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대한민국, 오디션 전성시대 ① 오디션 현장취재 다시보기

 

2011년 여름, TV를 켜면 채널마다 다채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룬다. 재능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부터 이미 자기 분야에 일가견을 이룬 프로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 서바이벌에 이르기까지 온통 ‘제 점수는요~’의 긴장과 경쟁이 가득한 지금. 왜 우리는 오디션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우리 시대의 오디션 이상열풍에 대해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에게 들어 보았다.

감동의 물결이 넘실대는 성장 드라마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김어준 총수 특유의 ‘쾌도난담’ 어조를 그대로 살렸다.

 

먼저, 물어보자. 가장 큰 궁금증이자 핵심 사안이다. 왜 오디션인가?

 

아르떼진_ 2011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키워드 ‘오디션’. 현재 지상파 및 케이블의 최고 히트 프로그램은 대개 오디션-서바이벌 포맷입니다. 이 시대 대중이 오디션(서바이벌)을 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김어준 총수_ 서바이벌 오디션은 2011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키워드, 아니다. 세계적 키워드, 지. 혹자는 작금 대한민국의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의 원인, 현 정권에서 찾는다. ‘정의’ 결핍증후군으로 읽는 게다. 무대 위 한 줌 정의에 넋을 잃을 만큼 시대가 공정치 못하단 소리다. 옳다. 그런, 후진 시대다. 그러나 그 해석, 절반만 옳다. 실은 그 감각, 인간 보편의 것이다.

 

애초 정의롭기만 한 세계 따위 존재한 적 없으니까. 자연으로도, 인공으로도.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인간이 기억하는 가장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게다. 슬프지만, 그렇다. 정도의 차이와 감각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의 성공은 그래서 아프다. 그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암시하니까. 때론 보장하니까. 그것은 도무지, 정의로울 수가 없다. 적어도 내겐.

 

하여 인간이 정의를 갈망하는 건,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태생적 방어기제다. 우리 모두 그렇게 진화했다. 그래야 내가, 산다. 그 진화적 적응 없는 자, 죽었다. 도태 됐다. 서바이벌이 위로가 되는 건 그래서다. 최소한 내가 납득하고 설득될 수 있는, 성공의 프로세스니까. 하여 그 프로세스에 기꺼이, 나를 대입하거나 내가 개입하거나, 할 수 있는 게라. 일인칭으로 감정이입한, 한 편의 성장 드라마 혹은 한 판의 육성 시뮬레이션. 열광할 밖에.

 

역시 속 시원하다. 우린 이 ‘성장 드라마’에서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프지 않은’ 위로를 얻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러나 이 오디션이라는 건 그다지 새로운 포맷은 아니다.

 

아르떼진_ 오디션 포맷의 프로그램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전국노래자랑’, ‘주부가요열창’… 하지만 ‘보는 사람만 보는’ 구태의연한 내용이었죠. 과거의 오디션 포맷 프로그램과 2011년 대한민국 오디션 프로그램의 차이점(변별점)은 어떤 걸까요?

 

김어준 총수_ 전국노래자랑과 주부가요열창이 보여준 것은, 일반의 재능 잔치. 그것은 구경의 대상. 서바이벌 오디션이 보여주고 있는 건, 일반의 성공 서사. 이것은 감정이입의 대상. 비슷하지 조차, 않다.

뜨거웠던 만큼 잊는 것도 금방

 

그럼 또 질문 들어간다.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도 피해갈 수 없는 시비와 잡음이 있다. 어쩌면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들이 경쟁을 펼치는 것을 보기보다 그 뒷이야기 듣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르떼진_ 오디션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고, 시청률이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비하인드 스토리’에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1위 당선자가 내정설, 순위(투표)조작이 있다든지, 특정 후보 특혜 시비라든지… 왜, 사람들은,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 시청을 그토록 즐기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비를 걸까요? 심지어 최근 모 방송국 가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둘러싼 잡음은 거의 ‘사회적 집단 현상’에 육박할 정도니 말이에요.

