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享有)고래 이야기

신정수|웹진 콘텐츠팀<!– | nanaoya@hanmail.net–>

오랜 수행을 통해 지혜와 경지를 깨달은 스님들이 입적(入寂)하시면 다비식을 행합니다. 다비는 불교가 자리잡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행해지던 장법입니다. 깨끗이 씻은 몸을 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다비를 마치면 사리(舍利)를 수습하지요. 화장 후 발견되는 하얀 진주같은 사리는 그 스님이 평생에 체득한 지혜의 경지, 도의 경지처럼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간혹 그것이 오랜 좌선 때문에 체내 순환이 잘 안되어 만들어진 결석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리는 열반으로 들어가시는 스님이 세상에 남기는 지혜의 흔적입니다.

향유고래는 대게 15미터 안팎에 몸무게가 50톤을 넘나드는 커다란 동물입니다. 등지느러미는 퇴화되었는지 없지만 파도모양의 흔적이 남아있고, 이빨도 가슴지느러미도 거의 퇴화된 커다란 회색 동물이지요. 사람이 나이가 먹어가면서 머리가 희듯, 향유고래도 나이가 듬에 따라 몸빛깔이 하얗게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향유고래도 스님의 사리처럼 대장에 덩어리가 생기는데 용연향(龍延香)이라고 불리는 이 것은 값비싼 향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 향유고래 한 마리가 보은하겠다고 바닷가에서 배를 쩍 갈라 내어주던 그 향료 덩어리이지요.

문화예술 ‘향유자’ 교육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香油’라는 한자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저 바닷 속에서 사람이 들을 순 없지만 바닷물에 진동을 울리며 노래하며 향료덩어리를 뱃속에서 만들어 내는 향유고래 때문일 겁니다. 아르떼가 문을 열기 전, 웹진의 첫 번째 ‘지혜를 나누는 인터뷰’를 위해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님과 만났습니다. 며칠 동안 많은 질문을 고심끝에 만들어 가슴에 품고 장관실을 찾아갔지요. 첫 번째로
“요즘 문화부의 새예술정책을 보면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하게 배치되어 있던데요, 특히 문화예술교육이 향유자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교육이 강조되는 시대적 맥락, 정책적 맥락은 어떤 것인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창동 전 장관님은 쑥차를 한모금 드시더니 ‘향수자 교육은’이라고 말문을 여셨지요. 그 때 제가 장난스럽게 ‘에이, 향수가 아니라 향유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잘 몰라서 그러는데 향유와 향수의 차이가 뭔가요?”
라고 장난스럽게 되물으셨지요. 질문할 거리만 가득 준비해갔다가 질문을 들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머릿 속에 향유와 향수의 온갖 한자 조합들이 오가는데, 떠다니는 글자들을 이것저것 잡아서 비교해보니 같은 듯도 다른 듯도 하여 진땀을 뺐습니다. 그 때 머릿 속에 ‘향유고래’만 안 떠올랐어도 덜 당황했을 텐데요. 향유자 교육이라는 말은 제 머릿 속에서는 향유고래의 기름처럼 향기나는 기름이 입혀진 삶,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삶, 향기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향유(享有)와 향수(享受)는 둘 다 타동사로 향유는 ‘누려서 가짐’, 향수는 ‘받아서 누린다’, ‘(예술상의 아름다움 따위를) 음미(吟味)하고 즐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향기할 때의 향(香)이 아니라 누린다는 의미의 향(享)이지만 문화예술교육의 향유자 교육이라는 말은 향기를 누린다는 ‘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문화연대에서 진행하는 문화예술교육 3차 워크숍에서 홍진표 선생님께서는 음악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향유자 교육’이라는 말은 음악과 사회를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향유자 교육을 위해 음악과 사회가 교류하는 교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음악이 사회에서 울리는 모습, 그림이 사회 속에 위치한 빛깔, 몸동작이 사회 속에 무형의 흔적을 남기는 것, 이런 것들을 즐기고 누리는 눈과 귀와 몸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향기를 음미하는 향유자가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듣고 보고 즐기며 뱃속에 향기 덩어리를 만들어 가며 점차 그 사람 자체가 향기로워지는, 저도 ‘향유고래’가 될 수 있을까요?

신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