한 인형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퇴락한 듯 삐걱거리는 발판 소리가 귓전에 전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는 앙증맞은 스트라이멜(유태교 전통 모자)을 닮은 모자에 동그란 안경이 꽤 인상적인 하영훈 한국인형극보급협회장이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글.사진_ 임종세 경기 통신원

 


 

 

되살려지는 기억

 

전 국토가 ‘개발’이라는 기치 아래 온 국민이 매진하던 시기, 인형극은 척박한 이 땅의아이들에게 공연이라는 형식의 ‘소통’을 통해 문화적 체험을 선사했다. 그 시절을 경험했던 이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두운 조명 아래 펼쳐지던 줄 혹은 손가락 인형들의 향연에 넋 놓았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숨이 가쁘게 지나갔고, 세상과 아이들은 그런 속도만큼 변해버렸다.
한 때 선풍적 인기를 몰고 왔던 인형극은 가끔 공연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고, 크게 위세를 떨쳤던 TV에서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소년들의 영역에서 마법과도 같았던 인형들의 움직임은 더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 자리를 화려한 CG가 곁들인 애니메이션과 실사로 제작된 SF가 채웠다.

 

필자의 유년시절 및 성장기도 위의 서술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만약 소극장에서 무심코 집어 둔 리플렛을 평소 습관처럼 읽지도 않고 가방에 넣어두었더라면 아직도 ‘그 시절의 추억’은 봉인된 채 긴 잠을 자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알록달록한 디자인에 키치한 사진이 배열된 홍보물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집어들자마자 그것을 읽어나갔다. 이윽고 종이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이름, ‘하영훈 인형극단’. 가지런하게 새겨진 인형극이라는 글자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가슴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내 유년시절의 기억을 서서히 되살렸다.

 

인형극계 전 분야에서 고군분투

 

극단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하영훈 회장은 극단의 프론트맨(간판 인물)이다. 전면에 내세운 이름 석 자는 곧 그가 극단의 대표이며, 예술감독이자 아직도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형 연기자임을 드러낸다. 단체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면 부천문화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인형극전문가 양성반의 주임 강사로 후학 양성에도 매진하고 있으며 한국인형극보급협회의 회장직도 겸하고 있다. 거의 인형극계의 전 분야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저는 국내 인형극의 역사에서 살펴 보자면 1.5세대 정도 되었다고 봅니다. 한국 인형극의 대부이신 안정의 선생문하에서 10년 동안 인형극을 연마했죠. 60~70년대 터전을 닦아놓은 1세대 선배들의 노고 덕택에 저를 비롯한 후배들은 비교적 쉬운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트이자 이내 능변이 시작된다.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국내 인형극의 역사에서부터 매력, 문제점 그리고 비전 등을 총망라하는데 언뜻언뜻 내비치는 예술에 대한 식견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인형극에 대한 추억은 사실은 왜곡된 것 이자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유독 우리나라의 인형극은 아이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것은 60년대 후반 TV 방송국 개국과 더불어 인형극이 도입 되었고, 대부분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되었음에 기인합니다. 무대 인형극이 비교적 활발했던 1980년대 초반조차 인형극은 거의 TV라는 단방향 매체에 의해서 전파되었습니다. 아울러 정치적인 상황과 경제적인 요인까지 맞물려 인형극을 무대에 올리는 단체마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공연물을 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인형극은 곧어린이와 동일성을 지닌 이미지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이런 현상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실 인형극은 소극장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고 대학로 공연문화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형극은 어느 시점부터 어린이에서 청소년을 가르는 경계로 작용 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던 것처럼 보였던 거죠. 지금은 인형극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배워온 사람들과 소수의 단체에 의해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인형극 제작이 시도 되고 있습니다.”

 

 

 

 

인형극은 트릭의 예술

 

하 회장의 명쾌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인형극이 성인이 된 우리 곁에서 더는 각광받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형극은 우리가 멀리했던 그 순간조차도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져 왔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인식 가운데 꾸준히 인형극 작업을 해온 까닭은 뭘까? 하영훈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형극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는 너무 다양해서 딱 꼬집어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사람이 할 수 없는 동작을 재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같이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한 동작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입니다. 게다가 사물을 의인화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지만, 인형극은 조형예술 이자 무대예술이기 때문에 고유의 비주얼을지니고 있으며 대사나 줄거리보다는 그 상황에서 풍겨 나오는 뉘앙스가 크게 작용합니다. 결국,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하죠. 공연은 인형을 매개로 해서 진행되는데 관객들은 그것이 ‘인형’인 줄 알면서도 몰입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것은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직접 연기 하는 처지에서 보면 정말 매혹적인 일입니다.”

 

 

문득 인형극을 하기 위해서는 손재주나 테크닉이 더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연기자 자체의 연기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공연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국내에서 인기 있는 작품은 줄거리나 서사가 주목을 받는 반면 국외 페스티벌에선 대사를 다 자르고 동선으로만 연기해도 많은 박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함께 작업 해 보면 기존에 연기했던 사람보다는 마임이나 무용을 했던 분들이 작품을 해석하고 표현하는데 더 탁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큰 것 같습니다. 인형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테크닉과 많은 훈련이 필요한데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올라서면 심플하고 임팩트 있는 동작이 좋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인형극에는 정년이 없다!

 

마지막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가르치는 처지에서, 하영훈 회장이 생각하는 인형극의 장래성과 교육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60대의 연기자가 있는데 이 연기자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20대의 역할을 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형극은 다르죠. 자기만 노력을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즉, 정년이 없는 거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 예술대학에는 정규 인형극학과가 없습니다. 학문을 통해 인력을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없는 거죠. 하지만 문화센터나 강습회를 중심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아교육과나 아동학과가 있는 대학교라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입문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럽에서 공부하고 온 40대 예술가 중 의식과 실력이 있는 친구가 꽤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형극을 시작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극단에 들어가서 기초를 쌓고 기본을 배우면서 창작물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극단 단원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며 인형극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인터뷰에 응한 하영훈 회장은 재치 있는 농담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분위기 즐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의 귀띔으로는 사실 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힘든 상황이었단다. 인터뷰를 마친 후필자는 하영훈 회장과 함께 식사했는데, 인터뷰 내내 그토록 활기차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분이 말수도 줄었고 음식물도 조심스레 신경 써 섭취함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 보였던 이 모든 행동은 뒤이어 있는 인형극 공연에 열정을 쏟아 붓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하 회장은 어김없이 무대에 서서 능숙하게 인형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