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인 공간민들레의 모든 학생은 매주 금요일마다 커뮤니티 댄스를 배웁니다. ‘왜 커뮤니티 댄스냐?’는 물음에 공간민들레 길잡이 선생님은 이 시간을 통해 몸도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바닥에 누워 한 것 몸을 풉니다. 머리를 빗고, 양치를 하고,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는 매일 아침의 일상을 몸으로 표현해 봅니다. 눈을 감고 내 몸을 스치는 친구의 손끝에 감각을 집중해보기도 하고, 생각을 비우고 앞사람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여봅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커뮤니티 댄스를 통해 나를 이야기하고,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난 6월 20일, 커뮤니티 댄스 수업의 다섯 번째 수업 현장을 이이체 시인이 담아보았습니다. ‘다른 몸’이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의 몸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춤 관찰기를 시작합니다.

 

공간민들레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색다른 문화예술 교육을 진행한다. 성산동에 위치한 대안학교 공간민들레는 매주 금요일마다 망원동의 마포 구립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커뮤니티 댄스를 함께 한다. 커뮤니티 댄스라는 것을 본다는 일 자체부터 애당초 나에게는 정체불명의 문화예술적 체험이었다. 더군다나 대안학교라는 특징이 한 층 더 빛을 발해, 아이들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예술 교육을 인간중심적이고 전인적으로 펼쳐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곳에서는 교사를 ‘길잡이’라고 불렀다. 길잡이 선생님은 나의 낯선 시선 안에 초대되어서도 결코 막연하게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교육 현장을 편히 지켜보기를 당부하며, 그들이 대안 교육의 장점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자율적인 예술 교육 프로그램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몸짓의 언어

 

학생들은 대체로 적극적인 편이었다.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것들에 능숙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참여하는 데에 적극적이고,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튀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강령이 지배적으로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그 아래서 받아온 교육이, 아이들에게 주었을 부정적인 영향은 상당하다. 어떤 아이는 어려서부터 홈스쿨링으로 공부해왔고, 어떤 아이는 불과 한 해 전부터 제도교육을 벗어나 자기만의 고민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아이들은 제각각 커뮤니티 댄스에 임하는 반응과 태도가 달랐다. 아이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에게 몸을 만지거나 몸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서로의 표현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했고, 해명하기도 했다.

 

의미와 목적에 얽매이지 않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목적으로 하는 수업인지 잘 모르겠어요. 알려주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때때로 아이들은 이러한 교육의 목적과 이유를 묻곤 했다고 한다. 비록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일정한 율동을 지어내는 것을 조금씩 배워오기는 했으나, 수동적으로 말하고 움직이기를 강하게 권해온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온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는 탓일 것이다. 목적과 이유를 묻는 행위 자체는 몸을 마음의 연장선상에서 쓸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티 댄스라는 예술 교육의 자장 안에서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목적과 이유를 강박적으로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른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통념에 전제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비유하는 일에 힘쓸 것 같았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오래도록 길 것이어서, 오히려 앞으로의 삶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너와 내가 서로 응시하는 ‘관계’

 

커뮤니티 댄스를 진행하는 강사들은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중요하고 수업보다 더 우선시되기 때문에, 수업의 진도와 진행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시험 범위까지 진도를 다 나가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선생님의 토로라기보다는, 본질을 전달하려고 부수적인 부분들을 먼저 집중할 줄 아는 침착한 기다림을 닮아 있었다. 예술 교육을 통해 몸과 마음의 씀씀이를 깨닫게 해야 한다는 본질보다, 아이들이 그 본질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소통의 자세를 배우는 ‘관계’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나가려는 점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가 무용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처럼 부자연스러운 상생이 아름다워서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을 때에도,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내가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술 교육의 열기 자체보다는 그것을 선용할 줄 아는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이었다. 항상 내가 가르치는 일은 물론 배우는 일에서조차 내 뜻대로만 해왔던 내가 배울 만한 면이었다. 예술 교육의 교안대로 가려는 발버둥치기보다는 수업을 유연성 있게 조율해나가면서 아이들과 서로의 편향된 지점을 확인하면서 서로의 편견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몸으로 나를 말하다

 

오래 전부터, 몸을 사용한다는 것은 나에게 마음의 윤곽을 어루만져주는 일과 같았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마음들이 있어, 그 마음의 생김새와 모양새를 가늠하기 위해 외부를 쓰는 일이야말로 내 마음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일임에도 가장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커뮤니티 댄스를 함께 배우는 시간을 갖는 공간민들레의 취지는 오롯하고 분명했다. 표현 수단이 언어에만 묶여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에 갇혀 사는 아이들에게, 대안교육으로써 자신의 표현 양식을 보다 더 직접적이고 풍요롭게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예술 교육의 현장에서, 언어 이외의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몸을 스스로 사용해가면서 나만의 몸짓과 행위를 만들어갈 수 있게끔 가르치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데에 아쉽고 부족했던 아이들의 내면을 끌어내는 동력이 되고 있었다. 아이들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마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몸 자체만으로도 홀로 움직일 수 있는 귀여운 일임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은 무척이나 명징한 일이었다. 내가 편견으로 알고 있던 ‘춤’의 조잡하고 정련된 행위들과 다르게 간결하고 명료했다. 오히려 간단한 동작들을 통해 몸으로 마음에 가 닿는 일상적인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무슨 일을 배우는 건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공부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을 때가 있어요.” 아이들은 입을 모아 자신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 교육의 형식에 대해 말했다. 배움이 본래 그렇고 앎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삶을 모르는 채로 그냥 살 듯, 어떤 공부는 이해와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유에서 출발한다. 나는 아이들과 어설픈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에게 자주 대답했다. 그 대답을 되풀이할 차례이다.

 

그냥 하면 돼.


이이체

글•취재_이이체

198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2008년 《현대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가 있다.


이번 글에서 다룬 공간민들레의 ‘커뮤니티 댄스’ 수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여성가족부가 협력하는 2014 부처 간 협력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 ‘학교 밖 청소년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학교 밖 청소년 사업은 학교 밖 청소년(가출‧자립‧탈학교 등)이 사회적 관계성을 회복해 자존감을 향상하게 하고, 문화예술을 통한청소년 돌봄 기능을 확대하고 있다.이중 대안학교 대상 사업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서울시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가 공동 주관사업으로 현재 8개 문화예술교육단체(공간민들레의 ‘커뮤니티 댄스’ 수업을 진행하는 예술꿈학교 포함)가 대안학교 10개 시설(공간민들레 포함)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장 사진 보러가기  http://www.flickr.com/photos/arte365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