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드로잉(drawing)이라고 하면 무엇부터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드로잉은 하나의 작품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 스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하지만 최근 드로잉 그 자체를 작품으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면서 드로잉만으로 구성된 전시와 공모전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오늘은 정수경 미술이론가와 함께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그 예술적 가치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드로잉drawing 하면 스케치, 소묘, 밑그림 등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완성된 작품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드로잉을 번역한 素描(소묘)라는 말이 다름 아닌 ‘바탕을 그리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많은 미술가들이 드로잉이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한다. 이럴 때 드로잉은 주로 선을 이용해 대상의 형태를 얼추 그려내는 밑그림 그리기가 된다.

 


에곤 쉴레,
<팔을 머리 뒤로 튼 자화상>, 1910

물론 밑그림 수준에서 드로잉을 사용하지 않은 작가들도 제법 많다. 대표적으로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많은 작품들이 통상 색채드로잉으로 분류된다. 즉 색이 있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색채보다는 선의 표현력에 더 많이 의지하여 그린 그림들이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확실히 힘 있고 표현적인 선들의 인상이 강렬하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미술사에서 비전형에 속한다. 더 많은 화가들이 드로잉을 밑그림으로 간주했다. (조각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밑그림’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경시하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드로잉을 일종의 회화 장르로 특화하여 제시하는 전시와 공모전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러한 특화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바는 그간 드로잉이 상당히 폄하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드로잉을 그 자체로 작품으로 내세우는 데는 상당한 용기와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하지만 드로잉은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작업이 아니다.

 

 

벨베데레의 아폴론, BC 5세기 경

미술사를 훑어보면, 드로잉이야말로 르네상스시기에 미술 개념이 성립하는 데 있어 일등 공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미술사에서 근대미술의 교본처럼 여겨졌던 고대 그리스 고전기의 조각들이 당대에는 단순한 손기술의 산물로 치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이 엄한 편견이었다 하더라도, 당대의 인식은 분명 그러했다. 아무리 탁월하게 조형화되어 있는 작품이라도, 거기에 인간 정신이 깃들어 있는 흔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한 드로잉은 다름 아닌 그 ‘인간 정신의 흔적’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업노트가 보여주듯이, 드로잉은 단순한 밑그림 이상이었다. 그것은 작품의 모델이 되는 현실 대상들과 공간들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탐구와 파악의 결과물들이었고, 작품이라는 결과적 구축물의 가장 근본적인 골조이자 토대였다. 드로잉 없이는 미술이라는 평가가 따라올 수 없었다. 지금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드로잉 위에 입혀진 색채가 가변적이고 찰나적인 현상의 재현, 달리 말해 감각적인 ‘껍질’ 같은 것으로 여겨져 드로잉보다 덜 중요하게 다루어졌었다. 이는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서 드로잉이 핵심교과목이었던 데 비해 채색은 1863년에 와서야 비로소 정규교과목이 되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두개골 드로잉. 아주 정밀하게 그렸다는 사실 외에, 그가 두개골의 형태에서 수학적 원리를 파악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른쪽)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 1485. 인물의 관절부위 곳곳에 남아 있는 선들은 이 드로잉이 이상적인 인체비율로 간주된 황금률에 의해 면 분할을 먼저 한 뒤 그에 맞추어 인물을 그려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들’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드로잉은 밑그림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기에 이른 것일까? 이는 한편으로는 17세기 이후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 대상과 공간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미술이 아닌 과학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시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색채와 감각적인 것의 가치가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미술의 미적 가치로 새롭게 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빛을 그린다는 모토 하에 드로잉 과정을 생략했던 모네의 인상주의 회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드로잉은 필수 과정이 아닌,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준비 과정이라는 인상을 얻게 되었다. 에곤 실레처럼 드로잉을 선호했던 화가들에게도 그것은 인간 정신의 흔적이라기보다는 화가 고유의 감성적 표현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보편적 조형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성적인 변형과 결합되고, 다양한 감각적 색채들과 어우러지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양가적이다. 드로잉 개념에 대한 폄하와 드로잉의 영역 확장은 함께 가고 있는 듯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의 경향은 영역 확장에 방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드로잉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선의 감각성은 분명 큰 매력이지만, 보다 더 큰 매력은 머릿속, 마음속의 불분명한 구상을 선명하게 가시화하는 데 있지 않을까? 밑그림으로서의 드로잉은 단순히 대상의 얼개를 그려내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르지오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피력했듯이, 인간과 삶에 대해 우리가 지닌 생각(Idee; idea)들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열매 맺게 하는 일이다.

 

한 해의 시작이다. 어떤 한 해를 꿈꾸시는가? 어떤 한 해의 밑그림, 청사진을 드로잉하고 있으신가? 실행이 없는 밑그림은 그저 몽상으로 남겠지만, 구체적인 밑그림 없이는 실행이 따라오기도 힘든 법이다. 2014년을 즉흥적인 추상표현주의로 만들지, 아니면 꼼꼼한 드로잉을 따르는 세밀화로 만들지는 각자의 몫이다. 드로잉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매력적인 드로잉 작품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소마드로잉센터로 나들이를 가보는 것도 좋겠다.

 


정수경





글쓴이_ 정수경 (미술이론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이면 좋을지에 대해 미술현장과 이론을 오가며 고민하고 있으며, 고민의 결과를 글과 강의로 풀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