 

김어준 총수_ 서바이벌 오디션이 대리 만족시키는 정의는,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정서적 정의니까. 내가 납득할 수 없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정의롭지 않은 게라. 그리고 방어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미성숙한 자아에겐. 특히 일반적인 서바이벌 오디션이 최후의 선택으로 그 서사를 종결한다면, ‘나가수’는 이미 선택된 자들을 다시 선출하고, 동시에 퇴출한다. 감정이입이 극대화될 밖에.

 

그렇다. ‘탈락’이라는 것은 잔인하다. 특히 ‘내 편’이 떨어지는 건 더욱 잔인한 일이다. 그 잔인함이 재미와 긴장을 주지만, 동시에,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린 모두 그렇다.

 

아르떼진_ 시비걸고, 의심하고, 목숨걸고 지지하던 내 후보 뽑히라고 ARS투표 독려하고- 그토록 열광하던 오디션 프로그램도 끝나고 나면 허무합니다. 실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1위 당선자들도 프로그램 이후에는 대중의 관심에서 신속하게 멀어집니다. 오디션 1위 당선자들이 성공적으로 대중문화 메인스트림에 편입되는 경우도 많지 않고요. 오디션 1위 당선자들의 생명력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김어준 총수_ 허무한 건 당연하다. 나를 대리하는, 내가 육성한, 내가 감정이입한 다마고치가 이제는 스스로 세상 속에서 성장해 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적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서사의 끝에 서 있는 것이 결국은, 내가 아니니까. 타사 다마고치의 성공을, 자사 시장장악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방송사들의 졸렬함이, 그 성장의 기회 자체를 지극히 제한하는 환경에서는 더욱.

 

오디션을 통해 태어난 스타들은 어쩌면 오디션 과정의 긴장과 재미를 위해서만 존재했던 이들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마치 고대 그리스 원형경기장에서 데스매치를 벌이는 검투사를 지켜 보는 것처럼, 최후의 1등을 위해 목숨걸고 하는 경쟁을 재미 삼아 관람하고, 경기가 끝나면 그들을 쉬이 잊는다. ‘내’가 싸우지 않았으니 잊음도 금방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제 점수는요~’

 

아르떼진_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 열풍이 이 시대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김어준 총수_ 프로그램에 따라 여러 유형이 있겠으나, 서바이벌 오디션이 가지는 긍정효과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위로’. 고단한 내 삶에 대한,

 

누구에게나 ‘쨍 하고 해뜰날’ 돌아 온다는 위로, 평범한 사람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역시, 오디션이란 그런 희망을 준다.

 

아르떼진_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열풍이 이 시대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어떤 것이며, 이 부정적 영향을 긍정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대중(문화소비자)들이 할 수 있는 액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어준 총수_ 경쟁지상주의, 신자유주의 따위 들먹이는 건, 먹물들의 지적 태만이다. 그나마 당대가 개발한, 가장 공정한 형태의, 감정이입 드라마를, 경쟁지상주의의 판촉물 정도로 간단하게 폄훼하고 나면, 세상에 뭐가 남나. 개인적으로 가장 큰 비용이라 여기는 건, 착시. 그 공정 누리는 자, 결국 한 시즌 당 한 명 혹은 극소수. 그것이 실제 현실사회의 공정 정도를 제고하지는 않는다.

 

‘착시’ 현상으로 뽑힌 한 시즌의 1위 당선자. 새롭게 태어난 ‘스타’가 가장 큰 희생을 치른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드라마’를 원하므로. 오디션은 계속된다.

 

김어준 총수_ 그럼에도 보편 정의에 대한 개개인의 정서적 결핍감은, 일정 정도 치유될 수 있다. 사회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그 착시. 다만 이 착시의 해소는 일개 문화소비자의 임무일 수 없으므로 여기까지.

 

정리_박세라
 
사진_김어준 총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