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블루스라고 하면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대중음악 속에서 블루스는 수십 수백 가지 장르들 중 하나로만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미국의 음악학자 수잔 매클러리는 20세기 음악 풍경을 회고한다면 블루스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20세기 음악 속에서 블루스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오늘은 최유준 음악평론가에게서 블루스 양식과 그 문화적 의미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미국의 저명한 음악학자 수잔 매클러리는 “미래의 음악학자들이 20세기의 음악 풍경을 회고한다면 우리 모두를 <블루스 시대 사람들(blues people)>, 즉 블루스 음악과 거기서 파생된 수많은 음악이 지배했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로 규정하게 될 법하다”라고 말했다. 18세기 후반을 ‘고전시대’, 19세기를 ‘낭만시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20세기는 ‘블루스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매클러리의 이와 같은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듯하다. 특히 한국에서 ‘블루스’는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에서 흘러나오는 느린 춤곡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대중음악에 좀 더 밝은 사람들이라 해도 ‘블루스’를 대중음악의 수십 수백 가지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20세기 전체가 ‘블루스 시대’라는 식의 얘기는 과장된 언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좁은 의미의 블루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민요에서 유래된 20세기 대중음악의 한 가지 장르다. 이러한 협의의 블루스는 ‘블루스 12마디 형식’이라 불리는 관습화된 형식을 자주 쓴다. 블루스 양식을 이렇듯 좁게 보더라도 20세기 음악 전반에 미친 블루스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가령, 글렌 밀러 악단의 <인 더 무드>(1939), 척 베리의 <롤 오버 베토벤>(1956), 제임스 브라운의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1965), 그리고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1985)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모두 블루스 12마디 형식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블루스 12마디 형식을 쓰고 있는 최근 발표된 한국의 블루스를 한 곡 들어보자. 1절 가사를 통해서 형식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Video씨없는 수박 김대중, <불효자는 놉니다>(2013)

 

불효자는 놉니다 울지 않고 놉니다 (하모니카 솔로) *4마디 1행
월화수목금토일 쉬지 않고 놉니다 (하모니카 솔로) *4마디 2행
해가지면 집을 나와 술마시고 기타치는 불효자는 울지 않고. *4마디 3행

 

3행으로 이루어진 블루스 12마디 한 세트를 ‘코러스’라고 부르는데, 블루스는 이러한 코러스를 반복하면서 즉흥적인 가사를 이어간다. 가사의 측면에서 블루스는 일종의 정형시 양식이기도 한데, 초장-중장-종장의 3행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시조와 닮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블루스의 경우 1행과 2행의 가사는 대개의 경우 동일하거나 유사하기 때문에 ‘초-중-종장’이 ‘a-a-b’의 형식을 보인다.

 

블루스는 노동요를 모태로 하기 때문에 ‘메기고 받기’의 양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예로 든 <불효자는 놉니다>의 1행과 2행에서 블루스 가수가 앞쪽 두 마디를 선창으로 노래하면(메기면) 나머지 두 마디는 하모니카가 받아서 연주한다. 선창-후창의 보편적인 민요 형식이 블루스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블루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은 요컨대 20세기의 대중매체 환경에서 살아남은 민요, 다시 말해 도시의 민요이다. 블루스는 서양 근대음악의 발명품인 수직적 화음(도시적 감수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블루노트’라고 불리는 서양 오선보로는 기보가 불가능한 굴곡음들과 거친 음색, 그리고 미묘한 리듬을 쓴다. 후자가 만들어내는 ‘낯선’ 정서가 블루스의 생명력을 만드는 원천이기도 한데, 20세기 음악사에서 이는 ‘도시의 타자’를 화자로 삼은 비판적·저항적 정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실상 ‘재즈’는 블루스의 기악 버전이라 할 수 있으며, ‘록큰롤’은 부기우기 블루스에 이어 템포가 빨라진 블루스이며, ‘리듬앤블루스’는 그냥 블루스의 다른 이름, 나아가 ‘힙합’은 리듬과 언어적 측면이 강화된 블루스다. 20세기 전체가 블루스의 시대라는 매클러리의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블루스가 ‘도시의 민요’라면 ‘한국의 블루스’는 무엇일까? 한국의 대중음악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블루스적 성격’을 갖겠지만, 아래의 동영상에서 그 한국적 원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영상 속 재즈공연무대에서 가수 나윤선은 프랑스 청중을 앞에 두고 <강원도 아리랑>을 부른다. 이 노래를 프랑스 청중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나윤선은 (동영상의 1분 30초 지점에서) 한 마디로 표현한다. “Korean Blues!”

 

Video나윤선, <강원도 아리랑>

 


아르떼365 최유준 음악평론가





글쓴이_ 최유준 (음악평론가)

서울대와 동아대에서 음악미학과 음악학,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월간 객석> 등의 지면을 통해 음악평론가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사업단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과 대중문화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사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비평적 노력을 해왔다. 저서로 『음악문화와 감성정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지식인의 표상』, 『비서구 세계의 대중음악』, 『아도르노의 음악미학』, 『뮤지킹 음악하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